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시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농촌교회의 목사가 한 교인을 찾아가 정말 하나님을 섬길 준비가 되어있는지 시험해보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농장이 둘 있으면 하나를 바치겠습니까?” 농부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만약 만 불이 생기면 5천불을 헌금하겠는지 물었습니다. 농부는 다시 “그런 많은 돈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긴다면 당연히 5천불은 드려야지요.”라고 순순히 동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가 “그럼 돼지가 두 마리 있으면 한 마리 바치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아니! 목사님 제가 돼지가 두 마리 뿐인 줄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발했습니다.
이 예화가 단순히 목사가 헌금을 많이 하라고 독려했지만 신자가 아까워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쉽게 믿음의 결단을 하지만 정작 실제 행동으로는 옮기기는 어렵다는, 아니 오히려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말로 헌금을 약속하는 것은 아직 소유하지 않은, 즉 실현되지 않은 장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약속을 하지 못할 신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수십억짜리 로토에 걸린다면 누구나 그 중 십의 일 수억은 얼마든지 이웃을 위해 내놓을 수 있으리라 자신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로토는 실현되지 않은 미래인 반면에 현재 자기 수중에 소유하고 있는 것은 여간해선 구제든, 헌금이든 내놓지 못합니다. 돼지 두 마리 중에 한 마리가 비록 50%일지라도 로토 상금의 10%인 수억에 비하면 정말 코끼리에 비스킷인데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당신의 길을 따르려고 할 때에 요구하고 시험하는 가장 보편적 방법이 바로 현재 수중의 것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장래의 것으로 바치라고는 절대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바칠 것이 없을 때는 나중에 생기면 후하게 드리리라고 쉽게 생각하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을 때뿐만 아니라 큰 은혜를 받고도 정작 헌금함 앞에 나오면 그 배포(?)는 순식간에 너무나 초라하게 쪼그라듭니다.
마찬가지로 막상 하나님의 일이 눈앞에 닥치면 갑자기 믿음도 헌신도 결단도 줄어듭니다. 신자가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선 내가 가진 것을 크게 키우거나 멋지게 바꾸어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신자가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해선, 아니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방법과 때와 장소에서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바꿔 말해 바로 내가 현재 가진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 드려야, 실제로는 돌려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받은 것 중에 하나라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또 언제라도 그분이 앗아갈 수 있다는 철저한 확신이 없으면 절대 쉽게 내어 놓지 못합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진짜로 신자가 받아야 할 것은 현실적 소유가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하는 기회와 소망과 능력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 하늘의 신령한 보배를 받아서 자기 주위부터 그분의 사랑의 공동체로 바꿔나가는 일을 하는 것이 신자 된 삶의 목표이자 전부여야 합니다. 믿음이 현실의 물질과 세상에서 통하는 권력과 명예를 치성과 열심을 바쳐서 받아내는 싸움이 절대 아닙니다.
또 신자가 움켜진 것을 버리지 않으면 그 손에 주님의 것으로 채울 수가 없기에 주님은 우리더러 가진 것을 바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진 것이 필요하거나 아쉬워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없으면 당신의 일을 못해서는 더더욱 아닙디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을 놓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 아쉬운 것은 오직 참 믿음을 가진 신자가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하는 바로 그 믿음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바친 소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자의 헌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현재 수중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라야만 당신만 바라보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고 싶으면 내가 가진 복을 내버려야만 합니다. 내 것을 내가 쥐고서 내가 지키고 있겠다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것이 그분의 방식으로 채워질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신자가 연보할 때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작정한 액수를 반드시 채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 자기 수중에 있는 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인가 자기 노력으로 성취한 것인지 확실히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필수적인 생활 경비나 하나님이 누리라고 주시는 축복까지 전부 되돌려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와 인생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지 확정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면서 그분이 시키는 일만 하는지 자기 욕심으로 세운 목표를 추구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만약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또 자기 인생을 통해 그분의 영광만 드러내겠다고 소원하는 자는 얼마든지 후히 낼 수 있습니다. 후히 내지 못하면 속에 개인적 미련과 욕심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 가장 필요 없는 것, 그래서 아무리 많이 바쳐도 받지 않은 것은 “인색함이나 억지”가 수반된 드림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색함과 억지는 현재 수중에 있는 것이 자기 것이라는 착각이 드는 순간 어떤 신자에게라도 그 즉시 들어붙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눈앞에 있는)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며, (바로 곁에 있는) 적은 소자에게 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것으로 바치려고 하지 말고 지금 바로 갖고 있는 것으로 바치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큰일을 하려거나 먼 이웃을 크게 도우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현재는 헌신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고 믿음이 부족하다는 표식이자, 나아가 그것을 감추려는 위선일 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 속이려 드는 죄입니다.
신자의 현재 손에 있는 것을 버려야 하나님은 장래에 더 많은 것으로 채워줍니다. 그런데 그때 가서 다시 그 채워진 많은 것을 버려야 하나님은 또 다시 그보다 더 많은 것으로 채워줍니다. 자신을 버림과 하나님께 드림은 항상 동시에 똑 같은 질과 양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벌써 억지와 인색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직하고도 기꺼운 비움과 드림은 하나님의 더 큰 채워주심과 신자의 더 큰 버림을 필연적으로 유발합니다. 또 그것이 연속해 일어날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며 신자가 속한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도 그분의 신령하고 거룩한 나라로 변하는 법입니다.
1/15/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