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감찰하시는가?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창16:7-10)
아브람은 후손을 하늘의 뭇별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다 못해 여종 하갈에게 잉태시켰습니다. 아내 사래가 늙어 더 이상 출산이 불가능함을 알기에 하갈을 첩으로 들여서라도 아이를 갖자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잉태함을 알게 된 하갈은 본부인이자 자신의 여주인인 사래를 오히려 멸시하려 들었고 사래는 당연히 그녀를 학대하게 되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광야 길로 도망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갈의 자손 또한 크게 번성케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었고 그 약속을 받은 하갈은 자기를 “감찰(鑑察)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또 그녀에게서 날 아이의 이름을 사래에게 핍박을 받는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음”이라는 뜻으로 ‘이스마엘’이라고 붙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모든 인간의 고통을 하늘에서 살피시고 그 원통함을 대신 풀어주시는 무한히 선하신 분으로만 해석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 해석이 틀리지 않습니다. 하갈이 잉태하자 도리어 주인을 멸시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사태의 근본 원인은 가만히 있는 자기를 여주인 사래가 첩으로 들어가게 명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견디다 못해 도망가야 할 정도로 하갈을 학대했다면 태어날 자식을 위해야 할 사래 또한 잘못한 것입니다.
집안에서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이방인 여종으로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마저 본부인 편을 드니까 태어날 자식의 앞날도 순탄치 못하리라 짐작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도망가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큰 슬픔에 잠겼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런 보잘것없는 여종의 눈물까지 보고 계셨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던진 첫 마디를 주시해야 합니다.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이 그녀의 출발지와 행선지를 몰라서 확인하려 물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녀가 사래를 피해 도망간다고 대답했음에도 하나님은 그녀의 의도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아니 그것과 완전히 대치되는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씀한 뜻을 새겨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진정으로 그녀의 고통을 들어주려 했다면 도망간 죄까지 합쳐서 앞으로 더 많은 학대를 받을 것이 빤한 사래 곁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갈더러 이전에 있었던 곳과 앞으로 갈 곳에 대해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바꿔 말해 지금 네가 가고자 하는 곳은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상기시킨 것입니다.
하갈은 도망가길 원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학대받으라고 했습니다. 하갈의 뜻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고 고통만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감찰한 실제 대상은 누구입니까? 하갈이 아니라 사래였습니다. 그렇다고 사래에게 자기가 부리던 몸종에게서 멸시 받은 것에 대한 더 앙갚음할 기회를 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의 믿음을 연단시킬 도구로 하갈을 동원했던 것입니다. 그들더러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라는 당신의 약속이 성실하게 이뤄지는 것을 눈으로 확실히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지 못하고 세상 관습에 편승하여 인간의 힘으로 그분의 일을 이루려 한 것이 얼마나 큰 불신앙이며 그 결과 또한 얼마나 큰지 실제로 체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한 집안에서 정실부인과 첩 또 그 사이에서 난 아이들 사이에 발생하는 온갖 시샘 다툼 등을 겪으며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선악과 금령(禁令)을 어기는 죄를 범하자 두렵고 부끄러워졌습니다.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숲에 숨어버렸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숨바꼭질 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정작 있어야 할 곳, 하나님의 품 안을 벗어났기에 그 사실을 엄중하게 상기시키고 회개케 하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하갈의 경우도 자신이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서 벗어난 잘못을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비록 그녀가 하나님의 사자를 직접 대면했고 또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말씀까지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이스마엘이 탄생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 둘 중 누구와도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스마엘의 후손에 대해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어서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칠 것이라는 예언은 축복은커녕 오히려 저주였지 않습니까?
이처럼 불신자들도 때로는 신령한 영적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구원으로 이끄는 길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 불신자와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신자를 감찰하셔서 그 신자를 향한 영원한 계획과 뜻을 이루는 과정 중에 일어난 간섭일 뿐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하늘에서 모든 인간을 감찰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당신의 자녀를 돌보아 거룩하게 세우려고 그러십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들을 미워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인류는 자신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보편적인 사랑 가운데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신자에게만 내리고 그들에게 내리지 않을 만큼 편협한 분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에게 베푸는 사랑은 오직 신자를 향한 영원한 경륜 안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자에게 무조건 일방적인 특혜를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하갈을 사래에게 돌려보냄으로써 오히려 갈등과 다툼이 더 조장되었고 그 여파는 아직도 아랍과 유대민족의 불화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를 온전한 믿음의 아비와 어미로 세우기 위해서 이방인 여종 하갈의 일거수일투족 아니 그 심령 깊숙한 곳까지 다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아브람을 복의 근원을 삼아 그를 통해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려는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뿐입니다.
역사의 주관자은 하나님이지만 그 주인공은 신자입니다. 세상의 학자 세도가 정치가 영웅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조연배우 아니 엑스트라로 쓰임 받는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펼쳐 놓은 인류 역사라는 무대의 주연은 항상 거룩하고 신실한 신자, 그것도 단 한명이었습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감찰을 받고 있는 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까? 그 감찰의 목적이 신자의 먹고 마실 것을 채워주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공중의 새나 들풀도 그분의 감찰을 받아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여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지 그분의 감찰을 받고 있는 자입니다. 그것도 침 삼키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머리카락까지 세인바 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의 어떤 측면이 지금 그분의 감찰을 받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그분의 감찰이 전혀 안중에 없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부분만 감찰 받으려 들지는 않습니까?
1/29/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