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 최고의 불가사의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어느 형제에게 아주 고가의 선물을 주려고 하자 너무 과분해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황제는 “내가 주기에는 절대 과분하지 않네.”라고 설득했습니다. 비록 받는 사람의 입장에선 너무나 황송하게 여겨질지라도 전 세계를 지배하던 황제로선 마음먹기에 따라 그보다 훨씬 더 귀한 것도 얼마든지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도 그러할진대 천하 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에게 과분한 일이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특별히 인간이 아무리 흉악한 죄를 범해도 용서해주시길 그분께서 더 간절히 원하십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인간뿐 아니라 육축까지도 아끼는 것은 그 모두를 지으신 당신께는 너무나 합당한 일입니다.(욘4:11)
그렇다고 인간이 어떤 죄를 지어도 그분이 그저 한없이 좋아하신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결단코 예쁘게 봐주지 않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음으로 내몰 만큼 죄 자체는 엄청나게 저주하십니다. 반면에 인간이 죄의 더러움과 추함에 묶여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선 그분 또한 굉장히 마음 아파하십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에게 죄의 삯으로 지어진 죽음은 그분께서 인간에게 바랐던 상황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상황을 바로 잡으려 골고다에 십자가가 섰습니다. 그 전과 후로 인류에게 미친 결과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소망이라고는 한 치도 발견 못할 완전한 흑암 속에 있던 인류가 죽음마저 전혀 장애가 될 수 없는 완전한 빛 가운데로 옮겨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로 흑암과 빛을 가르는 휘장 가운데로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아 누구든지 그분의 피를 힘입으면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얻을 담력을 얻게 됩니다.(히10:19,20)
비유컨대 로마가 야만족과 전쟁을 치르면서 얼마든지 무력으로 당장 항복시킬 수 있는데도, 로마 황제는 그들이 제국과 화해하여 로마시민으로 모든 혜택을 누리길 너무나 원해서 그 소원을 보장하기 위해 직접 자결한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로마와 화해하지 않는 완악한 이방족속에게 기다리는 것은 가혹한 심판뿐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사망과 생명의 분기점이 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자 필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진리를 들어도 여전히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선뜻 모시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 사건을 직접 목도하고도 그분을 거부 배척한 자가 그러지 않은 자보다 엄청나게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천국과 지옥에 대해 이야기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눅16:31) 분명한 진리를 듣고 알아도 결국에는 믿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고린도 교회더러 헌금을 자원하여 많이 하도록 권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가 넉넉히 넘친다고 말한 것이 죄에서의 구원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렇게 과분할 정도로 수식한 것은 분명 그의 개인적 체험에 기인한 것입니다. 도저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헌금을 비롯해 그의 삶에서 그 넉넉한 은혜가 작용되지 않는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바울만큼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완강하게 거부한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려 길길이 날뛰었던 자입니다. 유대대공회로부터 살인 면허를 받아 외국에까지 좇아가서 그렇게 했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야만족 한 사람을 로마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죽었다는 것은, 말하자면 황제의 시민권과 그 야만인의 옛 신분과 맞바꾸었다는 것은 너무나 어불성설이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도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 이미 듣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선행으로 자기 죄를 갚아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야 아무 한 일도 없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전혀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과 자신의 죄와 연결 지을 고리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헬라인이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에게야말로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지혜로도 모자랐고 하나님의 표적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 현자, 도덕군자, 종교선생이었던 바울에게도 예수는 오직 미련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이해가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미련한 도를 따르는 무식한 자, 어리석은 자, 죄인, 초신자들은 자신과 달리 어떤 현실적 어려움에 처해도 평강과 자유함이 넘쳤고 심지어 어떤 핍박에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 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사는 삶에 비추어 보면 자신의 학식, 교양, 지혜, 도덕성, 영성은 정말 휴지 조각에도 못 미칠 정도로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미련한 것인지 자기가 어리석은 것인지 분간이 안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살기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한 이유가 바로 이 불가사의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가 끝까지 몰랐던 사실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자(고전1:18)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라는 단순한 원리였습니다. 인간은 자력으로는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구원해주어야만 합니다. 바울이 오히려 살인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십자가의 도를 자력으로 이해하려 해보았지만 실패했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려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분의 권능으로 사흘 동안 눈이 멀었다가, 즉 자기 힘으로는 단 하나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가 그분의 자비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철저하게 거부, 반발, 저주했던 바로 그 예수를 직접 만났고 또 그와 동일한 죽음과 부활의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거나 봉사로 평생을 보내게 할 수도 있었지만 다시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로선 적국의 시민 한 사람을 로마 시민으로 만들려고 로마 황제가 스스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 그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이 이해는 안 되었을지라도 비로소 믿어졌던 것입니다. 자신의 이성적, 도덕적, 종교적 통찰력을 훨씬 초과하는, 아니 그와 전혀 다른 영역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를 직접 만나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아야, 그래서 자신이 알고 이해하는 모든 것들이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으로 넉넉하게 넘치게 됩니다. 다른 말로 바울처럼 필연적으로 그리스도 영광의 빛만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나기를 기꺼이 소원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헌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복음의 진리를 알고 난 후에 믿기로 결심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먼저 예수가 믿어진 후 십자가의 도를 알게 된 것입니까? 바꿔 말해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이성적, 도덕적, 종교적 실력만 더 갖추려 갈고 닦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매순간마다 누리며 자신의 모든 삶이 그 은혜로만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1/28/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