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한 은혜를 묵상하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바울 사도는 디도와 두 형제를 고린도 교회에 자기보다 앞서 보내어(5절) 연보를 미리 준비토록 했습니다. 또 심는 대로 거둔다는 비유(6절)를 통해 자발적이고도 후한 연보를 하도록 권면했습니다. 심지어 그 전에 마게도냐 교회들이 환난과 가난 가운데도 얼마나 힘에 넘치는 연보를 했는지 예를 들기도(8:1-5) 했습니다.
이제 그런 연보를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수식어들을 살펴보면 대단합니다. ‘모든’이란 단어가 네 번, ‘넘치게’가 두 번, ‘넉넉하게’ ‘항상’ ‘능히’가 각기 한 번씩 동원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엄청난 복을 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너무 심한 것 같지 않습니까? 부흥강사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보상을 과장하며 헌금을 독려하는 상투적 수법과 닮은 것 같으니 말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이 넉넉히 채워주시는 은혜를 강조한 것은 분명하지만 부흥강사와 확실하게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모든 일에 넉넉히 넘치도록 모든” 은혜를 채워주시는 이유가 완전히 다릅니다. 바울의 경우는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입니다. 성도더러 착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성도가 받은 은혜로 착한 일에 사용하지 않으면 채워주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부흥강사는 하나님께 많이 드리면 성도 개인의 현실적 필요를 넘치도록 채워준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성도의 개인적 필요를 채워주지 않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우리에 있어야 할 줄을 미리 아십니다.(마6:32) 따라서 신자는 구태여 그런 것들을 구하지 않아도 되거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한 후에 구해도 됩니다. 본문으로 치면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고” 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하나님 은혜를 말하며 ‘모든’, ‘넘치게’, ‘넉넉하게’ 등의 단어로 너무 과장한 것 같은 느낌은 여전히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간절하게 오랫동안 간구해도 그런 은혜를 별로 받은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바울이 우리보다 믿음이 월등한 위대한 사도라서 우리 수십 배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기실 허풍으로 한 말입니까? 그 둘 다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 은혜의 심오한 차원을 너무나 절감했기 때문에 실제로 느낀 그대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링컨 대통령의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의 큰 형 에드윈 부스는 유명한 배우였습니다. 그 형이 어느 날 기차역 플랫폼에 있다가 선로로 떨어지려는 한 남자를 붙들어 건져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알고 보니 링컨대통령의 아들로 남북전쟁에 군인으로 참전 중이었던 로버트였습니다. 동생은 아버지를 암살했지만 형은 그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었습니다.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신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계획하시어 진행하든 인간의 의지에 맡겨 두어 묵인을 하던 범사가 결국은 그분의 절대적 주권 하에 있습니다. 자기 동생이 곧 대통령을 죽이게 될 줄 형은 전혀 몰랐지만 하나님은 분명 아셨을 것이란 점에서 이 일의 배후에도 그분이 계셨다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예화가 뜻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한 간섭에 주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 능히 못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면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을 모든 일에서 넘치도록 항상 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신령한 일이나 기적은 인간이 소망한다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계획과 일정과 방법에 따라 하나님이 일으킵니다. 신자가 초자연적 특성에만 심취해선 은혜를 주시는 목적에 눈이 멀기 마련입니다. 은혜의 질과 양만 넘치게 받겠다고 덤비면 착한 일을 넘치도록 하게 하려는 그분의 목적은 안중에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단순히 신자에게 주는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선한 일에 충성하면 알게 모르게 남들에게 커다란 유익과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도 그분의 은혜입니다. 심지어 예의 경우처럼 가까운 사람이 잘못한 것을 대신 사죄하고 보상하는 일마저도, 자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중에 아니 꿈도 꾸지 못하는 중에 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눈에 안 보이는 거룩과 의와 생명의 나라라는 전체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너무나 광대하신 하나님이라 그분의 은혜도 너무나 광대합니다. 시공간적으로 무한하며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바울이 강조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 실제 사실입니다. 그런 과장된 것 같은 표현조차 부족해도 한참 부족합니다.
특별히 선하고 의로운 일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십니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그분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이 전 우주를 선하고 의롭게 되는 한 가지 목적으로만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재 서있는 위치와 맡고 있는 직분에서 눈에 보이는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정말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하는 것뿐입니다. 사랑을 베푼 신자에게는 작은 일일지라도 그 사랑을 받은 자에게는 아주 큰 일 내지 결정적인 일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신자도 작은 일에 충성하며 적은 자를 잘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도덕적 양심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에 의존해 할 뿐입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비해져서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오직 그분의 의와 영광이 드러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아니 참 은혜를 받고 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신자가 잘나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갖는 광대한 권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오한 은혜가 어떻게 진행되고 결말지어질지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예컨대 바울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항상, 넘치도록, 넉넉히라는 막연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때로는 지초지종을 알게 해주시는데 신자로 은혜를 풍성히 실감하여 오직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뜻입니다.
신자의 믿음과 선행을 하나님이 보상해 주는 것만이 은혜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당신의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그분의 모든 행위가 바로 은혜입니다. 신자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헌신하겠다고 간절히 기도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착한 일이 일어나고 또 참여토록 해주십니다. 즉, 신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는 일은 다 그분의 큰일이 될 뿐 아니라 바로 그것이 그분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신자는 너무나 광대하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너무나 광대하게 인정해 깊이 알아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분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은혜를 공간적으로는 전 우주적 차원에서, 시간적으로는 태초의 과거부터 영원의 미래까지 연결하여 묵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으로도 확대하여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가꿔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성으로 기대하고 예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광대한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당연히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그분의 영원한 차원에 이미 참예하여 자기도 영원하고 광대한 존재가 이미 되어 있음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아니 날마다 순간마다 실제로 체험해야 합니다.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지금 눈앞의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단 그분에 대한 경외감에 충만해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의 은혜임을 절감하면서 매사를 대해야 합니다. 지금 혹시 그분의 은혜를 너무 축소해 이해하지는 않습니까? 또 오늘 새벽에도 내가 정해 놓은 쥐꼬리 만한 은혜를 못 받아 안달복달하지는 않았습니까?
1/18/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