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로 창씨개명을 했는가?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17:5)
베드로 사도는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0,21)고 성경을 성령의 조명에 의거해 해석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해석한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혜안이 열려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같은 신비로운 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단순히 객관적 교리로만 인정하지 말고 하나님이 지금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신 주관적 진리로 받아들여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자기 삶에 적용해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리 깊은 뜻을 깨달아도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한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구약의 모든 기록도 먼 옛날 이스라엘에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수천 년 전의 사람인 아브람에게 이름을 바꾸라고 명한 본문도 사실은 나에게 지금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형성된 기독교 신앙을 내가 가지게 된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할 때는 반드시 그 보다 낫거나 최소한 동일한 수준의 믿음을 가진 후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가문은 끊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현재의 유대인들을 두고 그의 육신적 후손일지언정 믿음의 후손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결국 모든 신자에게 하나님은 ‘고귀한 아비’(아브람)로만 그 인생을 마치지 말고 ‘열국의 아비’(아브라함)까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 셈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대로 세계 모든 인종을 복음화할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오지로 떠나야 합니까? 다시 말하지만 성경을 너무 거창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해외선교사명은 특별히 부르신 자에게 해당되지 모든 신자가 자기 생업을 두고 다 나라를 떠나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자더러 이름을 바꾸라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부쳐 주신 이름이 있어야, 즉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나서 팔일 만에 하나님의 언약에 그 아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며 할례를 거행하면서 동일한 맥락으로 아이의 이름도 지어줍니다. 그러나 그 언약이 오직 자기 민족이 가장 창대케 된다는 의미일 뿐으로 정작 성경의 계시와는 다릅니다.
아브람은 나이 99세에 하나님께 새 이름을 받으면서 할례를 함께 거행하라는 명령도 받았습니다. 그럼 오늘날의 신자도 예수를 믿으면 바로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정해야 합니까? 세례와 세례명은 어디까지나 내용을 담아내는 형식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나이나 혈통에 상관없이 어떤 믿음의 내용을 가져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고귀한 아비에서 열국의 아비가 되어야 히는 것은 한 마디로 자신과 가족만의 안위와 형통을 추구하는 이기적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섬기는 이타적인 인생으로 바뀌라는 것입니다. 신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비춰져야 합니다. 또 신자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그리스도 사랑으로만 서로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그 일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 나가다보면 동심원처럼 자꾸 퍼져 나가서 열국에까지 주님의 사랑이 증거 되고 실현되어집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모든 신자가 다 열국의 아비가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라고, 즉 열국의 아비라고 감히 자신할 수 있습니까? 다른 말로 이웃들에게 언제 무슨 일에서든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웃으로 통하고 있습니까?
2/13/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