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목사에 속는 신자도 책임이 크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5)
유독 기독교에만 이단이 많아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등 비난 받거나 나아가 신자들이 그로 인해 주눅들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도 이미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했듯이 그 일군들도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원래 완전한 진리에는 가짜가 당연히 많이 생기지만 가짜를 흉내 내는 가짜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가짜는 아무리 해도 진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 사도의 결국도 그 행위대로 된다고, 즉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성경은 신자들이 거짓 사도에 넘어가는 것마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크게 야단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이 여기노라.”(갈1:6)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말하자면 위장술이 아주 뛰어난 사단의 흉계를 신자가 쉽게 알아챌 수 없으므로 혹여 속아 넘어간다고 해서 큰 잘못이 아니라고 핑계 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거짓 일군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아주 명확하게 이미 제시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해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는 신자는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신자는 참 신자라고 할 수조차 없지 않습니까?
또 신자가 핑계 댈 수 없는 더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거짓은 결국 거짓으로서 진리의 반대일 뿐입니다. 진리에서 조금 부족한 것과 진리를 흉내 내거나 위장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열 개의 진리 중 대여섯 개라도 제대로만 전하면, 숨겨진 의도를 갖고 고의로 빠트리지 않는 한, 거짓 사도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열 개 스무 개를 전해도 그럴싸하게 위장된 것이라면 누가 뭐래도 거짓 사도입니다.
예컨대 성경대로만 전하되 그 표현과 논리에서 뒤져 성도의 흥미와 관심을 못 끄는 목사는 고리타분하다고 외면당하기 쉽습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거나 왜곡한 내용이라도 성경적 용어나 표현을 화려하게 구사해 전하면 영성이 뛰어난 목사로 존경 받고 신자들이 몰립니다. 분명 후자가 거짓 사도임에도 신자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런 신자들 또한 그 행위대로 되는 거짓 목사와 동일한 결국을 맞지는 않을까요?
본문의 앞부분에서 바울 사도도 참 사도와 확실히 반대되는 거짓 사도의 행태에 관해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1-12절) 구태여 부연설명하지 않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만 읽어도 무슨 뜻인지 쉽게 분별될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에 대한 설명과 함께 바울이 변호한 참 사도의 모습도 그 내용을 정 반대로 바꾸어 성경 표현 그대로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성도를 위하여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자신의 열심으로 자신을 위해 열심을 낸다는 뜻임을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성도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지 않습니다.(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원주의적 상대적 하나님으로 인도하거나 심지어 담임 목사인 자신에게 혼인시키려 듭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되기 쉽게 만듭니다.(십자가 의로 죄에서 구속보다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세상 성공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취득하려는 교인을 만듭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려 합니다. 말에는 졸하나 예수를 아는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한 사도와는 달리 지식에는 졸하더라도 말에만 풍부하려 합니다. 그리고 풍부한 지식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나타내는(실제 삶에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도와는 달리 부족한 지식을 말로만 그럴듯하게 때우려 듭니다. 성도를 높이려고 자신을 낮추어 복음을 값없이 전하지 않고, 지극히 큰 사도인 것처럼 자신을 높여서 성도를 강요하여 복음을(사실은 거짓 복음이지만) 돈과 교환하려 듭니다.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아도 오직 성도를 섬기기 위한 목적의 사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일이라는 핑계로 모든 가능한 사람들에게서 헌금을 받으며 나아가 사리사욕을 충당하는데 사용합니다. 아무에게도 절대 누를 끼치려 하지 않기에 오히려 성도가 자원해서 사도를 도와주는 것에 반해 성도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은 목사의 당연한 권리이자 성도의 축복이 된다고까지 가르칩니다. 바울의 이 고백에 귀 기울이는 목사가 너무나 드물어졌습니다.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그리스도의 진리가 속에 없기에 사람 앞에서 사람의 일로만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아실만큼 성도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를 자신의 안락과 이름을 날리는 기회로 이용하려 듭니다. 자신의 사역의 목표와 동기에 주님을 향한 일관성이 없고 또 확고한 복음전파의 소명이 결여되어 있기에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말과 행동이 수시로 변합니다. 한 마디로 목사 자신의 인간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간계로 사람을 미혹시킵니다.
이래도 거짓 사도와 참 사도의 분별을 하지 못하겠다면 감히 성도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너무 위장술이 뛰어나 성경 지식이 아직은 부족한 성도가 본의 아니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어차피 그런 사도 밑에 있다 보면 성경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거나 다르게 배우게 되니까 성도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1,2)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성도들 눈 앞에 밝히 보이게 하지” 않는다면 성도를 꾀는 것이 됩니다. 바울이 참 성도인지 아닌지 다만 하나로 분별하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율법의 행위로 죄 사함을 받았는지 아니면 오직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만 믿음으로 의지했는지의 기준으로 말입니다. 요컨대 십자가 외에 또 다른 공적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도리어 종교적 행사나 일을 시키려 들고, 그것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핑계로 돈을 자꾸 요구한다면,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미혹된 영혼을 십자가 보혈로 구원하여 하나님 안에서 성결하게 자라게 하며 그리스도의 의의 일군으로 변화시키는 일만 하는 곳입니다. 한 영혼을 살려내는 일로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다고 그 일을 못하거나 모자라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죄인을 구속하려면 돈 없이 하셔야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현실적 재정필요마저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도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영혼 구원과 종교적 행사 중에서 과연 무엇을 우선하며, 또 헌금을 요구하는 분명한 목적이 무엇이며, 나아가 헌금을 거두는 방식 또한 성경적인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꿔 말해 교회의 모든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성도들의 눈앞에 밝히 보이게 하고 있지 않으면 분명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간단한 예로 교인의 현실적 성공을 위해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동원된다면 무조건 광명의 천사가 위장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데도 아주 큰 열심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2/14/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