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할 유일한 자랑거리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후11:30,12:1)
바울 사도는 여태껏 고린도 교회 안의 거짓 사도들의 잘못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도 자기 자랑은 하지 않았습니다. 언뜻 자랑 같이 보이는 것도 자신과 대비하여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놓고 자랑할 것이 자신에게도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자기의 연약함과 주께 받은 환상과 계시였습니다.
바울이 자랑하여 성경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면 모든 목회자가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목사는 자기의 강함과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자랑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이상하게도 생소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주위에서 보고 듣는 많은 목회자들의 자랑이 바울의 자랑과 너무 대비되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그런데 왜 두 가지 자랑 모두 “부득불 자랑한다”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괜히 쑥스럽고 교만해 보일까봐 정말 하기 싫지만 억지로 한다는 의미인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자랑이라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참 사도라면 이 두 가지만은 반드시 자랑해야 하는데, 뒤집으면 이 둘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의 직무가 바로 이 두 가지를 자랑하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는 자랑이라면 성령이 시켜서 하는 자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인간적 자랑은 아무리 선의에 바탕을 두었거나 부득이한 필요에 의해서 하더라도 자칫 교만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 겸손하게 자랑해 남들이 교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랑한 당사자의 마음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부심이 파고듭니다. 남과 비교하여 어떤 형태로든 우월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랑이란 자기의 강함을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지 약함을 자랑하는 법은 없습니다. 세상은 오직 강함만 동경하여 추구하는 곳이기에 약함이 자랑으로 들어설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자기 약함을 자랑하는 것은 동정을 유발할 목적이거나 아니면 겸손을 가장한 위선이라고 비난만 받을 뿐입니다. 예컨대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는 가지 않겠다는 것은 사실 자신의 도덕적 고결함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은 추한 죄인으로 매도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 세상에선 겸손마저 교만으로 받아 들일만큼 자기를 낮추는 자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 모두, 즉 모든 인간이 부패되어 있습니다. 다 같이 타락한 인간끼리 인간 스스로 비교 판단하여 등급을 매길 수는 결코 없습니다. 세상에서 통하는 인간적 자랑은 항상 교만을 등에 업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랑은 하나님 안에선 아주 큰 교만이자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더러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또 약함이 자랑이 되는 곳은 오직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강권함으로 부득불하는 자랑이라야 자신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어떠한 인간적 종교적 도덕적 과장이나 가장을 한 치도 포함시키지 않고,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남들과는 전혀 비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드러내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다는 것입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을 핍박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위협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해 그는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다메섹에선 아주 치사하지만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약함이 전혀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아주 떳떳한 자랑거리가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자기 구원의 방패요 산성이 됨을 확신하고 또 실제 매사에 그렇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이 자랑하는 자신의 약함 중에는 단순히 인간적 현실적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일뿐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라고 영적인 가난함을 더 많이 자랑했습니다. 다른 말로 목사는 반드시 자신이야말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해야 한다는, 아니 그 고백이 성도들 앞에 항상 내세우는 자랑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보혈로 자신의 죄를 씻음과 성령 안에서 자신의 영적 무지에 대한 깨우침은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적 겸손처럼 절대로 교만한 자랑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부득불 하는 자랑입니다. 나아가 일단 고백한 그 자랑이 진짜 자랑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와 환상이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분과 끊임없이 씨름하여 받아낸 그분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실패와 성공이 교차하는 실제 삶의 세밀한 여정 가운데 거룩하신 그분과 동행했던 체험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부득불 자랑한다는 내용은 거짓 사도들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11:18) 것과 대비해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들은 오직 인간의 갈채와 칭찬을 바라며 광명한 천사로, 의의 일군으로 가장합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들은 성도들을 “종으로 삼아 잡아먹거나 사로잡기 위해 스스로 자고하는”(11:20) 자들이었습니다. 또 스스로 자고하기 위해 세상에서 통하는 가문, 문벌, 학식, 권력, 명예 등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끌어 모았습니다.
바울도 육체를 따라 자랑하려면 그들에게 꿀릴 것은 하나 없이 더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랑은 하나님 안에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교만이자 큰 죄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강한 자들은 하나님의 강함을 구태여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하나님께 직접 받은 계시와 환상이 드물 수밖에 없고 자신의 인간적 철학과 사상을 자랑하게 됩니다. 아니 스스로 본인의 철학과 사상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기에 구태여 하나님의 계시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목사가 오로지 자랑할 것은 바울처럼 육체적 우월성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약함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강함과 하나님의 강함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도 아닙니다. 신자더러 그 동안 세상에서 득을 봤으니 이제 예수 믿었으니 그분처럼 고난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서 육체적 자랑과 십자가 복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임을 증거케 하려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에 바탕을 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대로 전하는 사도는 어떤 현실적 고난을 겪더라도 당신의 주권적 인도를 받기에 그분의 복음을 더 생생하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도 또한 하나님이 동행하여 지켜주시고 갈수록 복음의 열정에 더 사로잡히게 해줍니다. 무엇보다도 그 전하는 자의 삶을 통해 세상에서 자랑하는 기준들이 하나도 자랑이 아니 되게끔 해서, 아니 쓰레기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방법으로 복음을 증거케 만듭니다.
요컨대 목사 자신은 한 없이 낮아지되 그리스도 그분은 한 없이 높아지게 하는 일만이 목사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작금 목사들이 문벌, 학식, 권력, 명예를 어떻게든 끌어 모아 자랑하려고 하니 도대체 어찌 된 연유입니까?
2/28/2008
하지만, 아주 많은 목사님들은 전혀 엉뚱한 것들을 환상이라고 내세우는 바람에 영 헷갈립니다.
그게 무슨 자랑이 될 것이며 입 밖에 낼 가치라도 있는 것들인지.......
목사님께서 정리해 주신 대로, [환상=삶의 체험]이 증명되지 않으면 결코 환상일 수 없을 것입니다.
계시와 환상에 관한 바른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