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여정의 종착지(1)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진짜로 이삭을 찔러 죽이려는 바로 그 순간에 제지했습니다. 자신이 명한 믿음의 시험을 그가 온전히 통과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외아들을 아끼지 않고 드렸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큰 상급이 따라와야 함에도 한 마디 칭찬과 그가 처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주신 약속만 다시 다짐받았을 뿐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그가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도록 하나님과 교제 동행한 결과가 기껏 립 서비스와 아직도 이뤄지지 않은 약속뿐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모든 신자가 자기 머릿속에서 초고성능 강력 집게를 동원해서라도 가장 시급하게 뽑아내어야 할 신앙상의 오류가 하나 있습니다. 불신자시절부터 알게 모르게 형성된 정말로 뿌리 깊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입니다. 그 뿌리는 너무 깊이 박힌 데다 번식력도 아주 강해서 뽑고 또 뽑아도 다시 생깁니다.
바로 인간이 하나님께 뭔가를 바치면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보답해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입니다. 또 그 반대로 하나님께 받았으면 반드시 그 보답으로 뭔가 그분을 위해 해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입니다. 한 마디로 서로 주고받는(give and take)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것, 그것도 사전에 약정한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거래(deal)입니다. 또 거래는 두 당사자의 상호 유익 도모를 목표로 삼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입니다.
때로는 신앙이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이 되긴 하지만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자와 하나님이 항상 주고받긴 하되 그 교환되는 내용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 내지 추측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선 신자는 자기가 좋은 것으로 바쳤으니까 하나님으로부터도 당연히 좋은 것을 받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시험, 환난, 핍박, 심지어 순교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반대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당장 벌이 따를지 몰라 불안해 하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고 심지어 더 좋은 일마저 생기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은 엿장수 마음대로처럼 오직 그분의 주권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1)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인간을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으로 나눈다고 하니까 모든 신자가 이왕이면 귀히 쓸 그릇이 되고 싶어 합니다. 즉 관심의 초점이 ‘귀히’ 혹은 ‘천히’에만 가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그릇에 무늬, 색깔, 리본, 받침 등을 붙여서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주기만 기대합니다.
그릇을 귀하고 천한 것으로 표현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독자가 이해하기 편하도록 동원된 수사학적 대조 기법일 뿐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하나님이 그릇 자체를 만드는(바꿔나가는) 데 있지 기존 그릇에다 장식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릇은 쓰이는 용도에 따라 종류가 달라질 뿐이며 그 용도는 당연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 귀하고 천하게 구분될 수는 절대 없습니다. 당신께서 인간과 세상을 섭리하는 모든 일은 다 귀합니다.
손님 접대 만찬용의 본차이나와 식구들끼리 된장찌개를 담아 먹는 뚝배기는 그릇 자체가 다릅니다. 시커멓고 투박한 뚝배기에 아무리 화려하게 붉은 장미를 그려 넣어본들 오히려 모양만 더 어색해지며 또 구수한 맛도 달아날 것입니다. 그 둘 중에 어느 그릇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따질 수는 결코 없습니다. 뚝배기는 뚝배기로 본차이나는 본차이나로 각기 그 역할만 다를 뿐입니다. 그 역할도, 즉 손님을 정성껏 접대하는 것과 가족끼리 나누는 정겨운 저녁식사 중에 어느 것이 더 귀하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개별 신자의 전 인격체 자체를 당신이 원하는 모습까지 빚어나가실 따름입니다. 한 인간의 존재 전부를 바꾸는 것이지 그 사람에게 장식을 덧붙여서 겉모양만 결코 바꾸시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자기 주위에 붙어 있는 장식을 바꿔주기만 요구하거나, 그렇게 해주면 자기도 바뀔 것이라고 착각 내지 고집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자에게 붙은 장식을 바꾸시는 분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장식을 당신께서 이미 정해 놓은 역할에 따라 바꾸지 장식을 바꾸어 놓고 역할을 바꾸는 법은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기분 내키는 대로 만들다 접시 모양으로 나왔으니까 장미를 그려 넣고 만찬용으로 쓰라고 할 리는 절대 없지 않습니까? 나아가 가마에 들어가는 흙이 미리부터 토기장이에게 나를 본차이나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법은 더더욱 없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귀하고 천한 그릇이란 어디까지나 수사학적 표현일 뿐입니다. 다시 강조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신자마다 현실적인 형통과 고난으로 달라지지 않는가라고 끝까지 미련을 포기하지 않거나 고집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맡긴 역할은 오직 당신을 경외하며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 하는 것뿐입니다.
신자가 각기 점하고 있는 시공간이 달라서 그 증거하는 겉모습만 다른 것이지 우리 눈에 귀하거나 천하게 보인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신자가 처한 시공간이 바뀐다고 해서 신자의 존재가 바뀌거나 맡은 역할이 더 귀하게 되는 법은 절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과 무슨 일을 만나도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길 원할 따름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과 무슨 일을 어떤 식으로 만나게 할지는 하나님이 정하실 따름입니다. 신자는 이미 바뀐 그릇으로 쓰임 받거나 혹은 그 자리에 적합한 그릇으로 바꿔지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말로 신자로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게 되는 것, 즉 용도에 맞는 그릇으로 바뀌어져가는 과정 내지 결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보상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며 교제하는 것이 축복이지 따로 현실적으로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본문 식으로 하자면 아브라함이 자기 독자라도 하나님께 아끼지 아니하고 바친 것 자체가 상급입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한 마디 칭찬과 함께 말입니다.
아직도 아무런 현실적 보상 없이 립 서비스 받은 것 같아 뭔가 아쉽다고 여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도달해야할 궁극적인 목표가 어디입니까? 그분을 위해서라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는 차원 아닙니까? 그 전부에는 당연히 자신의 전부가 포함되어 죽이든 살리든 당신의 뜻대로 따르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또 다른 보상을 기대합니까?
아들까지 바치는 믿음을 보였으니 하나님이 뭔가 크게 보상할 것이며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 만한 절정에 다다랐다면 세상에선, 아니 하나님이 더 주실 것은 없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 이상 귀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이라 해도 세상 보화 전부를 줄까 이삭을 줄까하고 물으면 당연히 이삭이라고 대답할 것 아닙니까? 이삭보다 귀한 것을 구태여 찾자면 하나님 바로 그분뿐입니다. 바로 여기가 신앙 여정의 종착지입니다. 오직 그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분과 거래할 생각만이라도 일절 버리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신자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는 신앙 말입니다.
토기가 토기로서 족하기에 그 역할을 다하는 것 이상 축복은 없습니다. 뚝배기가 화려한 찬장에 갇혀 있거나 본차이나에 된장을 담아 먹는 것만큼 그 그릇에 큰 실례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그렇게 해달라고 떼만 쓰고 있으니 또 목사들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니 이 얼마나 어리석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일입니까?
3/7/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