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2:7) 신자의 겸손은 전혀 달라야 한다.

조회 수 1033 추천 수 39 2008.03.03 20:5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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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겸손은 전혀 달라야 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7)



아주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도덕생활로 대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살면서 자신의 품성을 의롭게 바꾸는 데에 거의 대부분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물론 신앙을 갖기 전과 후는 분명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또 신자는 평생을 두고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원칙입니다.

신앙은 도덕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입니다. 신앙을 가짐으로써 무엇보다 가장 먼저 달라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인생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된 후에는 불신자 시절에 갖던 도덕에 대한 개념도 바뀌어야 합니다.

불신자는 자신의 의를 갈고 닦으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만 윤리를 지킵니다. 그것도 인간이 정해 놓은 기준에 의거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이웃들과 함께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공동체를 세우고 확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분이 기뻐하는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목적이야 어떻게 되었든 실제로 선하게 살아가는 결과는 같지 않는가라고 단순히 치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도덕이 실천되는 모습이 전혀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어떻게 선하게 살아야 할지 구체적으로 노력하는 내용 자체도 달라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좋은 예로 본문에서 말하는 자고하지 않는 것, 즉 겸손해지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겸손은 한 마디로 자기 잘난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최대한 예절을 지키며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있을 수 있지만, 내면적으로도 자만심을 죽이고 진정으로 낮아져야 참 겸손입니다. 그런데 자기 잘난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항상 다른 사람과의 비교입니다.

신자의 겸손은 이처럼 단순히 태도나 성품을 바꾸는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신자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항상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따라 결정되어져야 합니다. 불신자의 겸손은 자신과 남, 거짓 교사들은 바울과 자기들, 즉 인간끼리의 능력과 태도의 상호 비교에 따라 좌우되지만 신자의 겸손은 오로지 자기가 하나님의 면전에 어떤 믿음의 자세로 서야하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능력이 약해지는 반면 하나님의 온전한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신자의 모습은 온데 간데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만 자랑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모든 염려를 다 맡겨 버리는 것”(벧전5:6,7)입니다.  

바울의 예와 설명을 추적해 겸손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는지, 사실은 우리의 겸손과 얼마나 다른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우선 자기가 받은 환상과 계시의 내용이 지극히 커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그 구체적인 설명을 삼간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려고 오직 참 말만 해야 하겠는데 그래도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었습니다.  

우리 중에 혹시라도 기도 가운데 계시나 환상을 받으면 얼마나 크게 떠듭니까? 자기 훌륭한 신앙의 보증서나 훈장을 받은 양 합니다. 그것도 참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장과 가식을 양껏 보태서 말입니다. 은혜를 함께 나누며 하나님 앞에 같이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서야 하는데도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나 환상인지 자꾸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성도의 유익을 위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준 은사마저 마치 자신의 능력인양 자랑하는 자도 많습니다.

바울은 또 자신이 기도한 그대로 응답되지 않은 것을 겸손의 예로 들었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간절히,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장애가 되니까 없애달라는 아주 선한 의도로 간구했는데도 말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겸손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셈입니다. 바울의 능력이 약한 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 지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뒤집으면 바울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더 크게 잘해보려고 자신의 지병을 없애달라고 계속 매달린 것 자체가 자고하는 것, 즉 교만이었다고 깨우쳐 준 셈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자신의 여러 약한 것을 기뻐하고 또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되기 때문인데 바로 그것이 신자가 추구할 참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가 너무 강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지 너무 약해서 그렇게 되는 법은 절대 없다고,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이쯤에 와서는 우리는 슬슬 부끄러워지려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뤄드리기 위해선 신자와 교회는 아주 강해져야 한다고 설칩니다. 강철 같은 의지와 뜨거운 열정으로 무장하고 체계적으로 조직하여서 일사불란하게 담임 목사의 명령대로 진군하려 듭니다. 예배당부터 커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교인 수자를 어떡하든 많이 불려야 하며 또 큰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큰돈을 모으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해 동기부여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적 수단, 그중에도 돈이 없어서 당신의 일을 못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또 수많은 간증집회의 주 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정해 기도한 그대로 응답되어 암이 낫고 사업이 형통했다는 이야기뿐이지 않습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 삼아 간증을 거듭하다보니 처음에 받은 은혜가 나중에는 자동으로 그것도 아주 그럴싸하게 과대 포장되는 바람에 연약한 신자들의 부러움과 시샘만 유발합니다.

물론 진실 되게 하나님만 증거 하는 간증도 있지만 마치 자기가 아주 성숙된 믿음으로 간절하게 성경적인 기도를 했더니 그에 감동한 하나님이 대박을 터트려주었다는 식의 나눔은 정말 지양되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은 신자의 자랑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일상사, 아니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는 자신과 하나님의 일대일의 교제일 뿐입니다.

정 필요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눌 때는 다른 신자의 신앙에 도전, 격려, 위로를 주어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삼가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신나게 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 같이 여겨지는 우리의 기대가 잘못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마저 선지자와 성경을 믿지 못하는 자는 지옥에 갔다 온 자의 증언도 절대 듣지 않는다고 경고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겸손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은 아직 남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약해지는 차원을 넘어서 세상에서 받는 능욕, 궁핍, 핍박, 곤란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 앞에는 약해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능력으로 인해 더 강하다고 자신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될 수 있다면 자신은 어떤 환난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 아니 도리어 기뻐하는 것이 신자가 도달할 참 겸손의 위치입니다.    

이젠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아예 없어졌습니다. 집사, 장로, 목사로서 다른 성도나 불신자를 대할 때에 예절 바르게 대하는 정도로는 겸손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아주 믿음이 좋은 신자인 양 경건하게 행동하는 것도 더더욱 거리가 멉니다.  

바울은 때로는 죄에 빠진 자들을 아주 엄하게 야단치고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모습으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다가갔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어떤 모습이 되어도 상관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죽이기로 작정된 자처럼 항상 미말에 서기를 기뻐했지 않습니까? 자신이 가진 인간적 자랑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아예 배설물로 여기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우리는 세상에서 받는 능욕과 핍박을 기뻐하기는, 아니 복음을 전하다보니 필연적으로 받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피해갈 수 있을지 궁리하지 않습니까? 나아가 사람들의 갈채와 칭찬을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세상 사람과 동일한 수단과 실력에 의지하려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 아니 억지를 써서라도 자신과 가족의 현실적 안위만 추구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가 나서서 그런 일을 아주 좋은 신앙인양 장려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자들, 즉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꾸중과 저주를 들었습니까? 자신만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눈이 먼 어리석은 자들도 함께 끌고 간다고 말입니다. 또 그들이 추구하는 보상인 세상의 칭찬은 이미 받은 반면에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 피할 수 없다고 선언 받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복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이 신자의 겸손이 출발하여 도달할 자리입니다.

작금 기독교가 심지어 개독교라고 비난 받는 이 때일수록 우리 모두 정말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이해 관용 교류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불신자들 앞에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십자가를 포기하고 상대적 진리마저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다가가자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기독교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구원의 진리는 끝까지 진리로 붙들고 아니 더 강하게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의 모든 염려를 능하신 그분의 손 아래에 두는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신자와 교회를 이끌어가도록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진리만 성경대로 정확히 풀어 전하고 나머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부터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거듭나 오직 복음으로 살고 죽어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오직 예수여야 합니다. 예수가 교회 안에 성도 안에 충만해 있지 않으면 기독교는 항상 개독교로 흐를 소지를 키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신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으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길 외에 신자와 교회가 진정으로 겸손해질 수 있는 길은 결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과 인간적 방법의 겸손은 신자에겐 결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 땅을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마저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 내가 과연 어떻게 서야할지 잠잠히 묵상해 보면 겸손과 교만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정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서면, 즉 진정으로 그분의 충만을 구하면서 그분 발 아래 엎드리기만 하면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 채워져서 우리의 약함이 기쁨이 되며 자연히 세상 앞에는 강해집니다. 다른 말로 약하고 불쌍한 영혼들 앞에는 한 없이 안타깝고 약해지되 죄악과 사단과 죽음 앞에는 한 없이 당당하고 강해지는 것이 신자의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3/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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