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4:12) 하나님더러 기도하게 하라.

조회 수 1058 추천 수 46 2008.03.20 18:4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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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더러 기도하게 하라.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順適)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창24:12)



아브라함의 노종이 기도한 그대로 순적히 응답된 데에는 신자들이 미처 모르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기도는 자기가 소원하거나, 필요하거나, 궁금한 사안들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 답을 얻는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기도가 이뤄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신자 본인이 주관한다고 생각합니다.  

초신자 시절에는 거의 그러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하다보면 차츰 하나님이 시키는 기도를 내가 하고 있고 또 심지어 하나님이 나를 대신해 기도한다고 깨달을 때가 생깁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이 신자에게 기도한 내용에 대해 성령의 미세한 음성으로 응답해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과 달리 즉 하나님이 응답 대신 아예 기도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상하게 여길 것 없습니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고 또 그 내용도 모르지만 성령으로 기도하는 방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방언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라도 하나님이 시키거나 대신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 오히려 그런 기도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방언과는 달리 신자 스스로는 지금 그런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보다는 모를 때가 더 많습니다.

이 종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시킨 기도가 분명한 것은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15절)라는 구절로 증명됩니다. 기도를 채 마치기도 전에 응답의 확신을 얻은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응답된 셈입니다.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하나님인지라 기도하자마자 혹은 미리 생각까지 꿰뚫어서 순식간에 응답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응답을 미리 마련해 놓고 그에 맞는 기도를 하게끔 시켰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종이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믿었습니까?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찌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찌니라.”(7절)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었지 않습니까? 궁극적으로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 가운데 붙잡혀 있습니다. 항시 기도하는 자, 그것도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기도만은 그런 하나님의 인도에서 벗어나 있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역으로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미리 모든 상황을 선하고 아름답게 다 마련해 놓았는데 신자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끈질기게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믿고 끝까지 그렇게 기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평생 응답은커녕 이왕에 갖고 있던 여호와 이레의 믿음마저 산산조각 날 것 아닙니까?

여호와 이레는 다른 말로 하나님과 항상 교제 동행하는 신자의 경우 모든 일이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이 그분과 의논 하에 진행되어지고 또 그런 순적한 진행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그분이 시키는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니까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기도한 것처럼 되었다고 하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이 구절의 여러 가지 깊은 뜻을 지금 다 살필 수는 없고, 무엇보다 성경도 하나님이 시키는 혹은 대신하는 기도가 분명히 있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자들은 대개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무슨 제목으로 기도할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전혀 자기가 생각하지 않았던 내용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도 의아해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만나기는커녕 까맣게 잊고 지내던 친구에 관한 기도를 말입니다. 또 갑자기 어떤 이에 대한 생각이 그것도 괜히 까닭모를 불안한 마음과 함께 떠오릅니다. 신자더러 뭔지는 모르지만 현실적 혹은 영적 위기에 빠져 있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라는 성령의 깨우침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시키신 기도의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하고 있어서 의아해 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성령이 시켜서 혹은 성령이 직접 기도한 셈입니다.      
  
성령이 시키는 기도라고 해서 아주 특이한 초자연적 사건을 대상으로 기도 하거나 또는 기도하는 방식 자체가 신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아주 예외적인 긴급한 경우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를 빼고는, 갑자기 생각난 그 사람의 현재 형편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신자로 무아지경에 빠지게 해서 그 영혼이 영계로 넘어가 사탄과 마주쳐서 전쟁 치게 하거나 그런 일을 두고 기도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면 그분의 하시는 일의 성격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이 땅에 이런 유한하고 어리석은 현재의 모습 그대로 두시고 당신의 일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즉 하나님의 역사는 지극히 일상적 모습을 통해 일어나기에 그분이 시키는 기도도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아주 평범한 일을 두고 평소 신자가 기도했던 방식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기도하게 합니다.

이 종의 경우도 마음씨 착하고 믿음이 좋은 처녀를 신부 감으로 고르기 원했으니까 그냥 그 조건에 맞도록 기도케 했습니다. 단순히 나그네에 물 대접하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약대에게까지 자진해서 물을 주겠다는 처녀라야 확실히 그 마음씨가 보장됩니다. 또 여호와만 바라보고 고향 땅을 당장 등질 수 있는 자라야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노종은 자신이 평소 체험하고 또 생각하는 대로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신자의 자발적 동의와 순종 없이는 결코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의 생각과 나아가 영혼의 미묘한 흐름마저 단 일초도 그냥 방치해 두지 않습니다. 신자로선 그분의 강제에 의해 생각, 말, 행동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를 뿐이지만 그것마저 그분의 궁극적 주관 하에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 본인은 의식 못한 채 자기 지정의로 기도하고 있어도 사실은 하나님이 시킨 기도도 아주 많은 법입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기도라고 해서 신자가 호기심 내지 욕심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마련한 계획을 두고 기도할 뿐입니다. 먼저 가신 그분이 이삭을 위해 리브가를 예비해 놓은 후에 종이 그녀를 순적하게 만나 품성과 믿음을 순적하게 시험해 볼 수 있도록 노종의 아주 평범한 생각대로 기도 하게 했습니다. 그분의 온전하고도 구체적인 계획 가운데 신자가 항상 서 있다면 당연히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따라 가는 중이지 않습니까? 기도 응답 여부에 관심을 가질 필요 없이 항상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기만 하면 됩니다.

결국 기도의 최종적이고도 완성된 모습이란 항상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전부 비워 그분에게 내어 드리는 헌신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겪어도 그분의 역사에 쓰임 받겠다는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께 받은 구체적 소명이 있고 그것을 하나씩 실제로 실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정확하게는 희생하더라도, 동참하겠다는 갈급한 소원만 있으면 신자가 의식하든 못하든 자연히 그분이 시키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그런 기도를 해보지, 다른 말로 그분더러 기도시켜보지 않으시렵니까? 100% 응답되는 그런 기도 말입니다.  

3/21/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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