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1:2,3) 평강을 얻지 못하는 이유

조회 수 1184 추천 수 50 2008.03.17 19: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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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을 얻지 못하는 이유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2,3)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그 구절이 뜻하는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고 스스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흔히 말하듯 “내가 복음”이 되어버리는데 그런 복음 가운데도 크게 두 유형이 있으며 각기 그 해악(害惡)의 정도가 다른 것 같습니다.

우선 가장 큰 잘못은 아예 자기가 정해 놓은, 아니면 정하고 싶은 뜻에 갖다 부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듣고 싶은 내용이, 그것도 순전히 자기 판단으로 그렇다고 믿는, 나올 때까지 성경의 앞뒤를 뒤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정확히 들으려는 의사가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잔소리만 한다고 간주해 아예 들으려 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대신에 성경이 단지 마취약 내지 진정제 역할만 해주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마취제 혹은 진정제나 놓아주는 의사 아니 간호원으로 전락시키는 짓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해놓고 신자에게 원하는 것이 고작 고난 중에 위로해주거나 그 고통을 망각케 해주는 것으로 그칠 리는 없지 않습니까?

비교적 잘못이 덜한 부류는 자의적으로 의미를 갖다 부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 단순히 자기가 아는 상식의 범위 내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한글로 쓰여 있으니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지레 짐작하는 것 같습니다. 또 오랜 교회 생활을 해오면서 이미 다 배운 것이라고 여기고 구태여 더 깊은 의미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처음부터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 할 수 없습니다.

이 경우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신앙이 상식의 범위 안에 묶입니다. 심지어 세상에서 통하는 도덕과 철학이 성경을 대신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간의 사상이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보다 우위에 서게 됩니다. 성경이 자신의 교양, 지성, 도덕성, 종교성을 높여주는 치장물 내지 참고서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위인도 인간의 눈에만 그럴 싸 해보이지 하나님 기준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사형수가 자기와 똑 같은 수준의 사형수 이야기를 금과옥조로 삼는 꼴입니다.        

그렇다고 주석서와 사전을 참조하여 원어를 대조해 가며 읽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최소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아주 중요한 용어나 관용적 표현에 대해선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은혜’와 ‘평강’이 성경에서 또 성도들의 일상 대화 가운데 항상 접하는 용어인데도 그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하는 ‘내가 복음’의 대표적 예입니다.

우선 은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으로 받은 것 그것도 좋은 일이 은혜입니다. 별로 틀린 것이 없는 것 같습니까? 역으로 말해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은 셈이 됩니다. 은혜는 복(福)과 동의어가 됩니다. 분명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을 텐데 멋대로, 엄밀히 말해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반면에 상식적 종교적 해석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어나게 하는 일 전부, 즉 좋은 일 뿐 아니라 나쁜 일도 은혜라고 봅니다. 넓은 뜻으로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신자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는 본인이 한 일, 그것도 사단의 훼방에 빠져 잘못을 범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는 하나님이 은혜로 그 일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잘못을 범했음에도 신자가 자기 잘못을 깨달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시는 과정과 또 그 결과가 은혜입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적 주권 아래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쉽게 그 전부를 은혜라고 여기고 또 그러면 아주 겸손한 신앙이 되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자칫 무슨 일에든 쉽게 포기하게 되거나, 아예 모든 일을 숙명으로 알고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게 되거나,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의 뜻은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굽실거리며 아부하는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사실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을 묵상하는 가운데 의심과 불만을 갖고 씨름하는 측면이 훨씬 더 많아야 올바른 신앙으로 자랍니다.  

이처럼 은혜를 잘못 해석하니까 은혜를 받은 결과인 평강마저 ‘내가 복음’이 되어버립니다. 우선 좋은 일이 생기지 않으면 평강을 맛 볼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세상 철학을 따라 자기 사고 체계를 긍정적 낙관적으로 바꿔서 평강을 얻으려 합니다. 아예 모든 것이 하나님 하신 일이기에 망각 내지 체념하는 것도 평강을 대체합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도 다 하는 자기에게 원인이 있는 실수와 죄에 대한 성찰마저 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종교적 열광에 이어지는 일시적 감정의 고양 상태를 평강을 얻는 지름길로 착각하는 자마저 나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룬 은혜로 앞으로 지을 죄도 다 용서 받았으니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이상하고도 방탕한 자유를 평강의 공식으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 반대로 성경을 아주 엄격한 도덕 교과서로 보아 하나라도 위반 하면 금방 평강을 잃어버리고 죄책감에 묶이는 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신앙 상의 오류는 근본적으로 너무나 자주 듣고 사용하는 은혜와 평강의 뜻마저 모르는데 기인합니다.

은혜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이 아무 자격이 없는 자에게 공짜로 베푸시는 선을 말합니다. 그런데 확실히 해 둘 것은 그 선이 반드시 죄와 연결된 의미라는 것입니다. 현실의 고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벗어나게 되는 일마저 무조건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가 현실의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 그 원인이 능력이 부족해서이지 자격이 없기 때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격으로 따지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오히려 그분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여지가 충분하도고 남습니다. 또 자신의 실수, 약점, 판단착오 등을 스스로 분석하여 바로 잡을 수 있는 경우에 더 급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신자의 수고와 노력입니다.

물론 능력이 부족한 것도 넓은 의미에서 자격이 없는 것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능력으로 일을 바로 잡을 때도 또 다시 실수나 판단 착오하지 말고 세상이나 사단의 방해가 없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그 기도대로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니까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인도마저 전부 은혜의 범주에 넣게 되면 구태여 성경이 은혜에 꼭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라는 말을 덧붙일 이유가 없습니다. 죄로 찌들어 더러워졌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지 단순히 현실의 어려움에 시달린다고 그런 것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은혜란 죄악에 빠져 하나님과 원수 사이로 있었을 때에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구원을 베푸신 그분만의 다함없고 일방적이며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또 구원 이후에도 신자가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 발동하고 사단의 꾐에 넘어가 추해지더라도 계속해서 그분의 십자가 보혈로 덧입혀서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구원 전과 후에는 은혜를 받는 길이 다릅니다. 믿은 후에는 가만히 있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죄가 죄인 줄 깨달을 수 있고 죄의 그 추함과 교활함과 가공할 힘을 생생하게 실감하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능력이 있음에도 죄를 지었기에 용서받을만한 자격은 더더욱 부족한 것입니다. 당연히 구원 이후는 신자로선 더더욱 은혜를 절실하게 소원해야 합니다. 죄와 연결되지 않는 은혜란 은혜로서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평강도 철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죄가 용서 받았음을 확신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정상으로 회복된 상태입니다. 죄에 찌든 인간이 죄악이 판치는 인간 세상에서 스스로는 평강을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평강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만약 신자와 당신과의 사이에 죄가 가로막아 있다면 평강이 임할 리 없습니다. 그분은 죄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만약 현실적 고난이 죄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당신께선 더 쉽게 제거해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는 이쪽을 더 은혜라고 혹은 이쪽만 은혜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에만 힘입어 그분의 이름으로 자신의 더럽고 추한 모든 것을 날마다 꺼내어 씻음 받기 원할 때에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가 임합니다. 그래서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나아가 그분이 주시는 의와 거룩과 생명을 더 많이 받고자 소원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 진정한 평강입니다.

정확히 말해 그분만을 바라보고자 하는 거룩한 소망이 그분을 등지고자 하는 더러운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 평강입니다. 그런 상태가 이르기 전에는 절대로 평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어떤 일시적, 감정적, 의지적, 종교적 평강일지라도 자신의 죄의 본성과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간 위장된 경건이자 또 다른 영적 죄일 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은혜와 평강이 갈라디아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임하길 소원했습니다. 모든 신자가 신앙으로 도달해야 할 경지가 바로 은혜와 평강이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교회들이 신자에게 가르쳐야할 경지도 바로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내가 복음’ 식의 은혜와 평강을 가르쳐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신자가 그런 오류에 빠지면 바로 잡아 주어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는 과연 어떠합니까? 혹시 교회 스스로 ‘내가 복음’에 도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새삼 강조하건대 현실적 고난이 없어지고 아무 걱정이 없어지는 상태가 평강이 절대 아닙니다. 또 그렇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간섭도 은혜가 아닙니다.

만약 현실의 안위가 평강이라면 신자는 평생을 두고 참되고도 지속적인 평강을 얻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저주 받은 이 땅에는 고난이 끊일 날이 없고 신자라고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가르치지도 않은 은혜와 평강이 아무리 종교적으로 경건한 모양을 갖추어도 임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3/18/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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