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2:9,10) 고무 칼을 들고 있지는 않는가?

조회 수 1002 추천 수 45 2008.03.05 19:5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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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 칼을 들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창22:9,10)



본문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백 살에 얻은 외아들 말하자면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을 이삭을 하나님께 드림에 전혀 거침이 없었습니다. 일말의 재고(再考), 주저, 한탄, 원망도 없었습니다. 진짜 시퍼런 칼을 꺼내 들고 급소를 향해 온 힘을 다해 진짜로 내리꽂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리지 않았다면 이삭은 바로 즉사했을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영점 몇 초의 간격을 두고 생과 사가 엇갈렸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으로선 도저히 감지도 못할 찰나 같은 순간에도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이 죽도록 잠시라도 방심할 리는 당연히 없었겠지만 너무 심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는 당신께서 아브라함이 진짜로 아들을 바치겠다는 헌신을 미리 아셨을 테니까 단을 쌓을 때쯤에 말려도 되지 않았을까요? 또 그래야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일련의 과정 중에 부자간에 알게 모르게 교차되었을 온갖 미묘한 감정의 흐름과 그에 따른 후유증을 막을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반드시 기다려야 했다면 그렇게 한 그 자체에 이미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아무리 인간이 의지력을 몽땅 동원해 어떤 일을 결단하였어도 마지막 영점 몇 초의 순간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당신께선 너무나 잘 아셨던 것입니다. 행동으로 실현되지 않는 순종은, 그것도 온전한 진실성이 동반되지 않으면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이 행위로 옮겨졌더라도 얼마든지 가식과 그릇된 동기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비슷한 경우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고무 칼을 들고 갔거나, 진짜 칼이라도 칼집만 만지작거렸거나, 마지막까지 칼을 드는 시늉만 했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아니면 칼을 공중에 쳐들기는 했지만 그저 부들부들 떨다가 끝내 탈진하여 칼을 떨어트리고 그 자리에 쓰러졌을 것입니다. 전신에 땀과 눈물콧물이 뒤범벅이 되어서 말입니다. 솔직히 물어보건대, 나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주 독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그것도 외아들을 죽이라는 아주 특별한 명령을 받았을 때만 잘 순종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른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할 수 있는 일에 구태여 순종하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계명이라면 순순히 따르거나 아예 거역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또 쉽게 할 수 없는 일에 순종하려면 믿음으로 일단 시행하고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순종에 조건이나 유보를 달수 없습니다. 즉각 시행하는 것만 요구될 뿐입니다. 헌신하기로 결단하기 위해 갈등하고 고뇌하는 과정마저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결단했는데도 곧바로 시행하지 않으면 인간의 심령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를 뿐 아니라 사단의 방해도 극심하기 때문에 순종하기 아주 힘들어진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꼭 어려운 명령이 아니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는 일은 여전히 아주 힘들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되고 또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명령인데도 생각만큼 잘 되지 않습니다. 대표적 예로 십계명을 들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거짓 증거를 하지 않는 것쯤은 쉽사리 할 것 같지만 우리 모두 지금껏 겪어온 바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부모에게 고분고분해도 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불평과 원망을 해댔습니까? 꼭 재판에 불려나가지 않아도 의와 진리를 끝까지 지켜내기는커녕 내게 더 유리한 쪽으로만 말과 행동을 한 적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는 크게 상관없는 것 같아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비추면 오히려 더  많이 위반했음을 처절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웃, 친척, 형제, 나아가 주 안에서 만난 성도들끼리 말과 생각으로 수도 없이 죽였으며, 예쁜 여자를 두고 혼자서 음욕을 품은 적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이웃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질투와 분노와 저주의 칼날을 심심찮게 갈았지 않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을 섬기고 우상을 멀리해야 하는 계명마저 위반하기 일쑤이지 않습니까? 마음으로는 재물을 인생의 참 주인으로 삼고선 겉으로만 경건한척 한 적이 그분을 진짜 주인으로 모신 적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 않습니까? 돌이나 나무로 깎은 형상에 절한 적은 없어도 그보다 더 실질적인 우상을 심령 속에 얼마나 많이 모셔놓고 있습니까? 재물, 권력, 명예, 자존심을 비롯해 건강, 외모, 취미, 운동, 나아가 배우자, 자녀, 부모, 심지어 교회 직분, 종교 행위,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열심 까지 그 종류를 꼽자면 끝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자마저도 그 마음에 선을 행할 소원은 있어도 그것을 행할 자질과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예컨대 거짓 증거까지는 몰라도 거짓말 정도는 얼마든지 하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실제 삶은 전혀 반대이지 않습니까? 말로 하는 거짓말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삶 자체가 자기 믿음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 끝나자마자 바로 그런 사실이 발각될 정도입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얼마나 거짓투성이인지 모릅니다.

선을 행할 소원은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전혀 그럴 수 없는 까닭은 우리의 지정의를 주관하는 영혼이 부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았어도 하나님을 배반했던 죄에 대한 형벌에서 면제 받았을 뿐입니다. 여전히 죄의 본성은 신자 속에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외아들을 바치는 정도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식은 죽 먹기 같아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도 순종은 결코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인간에게 전혀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정 반대입니다. 우리가 정말 순종하기 힘들다고 해서 절망으로 가버리면 그것이야말로 불순종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에 오히려 소망을 더 가져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실천만 하면, 즉 순종하면 그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빨리 가장 큰 능력으로 가장 풍성하게 개입하는 부분은 바로 인간이 아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선을 행할 소망을, 다른 말로 그분께 순종할 소망을 정말로 하나님의 크기에 걸맞게 더 크게 가꾸고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심령을 꿰뚫어 본다는 의미가 단순히 순종할 결단과 준비가 되었는지 점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의 썩어빠진 영혼의 상태와 진토 같은 체질을 너무나 정확히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혼자서는 도저히 선을 행할 수 없기에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성령을 내주케 해주신 것입니다. 선을 행할 소망을 더 키우되 오직 하나님을 믿고 순순히 따르기만 하면 행함은 그분의 능력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신자가 하나님 앞에 가짜 고무 칼을 꺼내들거나 진짜 칼이긴 하지만 잠시 휘두르는 시늉만 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신자가 가진 열심과 믿음에 대한 진정성을 드러내 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도저히 자기 가진 믿음과 열정으로는 순종할 능이 없으니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사 오직 성령께서 순종으로 인도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건대 인간이 완전한 절망으로 떨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완전한 소망으로 당신께서 이끄십니다. 신자가 진짜 칼을 들고 진짜로 찔러 죽일 대상은 바로 날마다 자신의 영혼을 썩게 만드는 죄의 본성과 공중 권세 잡은 흑암의 세력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진짜 칼도 무뎌지고 녹이 쓰기 마련입니다. 당신의 칼 상태는 지금 어떠합니까?  

3/6/2008

김유상

2008.03.05 20: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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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부분에서 적과의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게 우리들의 실체입니다. 가나안 땅 거주민들과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말라셨는데, 우린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로 (더러는 일견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그 땅 거주민들과 화평을 맺고 지냅니다. 아직 세상 것에 미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어내어야 함을 압니다. 그런데, 베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자괴의 통곡과 회한의 눈물만 내뱉고 흘릴 뿐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에 의지하며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할 수밖에요.

이선우

2008.03.06 11:19:33
*.160.241.158

어젯밤 외국 손님하고 소흥주(죄송!) 한잔 나누면서 한 얘기입니다.
Execution이 어렵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왜? 어떤 과제에 대한 Ownership을 철저히 가지고 있으면, 이에 대한 Accountability가 자연히 생기게 되어 Execution을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일처리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생각이지요.
그런데 신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사람들이 얘기하는 Ownership에 대해 거꾸로 철저한 Disownership을 가져야만 할 것 같습니다. 내가 Ownership을 가지고 내가 주체가 되어 일을 하려하면 백전백패이니까요. Disownership은 나 자신이 주인임을 철저히 포기하고 내 안의 주인이신 주님(성령님)께 Ownership을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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