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 올무를 던지는 목사들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責)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 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막12:13-15)
유대 율법과 전통을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과 로마에 빌붙어 정치적 이득만 취하는 헤롯당은 평소에는 서로 아주 싫어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든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어제의 적들이 오늘의 동지로 힘을 합쳤습니다. 또 그 배경에는 대제사장의 사주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정치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예수를 눈에 가시로 여기고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들 모두의 의도는 물론 예수가 납세를 거부하면 행정권을 가진 헤롯당으로 바로 체포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당은 로마 납세를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자인 반면에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겉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내면으로는 적극 반대하는 자였습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아주 고단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납세를 반대하면 로마의 반역자로, 그 반대로 납세를 찬동하면 유대 민족의 반역자로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가 되어도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활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 잘 아는 내용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가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랍비로서 납세를 찬동할 리는 절대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참으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다”고 자기들 원하는 쪽으로 답변을 유도하려는 복선을 미리 깐 것입니다. 자연히 예수는 로마당국에 잡혀가는 동시에 자기들 사상의 옳음도 입증됩니다. 반대로 헤롯당은 예수에 의해 정죄되는 결과도 낳습니다. 만약 제대로 답변을 못하면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기는커녕 랍비로서의 자격도 상실됩니다. 바리새인으로서는 진짜로 꿩 먹고 알 먹는 장사였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답변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창 당혹되어서 어쩌면 끝까지 입을 다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교제가 없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의기투합하여 함께 나타났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가름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 데다, 결정적으로 외모로 보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니까 예수님으로선 도리어 그 속이 훤히 보였던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라고 분명히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바리새인이 말한 그대로 외모 대신에 중심을 보는 분임을 오히려 더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가 담긴 자기들 공치사가 오히려 진실을 밝히는 선언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답이 나오든 이번만은 예수를 완전히 올무에 가두었다고 내심 아주 신바람이 났을 텐데 결과는 오히려 자기들이 펼쳐 놓은 올무에 자승자박(自繩自縛)된 꼴입니다.
유대사회의 최고 종교지도자들의 외모가 진짜 속내와는 완전 정반대임이 나사렛의 한 무명 랍비에 의해 만천하에 공개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과 권능이 그들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예수에게 있음이 더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과 이 땅에 오신 그분의 아들만이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성경에 기록된 뜻이 정작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잘못을 질책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성경은 단순 역사가 아니라, 역사에 개입한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절대적 계시입니다.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어져야 할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너무 치사하고 음흉한 죄인임을 밝히는 단순한 뜻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신자와 지도자들을 질책하는 말씀입니다.
우선 신자들이 예수님께 들고 나오는 기도 제목들이 주로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선택한 몇 가지 대체 방안들 중에 어느 것을 택할지 묻는 것이 아주 많지 않습니까? 그 방안들은 어차피 자기에게 유리한 것들입니다. 단지 알고 싶은 것은 어느 쪽이 성공 가능성이 높으며 어느 쪽이 실패 가능성이 낮은지 여부일 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서 순종하겠다고 하지만 내심으로는 어느 쪽을 취해도 자기가 소원하는 바입니다. 오로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크나큰 능력입니다. 아주 잘 봐주어야 그 일을 하는데 방해 세력만 막아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도움으로 대박이 되면 금상첨화이고 최소한 실패만 하지 않아도 자기로선 큰 이득이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이미 알거나 어렴풋이 눈치 채고도 기도로 아뢰기만 하면 거룩한 일로 바뀌는 줄 착각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그러고도 응답이 안 되면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 전지전능하심마저 의심, 불평합니다. 예수님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책잡으려 덤비지 않았다는 것만 바리새인과 다르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답만 들으려 들거나 결과적으로 사후에 책을 잡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신자는 자기가 계획하고 소원하는 바를 무엇이든지 기도해도 됩니다. 그러나 신자 쪽에서 제시한 방안들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선택케 해서 이뤄지도록 이끄는 것이 기도가, 아니 믿음조차,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길을 예비해 놓으실 수 있기에 전지전능하신 것입니다. 또 그런 길을 기꺼이 따를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죽어라고 하셔도 기꺼이 죽으리라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선 아무리 기도를 뜨겁게 오래 해도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길로 응답이 되어도 자기가 소원하는 바이면서도 예수님께 단지 성공확률이 높은 방안의 선택권만 맡기려 드는 것은, 아무리 경건한 종교적 형식을 빌렸어도, 그분이 외식인 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자들이야 미처 신앙 교육이 덜 되어서 순진, 무지, 편견이 있어서 그렇다 치지만 성경을 가르쳐야 할 목회자 중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열심히 믿고 헌금을 많이 하면 응당 복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성도들이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합니다. 교회 생활에 바치는 열심과 정성에 비례해서 현실적 풍요를 되돌려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정도의 가르침은 아주 순진한 편입니다. 어느 정도 양식이 있는 신자는 금방 잘못되었다고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목회자의 아주 교묘한 외식이 등장했습니다. 교회에서 죄와 심판에 관해서 가르치면 안 된다고 하는 부류입니다. 가뜩이나 기독교에 비호감을 가지거나 익숙하지 못한 불신자를 교회로 끌어 모으기 위해선 그들의 사고와 문화에 맞게 성공, 번영, 사랑, 치유, 화목, 관용의 메시지만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교회와 목사의 인도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좁고 협착하여 머리 둘 곳도 없기에 대부분이 외면하는 길입니다.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죽는 길입니다. 물질과 죄악이 주는 풍요와 쾌락에 동참하지 않기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는 길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오직 그분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 받는 것이 절대적 전제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지옥 심판의 형벌에서 벗어났기에 더더욱 흑암 가운데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굴레에 묶여 있는 이웃들을 십자가 구원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신자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썩는 밀알이 되는 것도 단순히 희생과 사랑으로 섬겨선 안 됩니다. 반드시 죄악 앞에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는 모습이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면 승리가 아예 없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가 신자와 불신 세상을 향해 영원토록 전해야 할 메시지는 오직 죄에서 씻음을 주는 십자가 복음뿐입니다.
그런데도 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겠다는, 심지어 전해서는 안 된다는 목회자들의 심사는 무엇입니까? 일단은 불신자들을 더 많이 교회에 끌어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의도는 좋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교회로서의 존재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얘기인데 죄와 심판이 빠진 말씀은 결코 성경적 메시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렇게라도 해서 교회가 성장하면 하나님에게 결국은 좋은 일이지 않는가라고 쉽게 판단한 것입니까? 당신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죽이셨는데 그 뜻이 무시되는 것을 좋아하실 리는 만무합니다. 어쩌면 목사님들이 이런 간단한 진리조차 모를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염려되는 것은 그래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면 자신의 이름이 나고, 하나님의 큰 일군으로 세상에서 인정해 줄 것이며, 다른 종교인들로부터 포용력이 큰 트인 목사라는 평판을 들으며, 일반 사람들 앞에 자기들 방식이 옳았다는 증명으로 삼으려는 속내가 더 앞선 것은 아닐까요?
말하자면 일거양득이 아니라 삼득(三得), 사득(四得)이 되는 일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어느 쪽 손을 들어주어도 자기들에게 절대 유리한 올무를 예수님에게 던진 바리새인은 정작 그분으로부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제 삼의 정답을 들었으며 또 외식하는 자로 정죄 당했습니다. 작금 이런 종교지도자들도 모든 측면에서 자기들에게 절대 유리한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외의 정답은 전혀 예비하고 있지 않기에 동일하게 외식하는 자로 정죄당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그들은 예수님에게 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입니다. “복음 없이도 교회에 불신자를 많이 모으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복을 준다고 선전해서라도 일단 교회를 키우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십자가나 썩는 밀알을 전하면 아무도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그래도 좋습니까?” 교인들 숫자와 교회 크기를 빌미로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우려는 셈입니다.
그런 질문에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기껏 열두 명 되는 제자들마저 뿔뿔이 다 도망갔어도 혼자서 십자가를 지러 골고다로 묵묵히 올라가신 분이 교회 같지 않은 교회에 사람들이 차지 않는다고, 사실은 거꾸로 넘쳐나고 있지만, 눈이라도 깜짝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교인들 숫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신자, 아니 제자들 숫자에만 관심 있으십니다. 아니 숫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지금도 단 한 명의 숨겨진 참 제자를 통해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당신께서 묵묵히 이뤄나가고 계실 뿐입니다.
이런 목사들은 자기들이 펼친 올무로 인해 오히려 자승자박 되어가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자기들로선 황금 같은 주일 시간을 쪼개가며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정작 하나님과 그 외아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기들도 죄악 가운데 계속 더러워지고 있기에 그저 그냥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은연중 깨달은 것입니다. 그동안 공들였던 불신자에게 변화의 바람은 전혀 없고 오히려 서서히 교회에서 이탈되어 가는 추세마저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동안 강단에서 전한 메시지나 교회 전체 분위기를 죄와 심판과는 정반대로 끌고 갔으니 이제 다시 그런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할 지경까지 되었지 않습니까?
3/10/2009
감사합니다 항상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할 수 있도록 글을 올려주셔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