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내 법 없는 자들의 횡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2-24)
베드로가 첫 오순절 설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법 없는 자들, 즉 로마인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그럼 두 가지 측면에서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선 현대 서구사회 대부분의 법체계가 로마제국의 법을 모태로 할 정도로 로마는 아주 뛰어난 법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독재자 폭군 황제가 나타나긴 했지만 사실은 원로원이 견제 통치하는 민주공화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법 없는 자들이 아니라 법 이론이나 정신에선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못해 우수한 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할 권한이 없어 억지로 로마 재판정에 떠넘겼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근본이유는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죄목이었지만 로마법으로는 사형은커녕 죄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반대 의사조차 묵살하고 로마제국에 반역했다는 엉터리 죄목을 덮어씌우고 거짓 증인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들은 법 없는 자의 손을 빈 것이 아니라 법을 적용하려고 법적으로 권한이 있는 사람을 찾아 갔습니다.
잠시만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이 재판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너무나 부끄러운 짓이었습니다. 우선 예수는 아무 무장을 하지 않은 유대인 랍비로서 소수의 제자들을 데리고 공개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나아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유대인들에게 권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어떤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되었습니다. 공생애 중에는 물론 잡혀 와서도 로마에 반(反)하는 선동, 변론, 증언, 진술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소자들은 급기야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칭하고 다녔다는 나름대로는 결정적(?)인 구실을 갖다 붙였고 빌라도도 할 수 없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아주 예리하고 새겨들을 만합니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요18:33,34)
문자적으로는 네가 나를 법적으로 판단하여 적용한 죄목인지 단순히 제사장들의 고발을 옮기는 말인지 물은 것입니다. 내면적으로는 아주 통렬한 지적과 풍자가 담긴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은 로마제국이 세우지 않느냐? 너희가 헤롯을 폐위시키고 나를 왕으로 세울 계획을 세운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더냐? 전혀 없었지 않느냐? 설령 유대인 중에 스스로 반역하여 유대의 왕이 되겠다고 나선다 해도 제국이 그 정도 제어할 능력을 가지 못하느냐? 만약 네 관할 하에 있는 유대 땅에서 그런 반역이 발생하면 너는 직무를 유기한 나태하고 무능력한 총독 밖에 더 되느냐?” 로마 총독으로선 도무지 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법으로도, 도덕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예수는 전혀 무죄했습니다. 유대 제사장들이 단지 자기들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렸다는 한 가지 이유로, 사실은 자기들의 종교 정치 경제적 기득권에 혹시라도 침해가 있을까 심히 염려하여 로마총독을 제치고 로마법을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적용해 죽여 버렸습니다. 공정한 재판 진행에는 전혀 관심 없고 오직 예수를 죽이는 것만 목적이었습니다. 자기들 금고를 굳게 지키려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로마를 법 없는 자라고 지칭한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없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의 법체계가 아무리 이성적, 논리적, 도덕적, 사회적으로 우수해도 인간이 따를 절대적 기준인 하나님의 법과는 거리가 전혀 멀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선 그 법이 가장 우수하여 당시의 인간 사회에 유익하고 선한 역할을 잘 감당했지만 영적인 문제까지 관할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로선 로마인을 탓하려는 뜻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법대로 살아야 할 유대인들이 로마 법률에도 전혀 저촉되지 않는 사안을 가지고 억지로 형식적 절차만 빌려 자기들 원하는 대로 처리했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9계명을 어겼습니다. 유대인 예수는 제사장들에게도 당연히 이웃이었습니다. 이웃을 이방에게 넘겨, 하나님의 법 대신에 세상 법을 그것도 악용해서, 거짓 증인으로 조작된 이웃에 의해 죽게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평소 로마인을 하나님을 모르는 더럽고 추한 죄인이라고 경멸했습니다. 또 어떻게 하든 로마법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자기들끼리 마음껏 모세 율법대로 살기를 갈망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되느냐고 예수님께 물은 내심은 분명히 바치기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로마법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자들이 눈앞에 가시 같은 한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평소 경멸하던 자를 찾아가, 경멸하던 법체계에 편승하여, 경멸하던 방식을 서슴없이 사용했습니다. 그것도 도덕적 종교적으로 가장 존경 받는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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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오순절에 천하각국에서 모인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으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너희도 너무나 엉터리이자 더럽고 추한 그 행위에 일심으로 가담했지 않느냐?”며 그 당시를 회상해보라고 촉구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려갔거나 제사장 말이 그럴싸해서 넘어갔거나 간에 과연 그 재판이 공정했는지 다시 곰곰이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대체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자가 세상 법으로도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고의 살인 하나만으로 율법으로 사형에 해당합니다. 결국 예수는 아무 죄가 없는데도 세상의 법으로 사형을 당한 반면에 로마법이든 율법이든 아무 죄가 없다고 자신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법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라도 세상 최고의 권력자, 도덕군자, 종교인들이 세상 최고의 법을 동원해 죽인 예수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반면에 그런 엄청난 죄를 범한 자들을 오히려 사형의 형벌을 가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분명 첫 번 의문은 순리대로 해소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설파한 대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그가 사망에게 메여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설명만 하고 말았다면 그야말로 예수라는 한 인간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대신 갚은 것뿐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찾아가기 전에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예수를 그들에게) 내어준바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할 제물로 이 땅에 오셔서 온갖 비방, 멸시, 핍박을 당하다 마지막으로 너무나 엉터리 같은 죄목으로 저주 받을 죽음을 당할 메시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하나님의 미리 아신바가 예수를 죽이고 부활시키겠다는 당신의 계획에 한정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법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고살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그 죄에서 구속할 제물인 예수를 바로 그들의 손에 넘겨주기로 계획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바로 예수 죽인 자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바로 그 용서 받아야 할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도록 예수를 내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신비로운 경륜이자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입니까?
알기 쉽게 바꿔 말하면 우리 모두도 예수에 의해서만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지만 그 이전에 예수를 하나님에게 넘겨받아 십자가에 고의로 죽인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예수는 단지 이천년 전 로마의 변방에 살았던 한 종교적 정치적 죄인에 불과합니까? 그럼 스스로 정말 솔직히 자문(自問)해 보십시오. 자신의 현실적 이익을 위해 이웃을 거짓 증거하고 있지는 않는지, 혹시 내가 불이익을 당할까봐 불의와 죄악을 보고도 침묵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말입니다.
나아가 어지간한 것 다 갖추었음에도 남들이 나보다 나은 것 하나만 있어도 그저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까? 사촌이 논을 사면 축하는 못할망정 배가 아프다 못해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지 않습니까? 때로는 그 죽이고 싶은 상대가 형제자매는 물론 부모인 적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 자리에 있었으면 십자가에 함께 못 박지 않았을 자신이 있습니까? 그런데 진짜 묻고 싶은 질문은 그런 온갖 죄들에서 자유로워질 자신이나 방도를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 단순히 잘못된 재판을 바로 잡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아니 당신께서 재판 전부터 자기가 구원해줄 죄인들에게 제물로 스스로 내어준 바 되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사망을 초월한 분입니다. 생명과 사망을 주관하는 분입니다. 나아가 아무 소망이 없어 비참한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하게 주십니다. 그분만이 죄에서 깨끗케 하신 후에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덧입혀 주실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죄를 심판하고 구속할 유일한 분입니다. 오늘날의 가장 잘 만들어진 어떤 인간의 법체계로도 인간의 죄악과 모순을 온전히 공정하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법이 아무리 좋아도 빌라도의 경우처럼 집행하는 사람에 따라 왜곡됩니다. 모든 인간이 어리석고 불완전하며 죄에 찌들어 있기에 온전한 공의와 사랑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결코 실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아니고는 인간의 더럽고 추한 영혼을 의롭게 할 방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예수를 법 없는 자의 손에 넘겨주는 일들이 실제로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분쟁을 세상 법정에까지 끌고 가는 일을 두고 하는, 정말 목숨 걸고 금해야 할 일이지만, 말이 아닙니다. 또 교회 안에서마저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위치와 신분으로 서로 우열을 다투며지새거나, 그저 개별교회의 양적성장만을 위해 세상에서 통하는 온갖 수단이 동원하는 있는 작태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 분명히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되었기에 십자가에 응당 죽게 되어 있었다고 말입니다. 다른 말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따르는 이들조차 말도 안 되는 죄악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지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더러 이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을 구원하러 온 자를 도리어 죽여 버린 죄마저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 온전히 엎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라면 때가 늦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언제 해도 바로 그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따라서 골고다 언덕에서 죄에 빠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벽하게 성취되었다는 절대적 진리가 소홀해지는 일이야 말로 예수님을 법 없는 자의 손에 고의로 다시 넘기는 짓입니다. 그분이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 내포하는 그 비밀, 신비, 은혜, 권능을 경시, 가감, 변개하거나, 나아가 짐짓 외면하거나, 심지어 부인 저주까지 하는 일이 기독교계 내에서조차 지금 얼마나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종되었지 않습니까? 너희가 바로 예수를 죽인 천하에 죽일 죄인이니까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 항복하라는 말씀은 종내 들을 수 없게 되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었다면 이제 우리가 그분을 위해 대신 죽을 차례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이천년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또 섬기는 교회 안에서 십자가 복음을 성경대로 회복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고의로 살해한 죄를 벗기 위해 그분을 고의로 부활시켜야 합니다. 이것 외에 성도와 교회가 함께 사는 길은 절대 없습니다.
7/5/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