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17)
가장 황당하고 추한 종교 경전
기독교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인류 역사는 물론 성도 개개인의 삶을 주관하신다. 그 이끄심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고 신자와 상호 교통하면서 이뤄진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말씀하시고 신자는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사소통은 주로 성경말씀을 통해서, 또 그것이 기준이 되어 진행된다. 한마디로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성경에 대한 불신자들의 반감은 유독 크고도 깊다. 예컨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성경의 기록을 두고 예수가 한 말인지 아닌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고 따진다. 기록한 내용을 믿고 따르기에 앞서 그 진실성 내지 사실성에 대한 의심부터 한다.
그러나 앞글에서 살펴본 대로 성경은 현존하는 어떤 고대의 책보다도 원본과의 편차가 가장 적다. 성경의 진실성을 의심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책들은 아예 휴지조각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예컨대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진짜로 했는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인 변증은 그들에게 아무 의미나 효력이 없다. 여전히 성경의 사실성조차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다. 먼저 영적인 이유다. 예수를 모르고 죄에 빠진 자연인들은 인생을 거룩하게 주관하는 하나님을 거부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인정하면 성경이 말하는 대로 자신들의 기존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함을 그들도 기실 알고 있기에 그것이 싫다는 뜻이다.
둘째는, 그나마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읽어보다가도 곳곳에 나타나는 황당한 내용들 때문에 지어낸 이야기이지 사실이 아니라고 지레 단정해버리는 것이다. 노인이 지팡이 하나로 바다 물을 가르고, 전투 한번 벌이지 않고 침묵의 행렬만으로 철옹성이 무너지고, 기도했더니 해가 중천에 머무는 등 동화 같은 이야기로 가득 찬 것 같다. 또 젊은 랍비가 중풍, 문둥병, 귀머거리, 소경을 말씀 한마디로 고치고 물 위를 걸으며, 죽은 자도 살려낸다. 도무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기록들이다.
거기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두 번이나 속인 치사한 자가 믿음의 조상이요, 충직한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는 그 부하는 죽인 왕이 가장 위대한 왕이자 구세주 예수의 표상이라고 한다. 가나안 땅을 정벌할 때는 여자와 아이는 물론 가축까지 몰살시켜버렸다. 심지어 아비가 두 딸과, 또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성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는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도무지 윤리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행위들을 의롭다고 강변하고 그중 일부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한 것이라고 하니 뻔뻔하다 못해 더럽고 추한 책 같다.
요컨대 세계적 종교의 경전으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거룩하고 의로운 향기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피 비린내가 나는 것 같다. 거기다 도덕적 결단과 실천으로 유도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인다. 믿음의 선조들의 부도덕한 행위는 둘째 치고 예수는 선행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자기만 따르면 천국 간다고 한다. 실제로 본인도 창녀나 세리 같은 자들과 특별히 친하게 지냈다. 종교의 경전으로 전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기록이라고 하니 더더욱 황당할 따름이다.
성경 기록의 역설적 진실
정말 그렇다. 기독교 신자가 봐도 종교 경전으로는 별로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시중에서도 도무지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들이 성경에 버젓이 나오고 또 하나님의 뜻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더 입증해준다는 사실을 아는가? 종교 경전에 포르노나 폭력물을 일부나마 포함시킬 생각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할 것 아닌가? 상식적으로 따져도 가능한 고상하고 경건한 이야기나 훈계로 가득 채우려 들 것이다.
성경이 그 정반대라는 사실은 그 저자가 정신 이상이거나, 아니면 아주 특별한 뜻을 가진 천재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의미다. 마치 예수가 스스로 부활이요 생명이기에 자기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선포했다는 사실이 스스로 정신이상자이거나, 아니면 그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둘 중 하나가 분명하듯이 말이다.
이는 또 성경의 그 모든 황당한 기록들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꾸며낸 이야기라면 이왕이면 거룩하고도 감동적으로 만들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부합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지어낼 수 있는 문필가, 사상가, 종교인은 얼마든지 많다. 거기다 동화나 전설에나 나올 법한 기적 이야기로 시종일관하는 것은 그 종교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기는커녕 반대로 떨어트릴 뿐이다. 실제로 기독교의 외부인들이 성경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그렇지 않은가?
결국 성경은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야기다. 물론 하나님이 직접 그런 이야기들을 지어내었다는 뜻이 아니다. 기적을 비롯한 성경의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이 직간접으로 역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설령 두 딸이 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이야기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죄에 기인하는 사건이라고 해도 성경 기록으로 남겨두는 데는 그분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흔히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에 불과하지 하나님의 말씀은커녕 종교 경전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비난한다. 심지어 범(凡) 기독교진영 내부에서도 그런 궤변에 솔깃 하는 자들이 있다. 이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단편적 현상만 보고 내린 섣부르고도 어리석은 결론일 뿐이다. 그럴 리는 없지만 전부 다 양보하여 그 주장대로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쳐도, 자기 민족이 처절하게 패배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일은 세속에는 거의 없다. 성경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들 왕의 허물과 죄악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고, 심지어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이가 그 왕을 심하게 꾸짖는 이야기도 샅샅이 기록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신자들은 미처 모르는 신약성경 기록의 비화 아닌 비화가 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그 절반에 해당하는 13권을, 그것도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망라하는 책들을 바울 사도가 기록했다. 그는 기독교를 맨 앞장서서 반대하고 가장 극렬하게 핍박했던 자였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기독교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로 바뀌어졌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은가? 수제자도 아니고, 예수를 따라 다니며 그 말씀을 받아 적던 필경사도 아니다. 가장 반대하던 자가, 그것도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유대교 율법과 비교해 신학적으로도 가장 논리정연하게 반발했던 자로 하여금 성경의 진수를 기록케 했으니 말이다.
예수 생전에는 신약성경이 기록되지 않았다.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난 구세주라는 것이 초대 교회가 전한 핵심 메시지이자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직접 본 자들과 전해 들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구태여 글로 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점차 그 증인들이 죽고 없어지자 기록으로 남겨야 했고 또 그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가르쳐야 했다. 그 작업을 다른 이도 아닌 그 구원의 메시지를 가장 반대하던 자가 담당했다. 인간이 종교적 계명과 구원 원리를 창안하여 기록하는 경우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당해 종교의 최고 전문가와 석학이 기술해야 한다. 말하자면 유대교 경전을 집필해야 할 바울이 기독교 경전을 저작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그 기록된 내용은 물론 기록된 방식도 비상(非常)했다. 인간의 상식, 이성, 지성으로는 성경의 내용은 물론 그 기록과정도 도무지 고안해 낼 수 없었다. 신약성경의 주 저자인 바울은 그래서 상기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창작물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저자의 마음에 영감을 불러 일으켜서 당신의 절대적 계시를 깨닫게 하고 그대로 기록케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했다. 그 독자로 도덕적으로 선해지고 종교적으로 경건해지게 하는 것보다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근본목적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한다고 했다. 구원 후에는 하나님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신자에게 가르치고 또 그대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은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몇 가지 실증
그 동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를 신학자들이 합리적으로 입증하려 많이 노력해왔다. 여기서 그 모든, 아니 핵심적 변증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 대신에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 보기로 하자. 구약과 신약에 성경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 있음에도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1. 슬로보핫의 딸들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스려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에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품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비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얻게 하되 그 아비의 기업으로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기업을 그 딸에게 돌릴 것이요 딸도 없거든 그 기업을 그 형제에게 줄 것이요.”(민27:3-9)
옛날에는 여자나 아이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몸에서 난 아들마저 그랬다. 로마 시대에는 똑똑한 아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종으로 부리거나 노예로 팔아버렸다. 한국도 첩에게서 난 서자는 아버지 이름도 부르지 못했고 종과 다름없이 취급했지 않는가? 하물며 여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조시대에 여자는 자기 이름 석 자도 없었다. 아직도 이슬람 국가의 여자는 운전도 못하고, 외출 할 때에 눈만 내놓고 전신을 가려야 하며, 운동 시합에는 아예 출전하지도 못하게 하지 않는가?
여자가 나름대로 인간적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대표적으로 여성 참정권이 보장된 것이 겨우 100여 년에 불과하다. 1789년의 프랑스 시민혁명에서 공포된 ‘인간의 권리선언’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은 배제됐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나라는 1893년 뉴질랜드가 최초이며, 민주주의가 가장 정착한 나라들인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에야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됐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헌법부터 여성들의 참정권을 보장했으므로 그 역사는 이제 갓 60년이 넘었다.
상기에 인용한 민수기 구절에 의하면 가나안 입경 전 광야에서 죽은 슬로보핫에게 아들이 없었다.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데 제외될 판국에 이르자 그 딸들이 나섰다. 자기들도 아비 슬로보핫의 이름으로 땅을 유산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의 총회에 참여해 최고 지도자 모세에게 정치적 목소리를 높였다. 모세도 여호와께 기도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아들이 없어서 대신 행한 것이긴 해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행사했고 또 유산상속에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은 셈이다. 이 일이 일어난 시기는 무려 3500년 전이다.
인간 이성은 17,18세기 계몽주의가 태동하면서 근대적 시각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폭압적 왕정이나 종교적 암흑시대에 항거하여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조금씩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겨우 백 년 전에야 비로소 제일 기초적인 면에서부터 여자의 권리도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직도 여성이 상기 성경과 같은 정도의 대우를 받는 곳이 그렇지 못한 곳보다 훨씬 많다. 인간 지성이 지금만큼 밝아진 적은 유사 이래 처음이다. 그럼에도 인간끼리 행하는 꼴은 겨우 이 정도다.
요컨대 3500년 전의 사람들로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해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슬로보핫의 딸들이 그런 요구를 했고, 모세가 그 요구를 들어주었고, 또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일 뒤에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다고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2. 아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이미 말한 대로 옛날에는 아이들도 전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여러 명의 첩에서 난 수십 명의 아들 가운데 부모의 가업은 물론 그 이름을 물려받는 것조차 어지간해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마 귀족들은 심지어 자기에게서 난 아들이 시원찮으면 똑똑한 아이를 양자로 입양해서 집안의 대를 잇게 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부터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한다는 권면이 기록되어 회람될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사실은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
고아와 과부를 먹이기 위해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고 한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과된 의무였다. 법으로 그들의 생계를 보장한 것이다. 쉽게 말해 가장 많은 세금을 거두어서 그 지출용도를 레위인과 나그네를 포함해 고아와 과부의 복지에 한정시킨 것이다. 오늘날에도 없는 법이다. 십일조를 두고 마치 광신자적인 비뚤어진 열성으로 매도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도 없는 법률이 삼천오백 년 전에 제정되었다면 하나님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다 에베소서의 이 구절을 보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더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한다. 프로이드가 아동 심리에 대한 이론을 “꿈의 해석”이라는 책으로 발표한 것이 1899년이다. 그의 주장을 간략하게 줄이면, 어렸을 때 부모(거의 아버지이지만)에게 억압과 학대를 받은 기억이 잠재의식에 남아 있는 자는 성인이 되어도 올바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프로이드의 이 이론을 바탕으로 발달된 현대 심리학은 부모가 아이를 감정적으로 노엽게 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가르치게 되었다. 지능지수(intelligence quotient)보다 감성지수(emotion quotient)를 더 중요시 하게 된 것이다. 물론 둘 다 한 개인의 성숙에 중요하지만 IQ는 선천적으로 더 늘리는 것이 아주 어렵다. 반면에 EQ는 후천적으로 개발이 가능하며 교육과 환경이, 특별히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인간의 그 뛰어난 지성으로 극히 최근에 와서야 인정하게 된, 프로이드가 처음 발표할 때만 해도 반대가 심했음, 진리를 성경은 그보다 근 2천 년 전에 선언하고 있다. 구약의 고아를 돌보라는 권면까지 따지면 그 두 배 되는 옛날이다. 인간의 생각에선 도무지 나올 수 없는 말씀임을 입증하는 또 다른 예다.
3. 욥기의 제 삼의 메시지?
구약의 욥기는 잘 알다시피 졸지에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겪은 욥이 하나님과 그 원인을 알고자 씨름하는 내용이다. 하루아침에 자식들이 다 죽었고, 자신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도져서 차라리 어서 빨리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아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고난에 관해 친구들과 온갖 신학적 토론을 거친 후에 그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가? “주께서 무소불능(無所不能)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2,3)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이 가타부타 절대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권능을 인정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맹종해야 한다는 폭군적인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직접 욥에게 나타나 자연의 너무나 오묘한 이치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었다. 그 모든 이치에 대해 욥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첨단 과학도 자연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지 않는가?
이 또한 전지전능한 하나님께 군말 하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오묘한 이치를 전혀 몰라도 자연이 아름답고 생동력이 넘치며, 또 그 보존과 번성이 스스로 노력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자연의 배후에 마찬가지로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욥은 성령의 간섭으로 확신하게 된 것이다. 고통에 대한 원인은 물론, 구체적으론 몰라도 고통의 배후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분명 있다고 진심으로 인정하고 항복한 것이다.
욥기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외에 제 삼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세 친구들은 욥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그의 죄나 허물에 돌렸다. 역으로 하나님을 잘 믿고 죄를 짓지 않으면 복을 주신다는 뜻이다. 반면에 욥기가 시종일관 계시하는 바는 그 논증이 틀렸다는 것이다. 욥에게 벌 받을 직접적 원인이 없는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쳤지 않는가? 실제로 하늘에서 사단과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걸고 내기한 것이 발단이었다. 말하자면 욥기는 기복주의적 신앙은 아예 처음부터 부인하고 그 내용을 전개해나간 것이다.
오늘날도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를 반드시 바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 그 바친 만큼 복을 받는다고 약속한다. 심지어 기독교계 안에서조차 기복주의적인 신앙이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욥기는 바로 그런 신앙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욥의 하나님은 인간의 공적과 상관없이 당신의 거룩한 뜻대로만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다. 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도 당신만의 오묘하고 선한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욥기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물경 사천 년 전인 이스라엘의 족장시대다. 그 당시로는 도무지 인간이 지어낼 수 없는 신학사상이지 않는가? 오로지 하나님의 영이 욥에게 간섭하여 깨닫게 해주셨고 또 기록케 하셨던 하나님 그분만의 절대적 진리다.
감동 대신 변화를 주는 책.
대표적인 성경 내용 셋을 들어서 성경이 결코 인간이 지어낸 사상이 아님을 변증해 보았다. 이런 예들은 얼마든지 더 들 수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욥기가 말하는 바가 인간의 공적과 상관없이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야말로 그 진리의 가장 대표적이자 최고로 정확히 드러난 예이지 않는가? 그분은 인간의 너무나 연약하고 어리석음을 아실뿐 아니라, 죄와 사탄과 사망에 묶여 신음하는 모습도 너무나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께서 그 죄 값을 전부 감당하셨다. 십자가가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 어리석어 보여도 그 안에 하나님만의 놀랍고도 오묘한 구원의 지혜와 능력이 온전히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 복음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바 그대로 일반인들이 온전히 믿기는커녕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한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르렀으니 일렀으되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4,15)
이젠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욥기가 말하는 바는 물론 이사야의 예언과도 동일하다. 아니 성경 66권 전체가 실은 그러하다. 그 모두가 예수님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천오백 년이 넘는 동안에 직업, 지성, 신분, 처지 등이 각기 다른 저자 40 여명이 동일하게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한 번의 편집회의도 연 적이 없으며, 아예 열 수도 없었음에도 일관되게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말하고 있다. 그 배후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성경이 말하는바 대로 믿지 않는 자가 믿는 자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서두에 말한 바대로 황당무계하게 지어낸 이야기 같은데다 도무지 종교의 경전 같지 않게 포르노와 푹력물이 뒤범벅되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독자에게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단적 예로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배경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십자가 예수를 인정하면 그분이 가르치고 성경이 말하는 바가 전부 옳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말로 지금껏 살아왔던 생활방식 전부와 가치관을 몽땅 바꾸어야 하는데 그것이 싫고 두려운 것이다.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19,20)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의 간섭을 통해 성경의 독자에게 임하면 자기의 악한 행위가 빛에 드러난다 할지라도 두렵거나 싫지 않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사랑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지금껏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하늘을 소망하는 가치관이 생기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한 개인의 전인격체가 성경을 통해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다.
성경은 그래서 인간에게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감동을 주는 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차 강조하지만 포르노, 폭력물,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등을 포함시킬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 것으로 재미는 줄 수 있을지언정 감동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재미나 감동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사람을 완전히 뒤집어엎어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는 책이다.
성경을 읽는 독자의 반응은 오직 둘로만 나뉜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책이라고 내던지던지, 아니면 그 안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되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발견하든지 말이다. 또 그렇게 완전히 뒤집어진 인물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의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날마다 성경을 통해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렇게 변화된 믿음의 증인들은 구름 아래 허다히 많다. 이미 말한 대로 예수의 극렬한 박해자에서 가장 열렬한 옹호자로 바뀐 바울이 핵심 교리를 기록했기에 성경을 읽는 자들도 그의 경험에 동참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는 배경에도 당연히 하나님이 계시기에 성경은 그분의 말씀인 것이다.
8/8/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