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제임스(KJV) 성경만 옳다고 합니다.

조회 수 9152 추천 수 7 2013.11.26 21:5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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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KJV) 성경만 옳다고 합니다.


[질문]


저는 교회 전도사인데 교회의 한 청년과 대화를 하던 중 답답하고 마땅히 조언을 얻을 분이 없어서 글을 남깁니다. 독립침례교회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문제인데 기성교회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혹은 영문판 다른 버전들은 애초에 사해사본에서 시작되었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에도 구원에는 문제가 없지만 성도를 건강히 자라게 하는 것은 다르기에 킹제임스를 보고 그것을 활용하도록 주장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고집적인 사고와 기성교회와 성경의 번역본 자체를 문제 삼는 바로 그것이 도리어 위험한 사고라고 지적했습니다. 구원의 진리에 대한 부분에 지금의 번역본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킹제임스 버전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전혀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요?

[답변]

이단만 고집불통이 아니다.


우선 제 개인적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근 30년 전에 완전 불신자 집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믿었던 평신도(이런 명칭을 어쩔 수 없이 사용함을 양해 바람) 시절에 어느 젊은 목사님과 영어성경으로 일대일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역자들조차 영어 성경으로 공부하는 것이 생소할 때입니다.

그 때 사용한 역본은 이런 저런 말들이 많지만 어쨌든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NIV였습니다. 그럼에도 저에겐 성경을 보는 눈이 아주 넓어졌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 비해 더욱 깊이 있게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본격적으로 성경을 배우고 싶다는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영어로 배워 은혜가 더 된다면 원어로 즉, 신학을 전공하면 더 말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10여년 후에 목사가 되었으며, 그 얼마 후에 저 또한 가깝게 아는 분에게서 질문하신 것과 똑 같은 경우를 겪었습니다. 여러 합리적 근거로 설득해봤지만 실패했습니다. 물론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이 당시까지의 가톨릭 성경의 오류를 수정했으며 영어번역본 중에는 아주 잘 된 것으로 학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 히브리 원어에 비해, 또 당시 상황이나 문맥에 따라 부족한 부분도 있음이 사실이라고 말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제 개인적 경험을 먼저 말씀드리는 까닭은 제가 드리는 답변대로 그 청년을 설득해야 별무소득이 될 것을 각오하시라는 뜻입니다. 논리적 설득과 변증이 유효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단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이론, 교리, 사상이 가장 월등하다고 여길 때에는 다른 어떤 대안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질문을 주셨기에 몇 가지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질문하신 내용 중에, 질문자가 아니라 예의 청년의 주장에서, 불합리한 내용이 있어서 간단히 지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기성교회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혹은 영문판 다른 버전들은 애초에 사해사본에서 시작되었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잘못된 의견입니다. 사해사본은 1947년에 최초로 발견되었고 지금도 해석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최초로 1882 년경부터 일부 번역되다가 신구약전서는 1938년에 번역 완간되었습니다. 사해사본이 발견도 되기 전입니다.

참고로 성경의 최초 외국어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70인역은 BC 3세기경에 이뤄졌습니다. 신구약성경 전체를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한 Vulgate는 405년, 위클리프가 최초로 영어로 번역한 것은 1385년, 마르틴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1522년, 그리고 킹제임스 흠정역은 1611년에 이뤄졌습니다. 한글을 비롯한 다른 성경 번역이 사해사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주장입니다.

사해사본이 갖는 신학적 역사적 중요성은 현재 잔존하고 있는 최고로 오래된 구약의 필사본보다 근 천년이나 앞선 데도 현재의 성경과 내용에서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의 필사가 오류 없이 정교하게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말씀에 단 하나라도 가감(加減)이 없게 하려고 최대한 정성을 들인 결과입니다.

성경 안에도 해석의 차이가 있다.  

사해사본의 예에서 살펴보았듯이 번역이 아닌 필사의 경우는 천년이 지나도록 오류 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다른 말로 성경의 최초 원본이 다 소실되었어도 히브리어 구약과 헬라어 신약 성경의 원문은 원래대로 보존되어 왔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번역본입니다. 번역에서 완전한 번역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있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자 억지입니다. 흠정역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역에 성령의 역사가 없다거나, 신학적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선 성경이 기록된 당시와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는 것 사이에는 시공간의 차이가 큽니다. 저작 당시의 정확한 의미를, 그것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하여서 온전히 담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언어가 다르면 문화, 관습, 제도는 물론 사고, 감성, 나아가 사상과 철학까지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한 문화권의 언어가 다른 문화권 언어의 의미와 어감과 적용 등에 완벽하게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간단한 예로 한국의 판소리를 최고 전문가를 동원해 최선을 다해 영어로 번역해도 한국인이 느끼는 의미와 감동을 외국인이 똑같이 느낄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자체에 번역의 다양성과 비근한 예가 있습니다. 바로 사복음서입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동일하게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했는데도, 심지어 같은 사건에서마저 지엽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번역이 아니고 저작임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잘못된 인도도, 저자의 오류나 착오도 아닙니다. 역사적 실화를 후대 사람 네 명이 기록할 때에 상이(相異)한 부분이 필연적으로 생긴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러합니다. 약 30-40년 전에 일어난 마을의 홍수를 노인 네 명이 회상했다고 칩시다. 어떤 이는 사망자가 다섯 명이라고, 또 다른 이는 여덟 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건망증이나 치매가 걸리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한 명은 시체가 완전히 발견된 자만의 숫자를, 다른 이는 그 다섯 명에다 실종되어 사망처리가 된 세 명을 합쳐 말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끼리 또 한 복음서 안에서 앞뒤 기록을 잘 살피고 대조하면 합리적이고도 타당한 해석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복음서를 네 권이나 남긴 것은 그런 기록상의 차이점들을 상호 대조해서 극복할 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를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창세기 외의 모세오경 중 네 권이 중복해서 설명하고, 이스라엘 역사도 열왕기와 역대기를 통해 두 번씩 진술하는 까닭입니다. 선지서들의 핵심주제는 거의 같고 구체적인 시대 상황만 조금 다르다 해도, 상호 비교해 연구할 때에 더 심오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역본들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서로 비교 대조하면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넓고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영화 평론을 하나만 읽는 것보다 넷을 읽고 영화를 보면 숨겨진 의미를 놓치지 않고 더 깊은 재미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또 네 의견을 대조 종합하다 보면 자기 특유의 견해와 감동이 생성됩니다. 반면에 평론 하나만 읽고 영화를 보면 그 평론가와 일치하는 감상만, 다른 말로 다른 이의 생각만 그냥 답습하게 될 뿐입니다.  

현재 크리스천이 읽는 모든 성경이 사실상 번역본입니다. 그런데도 서로 자기 번역본이 최고로 옳다고 주장하니까 신자들이 혼동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인 것은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발달해 성경 번역본 전부를 쉽게 비교 참조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가 아니라도 역본들을 대조하여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러면 이해와 감동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구원은 물론 성화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골고다 십자가 오른 편의 강도는 성경을 전혀 읽지 않았어도 구원을 얻었습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2,43) 초대교회 교인들이 거의 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임을 믿을 때에 성령이 역사하여 영생을 얻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신약성경, 그것도 교리서의 대부분을 저작한 바울마저 전도는 자기가 전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말로 전해야 할 까닭은 전하지 않고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롬10:8-15)

예의 학생도 구원을 KJV 성경이 독점하지는 않는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성화는 KJV로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것입니다. 성화를 이 땅에서 완성시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원한 운명이 성령에 의해 결정되는 구원을 얻는데 다른 성경에 문제가 없다면, 이 땅에선 누구나 미완성으로 끝날 성화에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리고 성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며 실제로 성령이 이끄시는 씨름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엡6:10-13)

신자가 살아가야 할 삶은 단순히 도덕적 삶이 아니라 마귀의 궤계를 이겨내는 영적 씨름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기록된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성경 자체가 증언합니다. 무시로 기도하고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비록 말씀이 직접 마귀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인 검으로 비유되었어도(엡6:17) 전신갑주의 일부입니다.

그 말씀의 검을 사용할 때도 반드시 기도하여서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먼저 알 것은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0,2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성경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만 해석, 적용,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올바른 성화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법에 자주 넘어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다고 합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나니, ...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4) 성령을 좇아 행할 때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고 즉, 성화가 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바꿔 말해 만에 하나  KJV 성경만 옳다고 해도 그 성경을 읽고 순종하려 노력해도 성령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면 성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성화를 이루는 성경 계명과 요구는 거의 도덕적인 주제이기에 번역 상에 차이가 조금 있다 해도 결정적 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화에서 문제는 오히려 어떤 성경을 읽든 피 흘리기까지 순종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도 자기 힘과 믿음만으로는 되지 않기에 성령을 의지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KJV 끼리도 싸운다.  

KJV 역본 자체에도 몇 가지 부족한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KJV 번역 시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전만 교본으로 삼아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원전과 함께 가톨릭의 라틴어 불게이트(AD4세기)를 비롯해, 그것의 영어번역판인 Tyndale(1530), Coverdale(1535), Matthew(1537), The Great(1539), Geneva(1560), Bishop Bible(1568)등도 함께 참고했습니다.

물론 이전의 오역을 바로 잡겠다는 동기와 충분한 노력은 있었지만 KJV가 이전 번역본들과 따로 떨어져 완전히 독립된 하나의 새 번역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앞선 여러 번역본들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KJV도 생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KJV가 옳다면 번역의 맥을 이어주었던 이전의 다른 번역본은 물론 KJV 이후의 KJV를 참고 삼은 다른 번역본들을 무조건 사탄의 번역이라고 매도할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KJV 번역본 내에서도 번역의 오류가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장 쉬운 예로 KJV 의 자체 서문에서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번역했다고 밝혔듯이, 원래 의미와  다른 일상 영어 단어로 교체한 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어로는 한 단어이나 여러 영어 단어로 바꾸거나, 반대로 원어는 여러 단어이나 영어로는 한 단어로 통일시킨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셋째로, 무엇보다 KJV 옹호론자들 사이에도 번역에 일치를 보지 못합니다. 또 KJV 번역본들 사이에 우열을 다투다 못해 상대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합니다. 한국의 경우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자 피터 러크만을 따르는 계열에선 이송오 목사가 번역한 '한글킹제임즈성경'(KKJB)을, 반 러크만 계열에선 정동수 교수가 번역한 '킹제임즈흠정역'을 각기 바른 번역이라고 다툽니다. 그럼 어떤 번역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인정한 셈이지 않습니까?      

필자도 영어 성경을 참조해야 할 때에 일차적으로 NKJV를 볼 정도로 그 번역의 우수성을 인정합니다. (KJV는 고어체가 많아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 읽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만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NASV, NRSV, NIV 등도 함께 봅니다. 무엇보다 컴퓨터로 성경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면 일목요연하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KJV만 옳고 나머지는 참조하지 말라는, 심지어 사탄이 개악한 성경이라는 주장에는 절대 찬동하지 않습니다.

KJV만 옳다고 하면 고대 그리스도인들이 70인역을 히브리어 구약성경보다 완전하다고 여겼거나, 로마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라틴어 벌게이트를 원어성경보다 완전하다고 주장하면서 The Bible이라고 대문자로 표기해 왔던 것과 동일한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KJV 이외의 성경을 사탄이 변개한 성경으로 매도하면 다른 성경을 보는 이에게는 하나님이 올바른 말씀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아니면 사탄이 다 막았다는 결론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을 기록 보존 번역케 하는 역사적 과정과 신자 개인이 성경을 읽는 데에 간섭하는 성령의 능력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성령 안에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만 머리로 삼아 그분께 붙어서 함께 지어져 가라고 명합니다. 이는 예수님 이후의 모든 세대의 모든 성도의 모든 신앙생활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성경의 번역과 해석과 적용에도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여러 역본들을 함께 비교 대조하면 번역의 오류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화는 성경이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신자가 순종할 때에만 이뤄집니다. 성화에 대한 판정관도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어떤 번역본을 읽었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어떤 성경이든 기도하면서 성령의 깨우침에 따라 십자가 진리에 자신의 전부를 과연 온전히 헌신했는지 신자의 중심만 보실 뿐입니다.

11/18/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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