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49:37-39) 하나님의 광대하심으로 범사를 판단하라.
새벽기도설교(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엘람으로 그의 원수의 앞, 그의 생명을 노리는 자의 앞에서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재앙 곧 나의 진노를 그들 위에 내릴 것이며 내가 또 그 뒤로 칼을 보내어 내가 나의 보좌를 엘람에 주고 왕과 고관들을 그 곳에서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말일에 이르러 내가 엘람의 포로를 돌아가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49:37-39)
마이너스 무한대의 악함
예레미야는 유다에게 처음에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계속 권면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반드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해준다는 약속도 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증표로 밭을 사라고까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주었으나 유다는 끝까지 듣지 않고 결국은 멸망했습니다. 남은 자들에게도 애굽으로 피신하지 말라 그곳까지 바벨론이 찾아가 멸망시킬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그마저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선지자는 이제 열방에 대한 심판을 선고합니다. 유다를 괴롭혀왔던 주변의 대적들에게 순서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당연히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도 50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의 다메섹, 게달, 하솔, 엘람 같은 소국의 멸망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이 무차별적으로 무자비하게 심판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그동안 당신의 백성들을 괴롭혔고 결국에는 멸망케 한 것에 대해 앙갚음하는 것 같습니다. 또 그래서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심판에 능한 무서운 신으로 오해합니다.
신앙의 첫 출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사면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이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만큼의 우열도 가릴 수 없는 똑같은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구태여 수치로 표현하자면 그 악함은 마이너스 무한대입니다.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더 선하다는 의미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정확히 깨닫고 철두철미 각성 회개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기와 일대일의 관계에서 자신에게 선한 구석은 단 하나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모든 신자가 같은 고백을 하니까 결국 모두가 똑같이 영적 절망을 겪었다는 즉, 영적 시체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를 택해서 구원할 것인지 심판할 것인지는 응당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그 택함에 대해서도 단 한마디의 항변, 변명,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인류 전체에 확장하면 전 세계의 전 민족이 지금도 하나님이 언제든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절대적 진리가 신앙의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하며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에도 잊지 말고 적용해야 합니다. 무조건 하나님께 복종 내지는 맹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멸망치 않고 아직도 당신의 긍휼 안에서 생존하고 있음이 그분의 플러스 무한대의 은혜임을 절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이 마치 유다의 멸망을 기다렸다가 유다를 괴롭혔던 대적들을 몽땅 심판하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유다만 편애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열방이 아담의 후손이라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당신을 알게 하여서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만이 당신의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올바른 접근
따라서 열방을 심판하는 데는 몇 가지 공통되는 기준과 근거가 있습니다. 먼저 열방 모두가 자기들 죄악 때문에 심판을 받습니다. 윤리적으로 타락했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자기 나라 안에서도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핍박받아 소외되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자신들의 죄악만으로 심판받는 데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죄악 중에는 유다를 대적하며 훼방한 죄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바벨론이나 블레셋처럼 그런 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징계하는 도구로써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그들의 죄악 때문에 심판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않았더라도 자기들 죄악만으로 심판을 받고도 남았다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가 없었으면 예수 십자가 구원은 성립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십자가라는 드라마에 감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역할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개인적인 죄로 심판받은 것입니다. 왜 억울하게 죽었어야 했는지 의심은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신자가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아직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잘 모른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은 또 열방에게 회개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했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직접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는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한들 성경이 없어서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이 말하는 대로 자연만 살펴봐도, 인간의 양심과 이성으로 진지하게 묵상만 해봐도, 우상은 실존하지 않고 천하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자 통치자 한 분이 살아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의 불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들의 불신앙을 핑계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여기고 오로지 현실의 안락과 형통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추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만 준 것이 아니라 일반 은총도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먹고 살 수 있는 것들을 무료로 주셨고 실제로 불신세상이 더 풍족하게 잘살고 있습니다. 열방들도 당신만의 사랑으로 품고서 긍휼을 베풀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탕자의 비유의 아버지처럼 그들이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그분이 먼저 문밖에 나가서 종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열방을 심판한 것은 그런 일반 은총에도 감사치 못하고 당신을 끝까지 완악하게 거역한 죄악이 당신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심판의 시기와 방식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따라 정해집니다. 하지만 무조건 독선적인 결정이 아닙니다.
훨씬 더 넓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아주 긴 역사의 여정의 맥락 안에서 따져봐야 합니다. 모든 국제 정세도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십니다.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는 여건과 정세와 영적 흐름까지도 그분은 합력하여서 당신의 뜻을 달성합니다.
심지어 사탄의 세력이 맘껏 설치도록 허락하시고도 당신의 주권과 섭리는 완벽하게 실현됩니다. 그분은 인간이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광대하신 분이므로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그 광대하심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를 당신께서 계획하신 한 가지 일만 이루려 주도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당신의 선지자들 통해 예언하신 그대로 예수님의 초림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주님이 그 때 그 곳에 반드시 그런 모습으로 오셔서 그 사역을 이루시도록 모든 열방까지 통치하셨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주님의 재림 즉, 인간 구원과 심판의 완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모든 나라의 모든 일을, 심지어 트럼프나 김정은까지 들어 사용하여서, 주관하십니다.
신자가 취할 믿음의 태도
이런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특별히 신자가 취해야 할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자신은 개미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부터 겸허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연약 불완전하고 무지하고 무능하다는 점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니 혼자 있을 때에도 진심 어린 고백으로 속에서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신자 개인이 점유 활동할 수 있는 시공간과 그로 인한 영향력은 너무나 미약하고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물론 그런 보잘것없는 신자 한 명도 하나님이 귀하게 쓰실 수 있지만 여전히 인류 역사 전체에 비하면 작은 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항상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이웃 사람들 앞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신자만 억울하고 손해 보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상상도 뛰어넘어 광대하신 분인데 그에 비해 너무나 미약한데 어찌 겸손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그분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이며 믿음이 없는 셈입니다.
신자도 그냥 힘든 문제 해결해 주시는 그분의 권능에만 초점을 맞추면 제대로 기도 응답이 안 되면 그분의 권능마저 의심합니다. 혹시 나에게 기분 상한 일이 있는지 곤혹스러워집니다. 아예 그분의 권능만 더 많이 더 빨리 받아 내려고 어떤 면에선 영적으로 일부러 낮추는 비굴하고 치사한 면도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식으로 흥정해보겠다고 덤비거나 그런 흥정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비겁함과 치사함의 반증입니다.
본문 39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은 말일에 엘람의 포로들로 돌아가게 해준다고 약속합니다. 그 전에 열방 모두를 심판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멸절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림 때까지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 유다와 마찬가지로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해준다고 합니다. 엘람 왕국이 실제로 재건된 것이 아니고 말일에 그러니까 그들도 주님의 초림은 물론 재림의 구원에서 제외된 백성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누구나 쉽게 플러스 무한대라고 인정할 수 있고 또 자연스레 감사할 수 있습니다. 기도 응답이나 좋은 일이 이미 생겨서 그분의 권능을 받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 전혀 이해할 수 없고 고달프기만 한 상황 가운데도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모르는 오묘하고도 완벽한 섭리로 선으로 이끌어가는 그분의 사랑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여건과 상황은 비록 마이너스 무한대일지라도 그분의 사랑은 플러스 무한대임을 확인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은 갖지 못하는 신자만의 특권이자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처럼 일시적 상대적 불완전한 이성으로, 특별히 감정으로 앙갚음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분의 징계나 심판에 인간 쪽의 차고 넘치는 원인이 없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분의 권능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기지 않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그분의 징계와 심판 속에서도 그분의 사랑이 무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하면 범사에 저절로 겸손해지고 기꺼이 자발적인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됩니다.
12/1/2018
아멘 !!!
창세기 18장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시편 103장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열왕기상 16장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시므리가 왕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안 사람들을 죽이되
남자는 그의 친족이든지 그의 친구든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여호와의 말씀 같이 되었으니,,,,,,,,
잠언 16장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마가복음 9장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마가복음 14장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누가복음 22장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고린도후서 10장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고린도후서 12장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로마서 8장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4장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1장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요한복음 14장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