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2:2-4) 쉬지 말고 기도하고 있는가?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느2:2-4)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간 느헤미야는 바사의 아다사스다 왕의 신임을 얻어서 술 맡는 관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고 온 조국의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1:3)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연히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술 관원으로서 너무나 위험한 행동입니다. 자칫 그 자리에서 목숨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무소불위(無所不爲)한 고대 왕들의 면전에선 신하들이 절대로 슬프거나 염려하는 기색을 내어선 안 됩니다. 자칫 왕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 오해할 수 있고 그 전에 왕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어서 심하면 즉시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에 혹시 독이 들었는지 먼저 시음해야 하는 술 관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염려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으면 독살까지는 몰라도 뭔가 왕을 모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 받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 바사제국의 신하, 그것도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입장에서 아무리 느헤미야의 조국이지만 자기들이 정복한 식민지 이스라엘의 문제로 염려한다면 자칫 반역죄로 문초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가 자기 고민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그의 안색이 안 좋음을 단번에 알아보고 이유를 따져 물었습니다. 포악하고 성격이 급한 왕이라면 그 자리에서 술잔을 쏟고 바로 죽이거나 감옥에 쳐 넣었을 수 있습니다. 왕이 그 이유를 먼저 물어준 것은 느헤미야가 평소에 왕에게 아주 큰 신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느헤미야로선 왕이 혹시라도 오해할지 몰라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먼저 경하의 말을 올립니다. “만세수를 하옵소서” 즉, 오래오래 사시라는 것은 자기가 먼 길을 떠나거나 먼저 죽을 때에 하는 인사말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곡해하셔서 자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더라도 달게 받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또 “더 이상 바사 제국에 살기 싫어서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오해하실 수 있겠지만 저로선 어쨌든 왕께 반드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정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조국의 형편을 아뢰고 돌아가서 성을 중건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모든 상황이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에4:16) 하고 사전 약속 없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간 것과 동일합니다. 왕은 야단이나 의심은커녕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고 했습니다. 성경은 또 그 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고 진술합니다. 평소 왕후도 그를 좋게 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는 것은 느헤미야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가 요구하는 사항은 무엇이든 전부 들어줄 테니 안심하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을 중건해도 절대로 반역을 도모할 자가 아니라는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잠시 휴가를 주지만 일이 마치면 곧 돌아와야 한다고 오히려 왕이 간청을 한 셈입니다.
귀환에 대한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자 느헤미야는 돌아올 “기한을 정하고” 구체적인 도움을 청합니다. 첫째, 서편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아무 장애 없이 그 지경을 통과해 이스라엘까지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둘째는 성벽과 성을 중건할 재료들을 조달할 수 있는 조서도 내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왕은 그가 구하지도 않았는데도 군대 장관과 마병을 동행케 하여 여행길을 안전히 지켜주겠다는 약속까지 합니다.(2:9)
참으로 대단합니다. 느헤미야의 성실함이 너무나 돋보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섬겼어도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수로 갇혔어도 보디발과 간수의 신임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윤리 기준은 정복자의 나라에서 신하로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매국노요 반역자로 여깁니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자결하는 것이 최고의 의라고 칭송하지만 느헤미야와 요셉은 그 정반대로 즉 최악의 죄인으로 살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그 전에 범사를 하나님이 거룩하게 통치하시고 신자가 처한 모든 여건과 사건을 그분이 주관하시기에 언제 어디서나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거기다 느헤미야 당시로선 바사제국이 바로 선교의 현장이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를 전혀 알지 못하기에 자신의 삶을 통해 그들에게 유일하신 창조주 참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보여야 합니다. 다니엘의 영향으로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한 동방박사가 바사로부터 왔다는 해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쉽게 놓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4절 끝부분의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입니다. 잠시 순간적으로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왕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헤미야 본인도 알고 있었지만 술 관원이 수색을 띄고 있는데다 이방의 왕이 이스라엘을 염려하는 자기 고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랐던 것입니다. 자칫 왕이 감정이 상하면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었고, 또 돌아가서 성을 중건하게 해달라는 요청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음도 그로선 충분히 예상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적인 기도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8절후반) 또 군대까지 부쳐주었다고(9절 초반) 고백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한마디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살전5:17)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사도 하루 종일 예배당에서 무릎 꿇고 정식으로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속으로나마 “주여 도와주십시오.” 혹은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도 순간적으로 “저의 간청에 왕이 오해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열리게 해주십시오. 그러지 않더라도 저의 모든 것 생명까지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가 평소에 왕과 왕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지 못했다면 그런 기도만 했다고 해서 왕이 허락해줄 리는 없습니다. 그 반대로 왕의 신임만 믿고 나태하고 교만하게 속으로 잠시라도 기도하지 않았다면 왕의 기분이 상해 사태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수 있습니다. 흔히들 느헤미야는 단순히 손에 창을 쥐고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으로만 즉, 현실에 더 충실한 종으로 이해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쉬지 말고 자신의 실력을 쌓으면서 성실하고도 세밀하게 현실과 맞서 싸워나간 종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보수우파는 기도와 믿음이 만능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기독교 진보좌파는 현실에서의 선한 삶만 아주 강조합니다. 성경은 지금 그 둘을 병행하라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느헤미야를, 실은 성경의 모든 인물이 그러하지만. 들고 있는 것입니다. 크게 두려울 때에는 하나님께 순간적으로 묵도해야 합니다. 반면에 평소에는 정말로 정직 성실 청렴 신용 실력을 쌓아서 반드시 세상 불신자로부터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최소한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인정은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쉬지 말고 기도하며 쉬지 말고 성실히 살아야 합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은 평소에 불신세상을 오히려 충실히 섬기는 신자의 기도를 잘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아무리 찰나적인 간단한 기도라도 현실을 뒤집고 바꾸는 큰 권능이 실현됩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의 왕이 여호와의 도성을 중건하는데 최선 최고의 협력을 보장했지 않습니까? 단순히 뜨겁게 떼쓰듯이 오래 하는 기도가 능력의 기도가 절대로 아닙니다. 신실한 믿음으로 현실에서도 열심히 사는 자의 기도가 가장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의 총량과 하나님께 요구하는 내용이 훨씬 적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제대로 된 문장이 안 나오는 너무나 위급할 때는 “주여! 주여!”라고 외치기만 해도 됩니다. 아니 평소에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성령님이 내주 동행하신다는 사실만이라도 잊지 않아도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다윗이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본문의 느헤미야처럼 쉬지 말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주 군급할 때에 느헤미야처럼 잠시 묵도했습니다.(삼상30:6)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2-4) 다윗의 이 고백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시기에 꿰뚫어 아십니다. 생각과 행위와 혀의 말에서 모르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요셉과 느헤미야와 다윗처럼 그 셋이 일치하는 자의 기도만, 아무리 순간적 묵도라도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3/13/2019
목사님. 너무 잘 읽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오해를 해결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큰 통찰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