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5:19) 이 땅에서 가장 불쌍해야만 신자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육체적 죽음 이후의 인간의 상태가 어떻게 될지 많은 철학자와 종교가들이 고뇌를 했습니다. 기독교만이 마지막 날에 신령한 육체로 부활함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이자 첫 열매로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통과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고(20,22절),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26절)
바울은 신자의 소망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하다고 선언합니다. 죽음 이후의 구원과 마지막 날 육체의 부활이 없다면 이 땅의 삶으로 인생은 종결 짓게 됩니다. 그럼 가장 현명하게 사는 자는 법에 저촉되어 형벌을 받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의 쾌락을 즐기며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린도 사람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32절)라는 신조로 살고 있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면 계속 죽지 않으니까 육체의 안락보다 영혼의 고결함을 위해 살며 주님이 맡긴 소명에 헌신하자”가 예수 믿는 신자의 인생관이 되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또 역으로 바꾸면 죽기 전까지 이 땅의 신자의 인생은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에베소에서 맹수와 맞서 싸우는 것 같은 큰 고난도 겪었고 스스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선언했습니다.(31,32절)
신자라면 바울처럼 선교사가 되어서 어떤 핍박도 감내하여 순교의 자리에까지 가야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생이 전부가 아니고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현실적 풍요는 아예 포기하고 절제 검소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으라고 명한 적도 없습니다. 현실의 풍요 자체가 악이거나 악의 근원이라고 보는 것은 다른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이생이 전부가 아닐 뿐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스스로 가난 고난 핍박을 찾아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고결하게 사니까 시기와 미움을 받았고, 특별히 로마 황제 같은 인간이나 그들의 만신전에 있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아서 죽음에 이르는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요컨대 부활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주님 명하신대로만 살다보니 당시 상황에 따라 순교가 필연적 결말이 된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활은 확보했으니 남은 것은 이 땅의 풍요뿐이라고 여기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나와 내 가족이 소망하는 현실적 목표를 이루거나 최소한 나쁜 일만 안 생기게끔 해달라는 두 가지 기도제목만 갖고 있는 신자들입니다. 혹시라도 그 기도응답이 안 되거나 지체될까봐 교회생활은 성실히 수행하면서 말입니다.
스스로는 믿음 좋은 신자라고 여길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불쌍하거나, 아예 당신께서 알지도 못하는 신자인지 모르고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바울처럼 어리석고 이상하게 살고 있기에 자기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여겨져야만 참 신자입니다. 교회생활 하나 빼고는 모두가 자기들과 똑같다고 여겨져선 당연히 신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6/1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