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3:2(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눈 지그시 감고 목소리 가다듬고 가사 음미하며, 복음성가 ‘부흥’을 불러봅니다. ‘성령의 불, 부흥의 불길, 은혜의 강물, 주의 영광’ 등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뉘앙스의 용어들이 번갈아 나옵니다.
떠오르는 상념을 정리해 봅니다. 고양(高揚), 현시(顯示), 다다익선(多多益善) 등의 이미지가 그려질 것입니다.
성도 개개인에게 적용해 봅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아멘! 할렐루야!’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고 끊임없이 방언 기도하는, 자타가 공인할 수밖에 없는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민화(聖民化) 소원입니다.
교회 집단에 적용해 봅니다. 교회규모가 자꾸 커지고 성도들의 숫자가 자꾸자꾸 늘어나서 결국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국화(聖國化) 염원입니다.
성민화든 성국화든, ‘가치 있는 존재’의 개념입니다. 인간의 본성적 욕구인 상향성(上向性)(보다 나아짐으로써 가치가 높아지는 것) 원리에 부합되는 인식입니다.
하향성(下向性)을 근본으로 하는 성경 진리와 달리, 모든 세상종교의 기본정신인 상향성은, 언제나 ‘현재보다 나아지는 가치 증대’의 관념입니다.
5억 재산이라면 10억으로 늘어나야 하고, 천만 성도라면 삼천만으로 증가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됐든 ‘축소나 감소’는 가치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결국 복음성가 제목이 되었든 종교용어가 되었든, ‘부흥’이라는 단어는 ‘상향성’ 원리와 맥을 같이 하는 ‘가치 증대’의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부흥’은 이와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한글과 히브리어 단어에는, 그냥 간과하고 넘어가기 쉬운,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곰곰이 음미해 보면 전혀 새로운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글사전은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영어 renew도 ‘재생’의 뜻입니다).
학자들은 히브리어 ‘하예흐’가 ‘살다, 생명을 유지시키다. 소생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하야’에서 파생된 말로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다시 살린다.’의 뜻이라 설명합니다.
한글이든 히브리어든, 부흥 이전의 원상태(原狀態)를 유념해야 합니다. ‘쇠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은 죽음과 진배없다는 뜻입니다. 거의 ‘가사상태’라 할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성경의 ‘부흥’이란 ‘가사상태가 되어야 시작되는 어떤 현상’입니다. 부흥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맨 밑바닥으로부터 야기되는 그 무엇(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한 알의 밀”(요12:24) 교훈을 다시 살펴야 합니다. 만약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을 부흥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어야 ‘부흥’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부흥’의 유일한 요건이 식별되었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부흥이 아닙니다. 위에서 왜 ‘부흥’을 ‘가사상태’와 연계시켰는가에 대한 근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흥의 명확한 판정기준’을 규정해야 합니다. ‘어떤 신앙현상의 촉매역할을 수행한 인물이 보상 또는 이득을 얻느냐 아니냐.’ 하는 점이 진정한 부흥 여부를 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만약 겨자씨만한 이득이라도 얻는다면 이는 성경의 부흥이 아닙니다. 촉매 밀알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자신은 그 효과(성과)를 조금도 누리지 못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부흥은 ‘악화(惡化=가사상태=지금보다 더 나빠지는 것)로부터 유기되는 천국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태보다 더 나빠지지 않으면(죽지 아니하면) 결코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성경의 부흥은 주님의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과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맺어졌습니다. 주님은 맨탕 손해만 보셨고 이득은 몽땅 제자들(성도들)이 보았습니다. 이게 부흥입니다!
이 진리를 확실히 알았던 사도 바울이기에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이러이러한 이득을 누렸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인 “수년 내 부흥”을 갈망했던 하박국 선지자도 자신의 생전에 ‘부흥’을 맛보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의 ‘부흥’이라는 단어에 이러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데, 이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뭐가 됐든 커져서 얻는 게 있으면 부흥이다.’라고 한다면 너무 허무합니다.
그러므로 부흥을 ‘나는 생생히 살아있으면서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대단한 인정과 대접받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이는 민망한 일입니다. 게다가 그때 발생하는 짭짤한 이득을 자기 자신이 누리겠다고 설친다면 이는 비극입니다.
한글성경에 단 한 번 기록된 “부흥”(한글)이라는 말은 무거운 단어입니다. ‘명예와 부와 지식과 능력과 무슨 자랑이라도 전부 포기한 자’(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분명히 진 자)가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는 그런 단어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무심코 사용해 왔던 ‘부흥’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런 부흥은 없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앞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경솔히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다시금 주님의 십자가 앞에 제 자신을 철저하게 되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끄시는대로만 따르기를 소원하고 헌신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