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 사정은 과부가 알고 홀아비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으면 이해가 쉽다는 동병상련의 뜻입니다.
그런데,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처지가 다를 경우, 남을 이해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지식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실제 상황에서는 실패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병원과 교회로 모시는 일을 수년째 하고 있으면서, 나름 환우들의 애환을 이해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었습니다. 정상인이 그분들의 애로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1-3층을 운행하는 엘리베이터가 아주 소형이라, 휠체어 2대를 싣고 나면, 틈새에 3-4명 정도 끼여 탈 수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는 순간, 나이와 약간의 불편을 핑계삼는 권사님들 십 수 명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먼저 2-3회 이용하기 때문에, 환우들은 항상 후순위가 됩니다. 먼저 도착할 방법도 없고, 간혹 양보를 부탁해 봐야 들은 척도 않으니, 뒤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환우들 차례가 오면 이렇게 했습니다. 휠체어를 먼저 태우고 여유 공간에 운신 가능한 분들을 태웠습니다.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일반적인 순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뇌졸중으로 좌반신이 매우 불편하신 자매님의 읍소를 들었습니다. “휠체어 타신 분들은 그래도 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이들은 잠시 서 있는 것도 고문입니다. 순서 좀 바꿔 주세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냥 쉽게 휠체어에 타신 분들이 더 중증이니 우선하는 게 옳고, 비록 불편은 할지라도 자력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 나중에 타는 게 옳겠거니 생각했던 것이지요.
과부가 아니었으니 과부의 사정을 알 수 없었고, 역지사지라 하나 이 또한 지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환우들의 고통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얼른 사과하면서 이후부터는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불가불 자기중심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을 생각한다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원초적인 죄성에서 기인되는 불가항력이겠으나,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조금씩이나마 고치려고 애는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모자람을 조금씩 줄여나감으로써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