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afe.daum.net/remnant7000 / 자유게시판에서 닉네임 '푸른 애벌래'라는 분의 글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듯하여 퍼왔습니다.

1.

그리스 신화에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데려와 쇠로 만든 침대에 눕히고는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잡아 늘이고, 침대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침대’는 그에게 나그네의 생과 사를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이었으므로 무고한 희생자는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누군가에게는 절대기준이었지 모를 그 침대의 길이가 나그네 입장에서 보면 막무가내로 적용되는 악법의 횡포였을 것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말 자체가 ‘늘이는 자’ 또는 ‘두드려 펴는 자’라는 뜻으로, 이 신화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 및 ’프로크루스테스 체계(Procrustean method)'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보통 융통성이 없거나 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비유하는 관용구로 오늘날 종종 쓰이고 있습니다.


2.

절대적 기준을 의미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달리 때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거나 달라지는 기준을 나타내는 우리식 표현으로  ‘엿장수 마음’이란 관용구도 있습니다.

주는 엿의 양도 엿장수 기분에 따라 다르지만 엿마다의 길이도 제각각인지라 엿판 위에서 공평성을 논한다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이겠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엿장수 가위는 끝이 뭉툭하고 날이 무디기 때문에 세밀하게 오리거나 자르는 것이 어쩌면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가위날의 예리함으로 '자르기'보다는 쇠붙이의 무게감을 이용한 '내려치기'에 가깝다보니 엿마다 정확한 길이로 재단하기가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3.

개인이 정한 일정한 틀에 맞추어 상대방의 생각까지도 억지스럽게 짜 맞추려는 아집이나 아무런 기준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때그때 편리하게 적용해버리는 무책임이 어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엿장수의 가위에만 나타나겠습니까? 어쩌면 내 집에도, 내 안에도 구석구석에 감춰둔 침대와 가위가 숨어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고자 하는 '목표지향적 명제'를 품고 살아가면서도 성경적 바른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는 말씀이 주시는 '사실명제'는 인정하지 않은 채 종교적 세뇌에 젖은 독선과 아집을 부리며 거부하는 일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보다 세상이 정한 규례에 철저해지고자 노력하는 모순과 즉흥적이고 감상적인 종교심에 젖어 본질에서 이탈한 자기만족적인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가 아닌, '사람 앞에서' 높이 평가받고자 하는 교만.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도 여전히 또아리를 튼 채 꿈틀거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와에게 선악과를 권하던 뱀 한 마리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긴 혓바닥으로 무언가를 건네줄 기회를 노리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편리한 옷을 갈아입으며 엿장수 마음 내키듯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행사에 참석하듯 생활해왔는지도 모릅니다.

바르게 해석된 말씀을 듣고 바른 믿음을 소유한 삶을 누려갈 때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는 추상'에서 '보이는 실체'로 믿어진다는 원리가 더더욱 마음에 와 닿는 요즘입니다.


4.

율법주의의 형식에 매어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함의 정도와 이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었습니다. 그들은 과도한 금식과 보이기 위한 기도를 통해 그들의 경건함과 정도의 우월함을 자랑하며 급기야는 그들보다 못한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멸시하기까지 합니다.

말씀의 본질은 변두리에 묻어둔 채 오직 종교적 열심인 율법만을 붙들고 그 잣대에 따라 뭇사람들을 책망하고 재단하기에 이릅니다. 하여 높아지고자, 대접받고자 하는 교만함이 꿈틀거려 정작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가 메시아로 오신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행함'이전에 '바르게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간과한 채 오로지 외형적 기준에 사로잡힌 결과였겠지요?

허나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행함에 있어 100% 자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율법을 주신 이유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한계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으로 완성해주시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소유한 채 살아가라는 참뜻을 들여다보지 못한 결과였겠지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이들에게 율법은 만인의 종교심을 재보는 잣대요,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할 기준점이었을지 모릅니다.


오늘날의 교회 현장에서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나 바리새인들의 율법처럼 절대 기준으로 작용하는 많은 규례와 원칙들이 본질적인 말씀보다 앞에 서거나 위에 놓인 경우가 다분하리라 여겨집니다.

창세 전 계획과 언약의 계시를 통해 보여준 성경의 가르침보다 저명한 신학자나 종교적 지도자가 편찬한 종교서적이 베스트셀러화 되면서 그들의 이론과 해석에 열광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또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문자적 해석에 연연해 사람 모으기에만 집중하면서 각종 세상적 행사와 무분별한 이벤트로 말씀을 흐리는 사례도 종종 접하게 됩니다.  

엿장수 마음대로 성경 구절의 여기저기를 주관적 편의에 따라 가감해가며 대중의 환심을 사는 목회자의 설교도 종종 전해 듣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단 하나의 절대기준이요, 사람의 기준으로 결코 가위질할 수 없는 '성경'을 바로 앞에 두고도 말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왜곡된 시대일수록 성경적 바른 해석과 꾸준한 말씀 공부가 더더욱 요구되는  것이겠지요?

성경을 평면이 아닌 입체로, 분자(부분)만이 아닌 분모(전체)분의 분자로 인식하고 총체적으로 해석할 때, 바른 교회 안에서 바른 말씀을 듣고 바른 믿음을 소유한 바른 신앙여정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과 함께 그 행복한 여정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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