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정말 미련한 십자가의 도

조회 수 993 추천 수 92 2009.10.09 23:05:56
♣ 고전1: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혹 동양철학에 관심 가져 보신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깊은 지식까지는 못되어도 약간의 관심을 지녔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불교 방송도 보고 유교 경전도 읽습니다. 그러나 결코 다원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명색이 30여 년 이상 하나님을 믿어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쟁이지만, 불교나 유교의 교리들이 훨씬 논리적인 것 같다는 생각(진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을 떨치지 못해 마음이 울적해지곤 합니다.

실상, 성도들의 일반적 기대와 달리, 불교의 교리는 무척 논리적입니다. 기독교 우주관과 비교할 때, 논리성 측면에서만 본다면, 불교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입니다.  불교의 우주관은 상당히 그럴 듯해 보입니다.  

성도와 불교도가 각자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리를 설명한다면, 불신자들은 십중십 모두 불교의 설명에 동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람의 생각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생각에 익숙하기 마련이지 하나님의 생각에 공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유창한 설교에 매료되곤 합니다. 청산유수요 참기름처럼 매끄럽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빠져들기도 합니다. 바람직한 현상일 것으로 기대하겠으나 2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말로 구원받은 성도(목사/신학자)가 바르게 깨우쳐서 바르게 전해주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실제 참 진리를 전할 때는 그리 매끄럽지 못합니다. 논리적 매끄러움은 설교의 필수요건이 아닙니다(이는 설교의 감동지수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과 무관한 자(목사/신학자)가 사람의 생각으로 전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만(참 진리를 전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므로), 현실적으로는 후자의 비율이 더 높아 보인다는 데에 성도들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 전도에 관해서도 많은 권면을 받게 되고, 심한 경우 태신자 결신 등의 압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성경구절을 동원하여 설명하는 데야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주 듣는 전도의 이론도 무척 인간적인 오해일 뿐입니다. 전도는 단 한 마디의 선포로써 완료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치 농사와 같습니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물을 제 때 공급해주고 그리고 기다려야 추수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낳자마자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밀이와 걸음마 단계를 거쳐, 유년기→소년기→청년기를 지나야, 비로소 장년에 이르러 한 사람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년식은 20세에 거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 치밀한 이론가들은 ‘전도란 미리 성령님께서 앞서 설득해 놓으셔야 하며 성도는 단지 선포만 하면 된다. 따라서 이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얼핏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신 그 기간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로만의 전도는 한계를 지닙니다. 아니, 한계라기보다 명백한 오류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핀다면, 전도란 선포와 함께 반드시 병행되는 ‘삶의 모습’을 통해 파급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본’이라고도 합니다. 본이 전제되지 않고 말로만 전도하려 한다면 이는 무모한 짓입니다(노방전도가 그럴듯하지만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핵심 근거입니다).


앞에서, 성도들에게 아주 익숙한 지식(교리), 설교, 전도 등 3가지 주제를 간략히 언급했습니다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진리(기독교 신앙)가 말로써 표현 가능하다고 배웠지만(논리적 매끄러움을 의미), 이는 불충분한 이해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성도들의 머릿속에 정리된 것처럼, 진리는 매끄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본문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헬) 호 로고스 호 투스타우루(o logos o toustaurou)로서, 문자적으로는 ‘그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학자들이 설명합니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여기에서 바울은 개심자들이 인간의 말과 지혜에 대해서 지나치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결국 “십자기의 도”란 ‘십자가에 관하여 전하는 말’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것”은 (헬) 모리아(moria)인데, 영어는 silliness, absurdity, foolishness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말로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어리석음/바보같음’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십자가의 도가 과연 인간들에게 지혜롭게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진정으로 미련하게 보입니다. 마치 칠삭둥이 팔불출이의 말처럼, 어처구니없고 바보스러울 뿐입니다.  

논리성이 탁월한 교리와 유창한 설교와 나무랄 데 없는 전도이론은, 덥석 받아들이기에 앞서, 차분히 분석해 봐야 합니다. 현란한 수사(修辭)에 압도되어 판단력을 상실하면 안 됩니다. 신학과 설교와 행위 이론은 반드시 십자가의 개념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부인할 수 없는 특징은 투박함입니다! 어리석은 것이요 미련한 것입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잣대는 오직 십자가뿐인데, 이는 미련하게 보인다는 진실을 한시도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날 안티기독교 인사 중에 도올 김용옥 교수의 활약상이 눈에 띕니다. 겉보기 지식의 도드라짐과 어울려, 특히 불신자들에게는 그 영향력이 상당합니다. 적당한 반박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의 주장이어서 성도들에게는 거북살스럽기까지 합니다.

갓피플몰에도 ‘기독교 성서의 이해’와 ‘요한복음 강해’라는 연구서가 소개되고 있고, ‘요한복음 강해’에 대한 박명룡 목사의 반박서인 ‘누가 참 하나님인가? 김용옥의 하나님 VS 성경의 하나님’이라는 책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소수 성도들의 서평은 ‘불쌍한 사람이다.’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반응입니다. 어느 독자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조금 서글픈 것은 이 사람을 완전히 꼼짝 못하게 만들 만한 기독교계의 거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이분은 아직 박명룡 목사의 책을 읽지 못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의 안티기독교 사이트에는 도올의 또 다른 글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아직 책으로 발간되지 않은 것 같고, 제목도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나는 왜 성경을 우롱하는가?’라는 서론 제목으로 다운로드받아 놓았습니다. A4 용지로 무려 439매에 이르는 방대한 양입니다.

도올이 이 글에서 시종일관 주장한 내용은, ‘제발 기독교인들이여! 좀 똘똘해져라. 어찌하여 신화에 불과한 허구를 그처럼 맹신하는가?’입니다.

문제는, 도올의 글을 읽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확연한 차이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라면 바로 앞에서 예로 든 분들과 동일한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불신자라면 ‘속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의 글은 불신자들의 마음을 시원케 할 만큼, 매끄럽습니다!

도올을 선전하려는 목적이 아니므로, 한 마디로 정리하겠습니다. 도올은 명백히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은 이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도올의 주장에 대한 성도와 불신자의 반응 중에서, 객관적 논리적으로 어느 것이 더 타당성을 지니느냐에 답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의 막무가내식 반발(도올은 불쌍한 사람이다)이 옳은가? 아니면 불신자들의 대범한 포용(기독교도 배타성만 양보하면 수용할 수 있으나 도올의 주장이 더 우수하다)이 옳은가?》  

성경에는 오류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 둘 아닙니다. 설명되지 않는 난제들 또한 셀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 아무리 해명하려해도 쉽지 않습니다. 성도 대표자들(신학자/목회자)과 불신자 대표자들(도올과 같은 이들)이 논쟁에 임한다면 결과는 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성도 대표들이 무조건 참패합니다. 역사적 사례가 있습니다. 대학논쟁과 원숭이 재판이 그 예입니다. 인간적인 판단기준으로 볼 때, 논리성에서 턱없이 밀렸기 때문에 졌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봅니다. 도올의 주장에 동의해 보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 스스로도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고, 그렇기에 만약 십자가의 도가 미련해 보이지 않고 바보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면 인간답게 사고하고 판단해 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리한다면 인간의 구원은 물 건너갑니다. 기껏해야 운명론적인 불가지론이나 불교식의 자력구원 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런 것 얻자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므로 다시 한번 숙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선택 가능한 방안은 오직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라면 그냥 미련하게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독으로 독을 다스리는 원리(痢霽)입니다.


그렇습니다. 미련한 것은 그냥 미련하게 대우하면 됩니다. 조급히 대응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추수 때까지 기다리듯,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신은 죽었다.’고 큰 소리쳤던 니체가 죽었듯이, ‘기독교는 신화다.’라는 도올도 죽습니다. 똑똑한(?) 니체와 도올은 사라지지만 신화적(?) 존재인 하나님은 영존하시며, 그들의 현란한 이론은 잊혀지지만 허구라며 헐뜯었던 성경은 세상 끝날까지 생생히 기억됩니다.

애태우지 말고 그냥 미련하게 묵묵히 기다리라는 것이 바로 성경의 요구일 것입니다. 똑똑한 인간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련퉁이가 되는 길 뿐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다행입니다. 미련해야 미련한 것을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항상 미련한 성도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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