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몽(解夢)도사 요셉의 비결은?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창40:8)
성경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인생의 큰 전기가 되는 세 번의 꿈 사건이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또 본인이 꿈을 잘 꿀뿐 아니라 해몽도 잘 했습니다. 특별히 어려서 꾼 꿈을 평생 잊지 않고 있었으며 그 꿈대로 인생이 흘러가 "꿈꾸는 사람"으로 불립니다.
본문은 그 두 번째 꿈 사건입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습니다. 옥중에서 만난 바로의 술과 음식을 맡은 두 관원장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해몽을 자처하고 나섰고 또 정확하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 아니 요셉의 말이 좀 앞뒤 이치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라고 했으면, 당연히 이어지는 말은 "기도해 보시지요" 혹은 "제가 기도해 보고 답해 드리겠습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대놓고 "내게 고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자기가 즉시로 해석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감히 하나님을 대신하겠다고 나섰거나 잠깐만 묵상 내지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 줄 자신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너무 교만한 말 아닙니까? 자기 꿈을 형제들에게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던 어렸을 때의 버릇이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입니까? 아니면 나름대로 해몽의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입니까? 죽을 고비를 천우신조(?)로 넘기고 오랜 시련을 겪은 그가 아직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에 자신만의 비결이 따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런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궁금하고 또 부럽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셨고 또 그런 지혜를 받을 수 있는 비결도 믿음말고는 없다는 것이 그 답입니다. 신앙상의 어떤 질문에도 정답이 되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인 그 믿음 말입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신학적, 교리적, 성경적으로 다양하게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어쨌든 한 마디로 요셉이 우리보다 믿음이 훨씬 좋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런 강한 믿음을 형성할 수 있었던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쉽게 고난이라고 단정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겪으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고난을 겪는다고 해몽을 바로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믿음으로 자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을 겪을수록 더욱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심지어 그분에 대한 원망만 늘어나지 않습니까?
그가 가졌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살았던 당시는 성경 한 권 없었으며, 율법도, 십자가 복음도, 나아가 그의 내면에서 미세한 음성으로 해몽을 직적 도와줄 성령에 대한 지식조차 단 하나 접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심지어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이 일어나기 400년 전이라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에 대한 지식과 체험도 많지 않았던 때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날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데도 오히려 믿음은 그보다 훨씬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가 받았고 알았던 하나님에 대해 신학적으로 정리된 지식이라고는 오직 그의 증조부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받았던 약속뿐(창12;1-3)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여 큰 민족을 이루며 열방의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겠다는 그 약속 말입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꿈에 분명하게 계시해 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일관된 기대, 두 가지가 그가 가진 믿음의 유일한 근거이자 내용의 전부였습니다.
비록 애굽 감옥에서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죄수의 신세가 되었지만 사대째 내려오는 자기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꿈에서 보여준 자기 일생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언젠가는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에 대해선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꿈을 꾸는 자였습니다.
형제들이 그를 구덩이에 밀어 넣었을 때 그의 심경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제는 굶어 죽거나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 그 약속과 꿈이 수포로 돌아가는가 보다 완전히 포기했거나 아니면 여호와께 자기를 구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너무나도 우연히 그 옆을 지나간 미디안 상고들로 인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자마자 혹은 하나님을 포기하자마자 어느 경우가 되었던 그는 생명을 다시 건졌습니다.
그 후 그가 확신할 수 있었던 오직 한 가지 진리는 하나님은 절대로 약속을 지키시며 자기를 통해 그 약속을 이루실 때까지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두고 하나님이 자신과 동행하여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것에 흔들림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스스로 꿈꾸던 자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꿈을 꾸는 자로 완전히 변화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이 미세한 음성으로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순간순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전할 말도 하나님이 그의 입에 심어주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잠시만 진정으로 기도하면, 표현이 이상하지만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할 정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본문 같이 감히 하나님 대신에 꿈을 해몽해 주겠노라고 나설 정도가 된 것입니다.
성경공부, 성경통독, 제자훈련, 사역자훈련, 구역공부, 특별새벽기도, 작정기도, 관상기도, 내적치유, 영성훈련, 큐티나눔, 전도폭발, 단기선교, 등등 단 하나의 코스도 수료하지 못한 요셉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교도 이방인에게 "해석은 하나님에게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라고 당당하게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습니다. 오직 그분의 약속의 말씀(성경으로 따져도 채 한 장도 안 되는 분량의)을 어린아이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만 붙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대변하는 선지자(先知者)가 되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과연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힘들어 하는 주위 불신자에게, 아니 같은 성도에게라도 "치유(위로, 능력, 평강, 계획, 인도 등등)는 하나님에게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 앞에 선지자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여전히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지 못한 신앙이지 않습니까? 대신에 기껏 교회의 훈련에만 겨우 의지하는 신앙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1/1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