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추잡한 사건이 많은 이유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로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보내소서.”(창44:32,33)
세상 사람들은, 최근엔 심지어 기독교인들마저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합니다. 도무지 종교 경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잡한 사건들을 두서없이 기록해 놓았다고 비난합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자기들 역사를 도덕교육 시키기에 적합하도록 편찬했으니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교훈을 스스로 택해서 참조만 하면 된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요컨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기록한 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 자체에 이미 논리적 모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덕교육에 적합하려면 추잡한 사건들을 기록해선 안 됩니다. 또 유대민족의 역사에 불과하다면 자기들 치부를 그렇게까지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덕교과서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 너무 많고, 자기 민족의 수치스런 역사는 지우거나 왜곡하는 것이 보통인데도 오히려 환난과 패배한 기록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전 세계 어느 민족도 갖지 못한 아주 특이한 책입니다. 인간의 이성적 상식을 넘어설 뿐 아니라 너무나도 정미합니다.
추잡하지만 아주 정미한 기록의 대표적 예로, 시아비 유다와 며느리 다말이 통간한 사건(창38장)을 들 수 있습니다. 도덕적 차원은 물론 상식적으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륜, 아니 근친상간입니다. 그야말로 하늘과 사람이 함께 저주할, 천인공노(天人共怒)의 죄입니다. 나아가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사건(37장)과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의 삶을 시작하는 일(39장) 사이에 불쑥 끼어들어 있습니다.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일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해답이 바로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형들을 두 번째로 만난 요셉은 아비 야곱의 안부를 확인했고 또 형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잘못을 회개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친동생 베냐민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확인할 일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첫 방문 때에 형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아비 야곱이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막내를 아주 편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형들이 그런 베냐민을 미워하지 않은지 궁금했습니다. 식사 중에 베냐민에게만 특별대우를 해주었지만 시기하는 낌새를 느끼지 못해 그만 남기고 떠나라고 했습니다. 형들의 진심을 재확인하고 여차하면 동생과 함께 애굽에서 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가 나서서 자기 생명을 걸 테니 제발 베냐민을 돌려달라고 애걸합니다. 그는 야곱이 베냐민마저 잃을 수 없다고 애굽에 보내지 않겠다고 고집할 때에도, 똑 같이 자기 생명을 걸고 설득시켰습니다. 유독 많은 아들 가운데 장남도 아닌 넷째 아들이 그랬습니다. 그는 다말의 사건에서 아들을 졸지에, 그것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잃는 슬픔을 두 번이나 처절하게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요셉을 잃었고 이제 또 베냐민마저 잃어버릴 처지에 있는 아비 야곱의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말의 사건이 성경에, 그것도 반드시 그 순서대로 기록되었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바로 그 유다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왔습니다. 다른 말로 성경의 모든 기록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은 왜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 즉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설명한 책입니다.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과 그 의미를 풀어서 쓴 책입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을 해석하는 열쇠도 예수이며 또 해석한 결과도 그분의 십자가 복음만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유다가 요셉에게 간구하는 말을 자세히 음미해 보십시오. 그 속에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대로 계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분은 직접 자기 몸을 담보로 죄악과 사단과 죽음의 노예로 묶여 있던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 죄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땅으로 오시기 전에 성부 하나님께 틀림없이 이런 말씀을 드렸을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녀들을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유다가 한 말을 인용해 표현하다보니 마치 성자가 성부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과격한 표현이 되었습니다만 물론 그럴 리는 절대 없습니다. 그만큼 십자가 구원 사역이 성삼위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이끌어 감에 있어 가장 중차대한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멋대로 추측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도 누차 그런 뜻으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17:2,4,6)
성경에 추잡한 기록들이 많은 이유는 인간은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심지어 하나님을 잘 알고 열심히 믿는 자마저 절대로 죄에서, 그것도 그런 천인공노할 죄에서마저 자유로울 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 아래에 자신의 존재 전부를, 그 천인공노할만한 추잡한 행동만 말고, 내어 맡기지 않고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의 유다처럼 종의 모습이 되어 인간의 모든 죄 값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바쳐서 죄인의 생명을 살려주지 않고는 구원은 절대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에는 담겨 있지 않는, 아니 차마 실을 수도 없는, 성경의 음란한 포르노와 잔인한 폭력물들이야말로 십자가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인간은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정말로 완악한 존재인지라 스스로 고안한 종교 경전에 그런 이야기를 담을 리 만무합니다. 성경에 그런 기록들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나 기독교가 그렇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게 해주어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게 하려는 그분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꿔 말해 본문의 유다는 수난 받는 종, 예수님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는 야곱과 동일한 고난을 직접 겪었기에 그 고난을 나눠질 수 있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 있는 육체의 모습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시험을 직접 체휼하신 후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셔야만 우리 죄의 구속이 성취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1:5-7)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바울과 그 일행이 성도들을 향해 자기들을, 아니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권합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살리고, 그 살아난 성도들을 통해 동일한 환난에 있는 자들도 살리시려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인간은 추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섬김과 사랑을 빤히 보고도 그분을 믿지 못합니다. 자기야말로 추잡한 죄에 빠져 있으면서도 십자가 앞에 항복은커녕 성경을 이해조차 못하겠다고 우기는 완악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죄악의 추잡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인간 실체를 확인한 자는 십자가 앞에 엎드릴 수 있고 또 평생을 두고 오직 그것만 붙들게 됩니다. 바울과 유다처럼 자신의 몸에 고난을 채워 다른 이를 살리려 합니다. 성경이 도무지 말도 안 되고 추잡한 이야기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런 자리에 가기 싫은 대신에 자신의 안락과 평안만 그것도 스스로 추구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십자가 은혜 안에 든 자는 그런 이야기들로 인해 오히려 성경이 구원을 얻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7/11/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