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라
“요셉이 그에게 가로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 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 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창40:12-15)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보디발의 처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습니다. 옥에서 만난 바로의 술 맡은 관원의 꿈 이야기를 듣고선 전직(前職)이 회복될 것이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그 해석대로 되면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바로에게 이야기해서 옥에서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렸습니다.(23절)
아마도 그는 요셉을 한갓 죄수로 우습게보았거나, 그 해석이 우연의 일치이겠거니 여겼거나,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라고 바로가 자신의 실력을 다시 인정해 주었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자기 직무에 바빠 잊어버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요셉의 부탁에 신경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직된 직후라 더 조심하느라 그런 개인적인 부탁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나중에는 흐지부지 잊어버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떡 굽는 관원장도 옥에 갇혔지만 자기는 복직되고 그 사람은 사형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바로에게 음식으로 인해 배탈이 났거나 안 좋은 일이 생겼는데 그 원인이 술이 아니라 떡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도 요셉처럼 억울하게 옥에 갇혔었고 아마도 요셉의 모든 전후 사정도 들었을 것입니다. 과부 사정을 과부가 제일 잘 알듯이 동일한 고난을 겪은 자일수록 더욱 잘 도와주기 마련입니다.
나아가 고대 왕실의 술과 음식을 맡은 관원장은 왕이 무엇을 먹든 마시든 언제나 바로 곁에서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독살을 방지하기 위해 꼭 먼저 맛을 보아야 합니다. 왕 대신 죽을 수도 있어 왕이 가장 신임하는 자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으로선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가 자신의 잘못이 아님이 밝혀졌기 때문에 바로의 신임을 더욱 받았을 것입니다. 그로선 누명을 쓴 요셉 정도는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는 위치가 되는데도 무시해버렸습니다. 요셉으로선 다시 이 년을 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의인이 선행을 했는데도 보상이 따라 오지 않는 것은 그나마 덜 억울합니다. 의인이라면 처음부터 보상을 바라고 선을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에 대해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핍박과 환난일 경우가 있으니 미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마저 의심을 넘어 원통함과 분노가 함께 발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 때 그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서 옥에서 꺼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틀림없이 자유의 몸이 되어 가나안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며 그러면 애굽 총리가 될 기회는 아예 가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그를 애굽 총리로 세우는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됩니다.
흔히들 요셉이 비전을 가지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만 믿고 따랐기에 외국인 노예가 일국의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외국에 이민 와 있는 우리도 열심히 믿어 그 나라의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고 또 그런 꿈을 가져야 한다고 독려합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에 오른 것이 무엇이 대수입니까? 그분은 전지전능하신지라 그 정도 일쯤은 식은 죽 먹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완전한 우상 숭배의 땅에서 총리가 되었든 왕이 되었든 당신의 왕국의 확장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입니다.
말하자면 미국에서 한국인 신자의 후예가 대통령이 된들 그 직무를 수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굳건한 믿음 위에서 자신의 소망을 끝까지 붙들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이뤄주었지 않았느냐?”라고 섣불리 단정 지어도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신자 개인의 야망을 이뤄주는 도구밖에 더 됩니까?
요셉이 그 후에 바로의 궁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르쳤다는 기록은 눈을 닦고 봐도 없습니다. 물론 여호와를 아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기들과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고 어쩌면 요셉 개인의 명예만 올라간 것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셉 사건을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보아선 안 됩니다. 본문의 경우도 만약 자유의 몸이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갔다면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에 초점을 두어선 안 됩니다. 그 보다는 그가 가나안으로 돌아갔다면 틀림없이 집안에 분란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형들에 대한 원한이 아직 완전히 씻겨지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선조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부터 서로 미워하고 저주하는 형제들로 열두 지파의 우두머리로 삼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왔을 때에 처음 그들을 본 요셉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했겠습니까? 한편 반갑고 한편 밉고 그러면서도 아직 완전히 믿을 수도 없는 도저히 말로 표현 못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돈 주머니를 숨겨서 돌려보낸 것이 일부러 골탕 먹이려 한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형들의 마음을 떠보려 한 것이지 않습니까? 본문의 사건 이후 9년이나 지났지만 그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는데, 술 관원장의 도움으로 옥에서 풀려났다면 틀림없이 야곱의 집안에 한바탕 난리가 나 완전히 콩가루 집안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7년 풍년과 7년 흉년의 사건을 거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셉뿐 아니라 나머지 열한 형제와 야곱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12지파 족장이 될 형제들 전부가 하나님의 너무나 크신 섭리와 은혜를 깨닫게 하여 인간적 양심이 아닌 성령의 감동에 따라 서로 온전히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작가 폴 빌하이머는 "만일 인간적인 동정으로 그를 인생의 슬픈 부분에서 구출할 수 있었더라면 그 뒤에 따라 올 영광스러운 부분은 상실했을 것이다"라고 이 사건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영광스러운 부분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을 뜻하는지 모르지만 원론적으로는 맞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 다릅니다. 신자의 당장의 환난은 절대 환난만으로 그치지 않고 장래의 영광으로 변합니다.
특별히 신자가 선으로 행한 것에는 하나님이 반드시 언젠가는 신원하고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나 신자 자신의 영광보다는, 심지어 신자가 끝까지 힘들거나 죽음까지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만은 반드시 들어납니다. 물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본인으로선 장래의 영광까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되 특별히 하나님 당신의 관점에서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것을 가장 먼저 소망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또 그런 헌신의 바탕 위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왕국이 확장된다면 자신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겠다고 기꺼이 자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 신자는 오직 장래에 들어날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기에 비록 개인적으로는 현실에서 고통스럽고 힘들지언정 억울한 일은 없는 법입니다.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겠다고 헌신한 자에게 그 썩을 수 있는 기회가 닥쳤는데도 “하나님 나는 억울합니다!”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6/8/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