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회복하라.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4,15)
예배에 실패한 아담
미국에서 멸종 위기에 이른 북극곰이 과연 어느 지역에 얼마나 생존해 있는가를 알기 위해 우주에서 항공 촬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사진에 나타나지 않았다. 달려가는 차속에서 읽는 신문의 알파벳까지 찍어낸다는 인공위성 사진인데도 말이다. 아무리 숫자가 줄고 있지만 몽땅 사라졌을 리는 없기에 자세히 그 원인을 조사해 보았다.
놀랍게도 북극곰의 털 하나하나가 속이 비어 투명하게 비치는 미세한 비닐 튜브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흰 색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 튜브가 빛을 다 통과시켜버려 사진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겨울에 두꺼운 옷 하나보다 얇은 옷 여러 벌을 껴입는 것이 훨씬 따뜻하다. 공기는 모든 물질 가운데 열전도율(熱傳導率)이 가장 낮은데 여러 겹의 옷 사이사이에 공기가 차 있어서 외부의 차가운 냉기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북극곰의 털 하나하나가 속이 빈 튜브라 그 속에 차 있는 공기가 북극의 섭씨 영하 수십도 되는 극심한 추위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태초부터 북극곰에게 최고 하이테크(High-tech)의 방한복을 입혀 놓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저 놀랍고도 신기할 뿐이다.
오늘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대자연의 품에서 야외 예배를 갖게 되니 오랜 만에 가슴이 확 뚫리는 것 같다. 그런데 야외 예배만 오면 신자들이 목사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사항이 하나 있다. 좀 더 자주 야외 예배를 가지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다.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심지어 매주 갖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다.
그에 대한 성경적 대답은 어떨 것 같은가?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예배는 어디서 했는가? 바로 에덴동산의 야외였지 않는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의 일터와 주거하는 곳이 바로 예배당이요 일상생활 자체가 예배였다. 아담도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매일 매순간 바라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매일 야외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자기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았던 아담이 어떻게 되었는가? 사단의 꾐에 빠져 범죄하고 타락했다. 그 후 오히려 하나님이 두려워졌고 스스로 부끄러워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 숨기에 급급한 인생을 살았다. 그의 인생은 실패했고 그 원인은 예배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 그래서 그분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자의 인생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 세상에서 돈 벌고 출세할 수는 있다. 그러나 평생을 두고 그 영혼에 평강과 자유가 없다. 또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는지도 전혀 모른다. 그러니 돈을 벌어도 무엇을 위해 버는지 몰라 그저 죽도록 뼈 빠지게 돈만 벌다 죽는 인생이다.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오직 영원한 멸망뿐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예배드리는 신자에겐 절대로 영원한 실패란 없다. 그러나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면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잘 성공하지 못한다. 신자란 예배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드리느냐에 따라 비례해서 그 인생이 성공하는 법이다. 단순히 주일 성수 철저히 지키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며 예배 때에 찬양과 기도를 뜨겁게 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학생이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하는 것과 같이 신자에겐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신자라고 할 수도 없다.
예배 회복의 비결
예배를 회복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아담이 실패했으니 그 전철을 따르지 않고 그 반대로 하면 된다. 본문은 아담으로 하여금 예배에 실패케 한 사단을 벌을 주신 내용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똑 같이 사단에게 벌을 주면 예배가 회복된다는 의미다.
물론 본문의 일차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 최초의 예언이다. 사단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해서 발꿈치를 물었지만,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예수님이 도리어 사단의 머리를 밟았다. 당연히 사단의 노예가 되어 죄와 사망에 묶여 있던 인간은 구원되었다. 또 예수님이 동일한 권세로 언제나 함께 하기에 신자도 얼마든지 사단의 머리를 밟아 그 인생을 성공시킬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의 머리를 밟으려면 신자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발꿈치가 물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물려야 하고 또 물린 상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져야 사단에게 완전한 승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는 구원자로 세울 때에 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그랬더니 지팡이는 뱀으로 변했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의 꼬리부터 잡으라고 또 명령했다. 모세는 광야에서 양치기로 40년을 보냈기에 뱀에 대한 전문가였다. 그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뱀은 머리부터 잡아야 물리지 않지 만약 다른 어떤 부분이라도 잡으면 원체 빠른 뱀이라 바로 물리게 된다. 하나님의 그 명령은 인간적 관점에선 “뱀에게 물려 죽어라”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물리는 한이 있더라도 꼬리부터 붙들어라. 혹시 물리더라도 발꿈치만 물리도록 해주겠다. 또 독이 있어도 절대 죽지 않게 해 주겠다. 뱀의 머리는 내가 완전히 밟아 줄 테니까 말이다. 두려워 말라. 담대 하라.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모세가 도저히 말도 안 되어 보이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꼬리부터 잡자, 그 때까지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듯이 노려보며 서슬이 시퍼렇던 뱀은 순식간에 뻣뻣한 막대기로 변했다. 만약 모세가 그 말도 안 되는 말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기 생각으로 머리부터 잡았더라면 틀림없이 물려 죽었을 것이고 성경의 기록은 바뀌었을 것이다. 발꿈치가 물릴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삶에서 죄악과 그 배후의 사단과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 참 예배이다.
우리의 예배드리는 모습은 솔직히 어떠한가? 매 주일마다 징징거리며 우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나님 아버지! 지난주에도 발꿈치뿐만 아니라 팔꿈치도 물렸고요 여기 저기 안 물린 곳이 없어요. 아파 죽겠어요. 어서 빨리 고약을 발라 주세요. 엉엉!”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하시겠는가? “그래 어서와 그 동안 많이 아팠지. 당장 고약을 발라주지”라고 하실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네 머리는 그래도 멀쩡하네? 그래도 죽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네? 아직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잖아? 그런데 왜 사단의 머리는 밟지 않았니? 아니 밟을 생각이라도 해 봤니?”
하나님은 매주 계속되는 우리의 신세 한탄에까지 발라 줄 고약은 없다. 어쩌다 그냥 두면 정말 발꿈치가 썩어 발 전부를 잘라내어야 할 위기에 다다라야 치료를 해주신다. 우리의 지난 신앙생활의 체험을 회상해보면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정말 눈물콧물 흘려가며 안간힘을 다 써서 작정 기도로 울부짖어야 가물에 콩 나듯이 응답을 받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스스로 밟아 부순 사단의 머리를 예배에 당당하게 들고 나타날 때까지는 신자와 그런 줄다리기를 계속하실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찬양을 목청껏 부르고 눈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목사님 설교 말씀에 조금 감동을 받으면 마치 자기 상처에 하나님이 고약을 발라 주어 치료가 된 양 착각한다. 그 고약의 효과는 불과 몇 시간도 못 가는데도 말이다. 예배 후 집에 돌아가자마자, 아내는 남편에게 “왜 설교 중에 조느냐. 그럼 구역장인 내 체면이 뭐가 되냐?”라고, 또 남편은 아내에게 “왜 예배 때에 목사님보다 잘 생긴 성가대 지휘자만 힐끔힐끔 쳐다보느냐?”라고 따지며 치고받고 싸운다. 그것은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예배라는 이름의 교회에서 하는 쇼를, 그것도 상당한 입장료를 내고 구경하고 온 것뿐이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유
신자가 아무리 교회에 오래 출석해도 왜 믿음이 자라지 않고 또 삶에서 실패하는가? 하나님은 신자에게 발꿈치가 물리는 한이 있어도 사단의 머리를 밟는 싸움을 하라고 요구하는데 반해 신자는 그 발꿈치 물리는 것이 두려워 어떻게 하든 발꿈치를 안 물리려는 싸움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제가 그렇게 기도도 많이 하고 교회 봉사도 분수에 넘치게 했는데도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입니까? 도저히 하나님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저지른 실패를 되돌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아담의 인생이 실패하게 된 출발이 어디였는가? “하나님은 도대체 왜 동산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선악과를 그것도 동산 중앙에 두어 매일 볼 수 있게 만들어 놓고는 따먹지 못하게 했을까?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어?” 아담이 원죄를 저지른 모습에서 하나 나아진 것이 없다. 그것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서도 말이다.
북극곰이 항공 우주 사진에 찍히지 않는 이유가 태초부터 하나님의 최고 하이테크 방한복으로 입혀 놓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도대체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는가? 인간 과학 기술의 최고 결정체인 인공위성 촬영으로도 하나님의 비밀을 전혀 밝혀 내지 못했지 않는가? 인간이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크고도 오묘한 하나님이지 않는가? 그런데 상상조차 안 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못 믿겠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될 법한가?
사단이 신자를 시험에 빠트릴 때에 절대로 “하나님을 믿지 말라. 교회에 나오지 말고 세상으로 돌아가서 죄를 지어라”고 하지는 않는다. “잘 들어봐! 하나님이 얼마나 치사하고 째째한지? 교회 봉사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발꿈치에 난 상처 하나도 아직 안 고쳐주지 않는가?”라고 속삭인다. 심지어 신자가 열심히 예배를 드리게끔 유혹한다. 상처란 상처는 전부 다 들고 나와 울부짖게 만들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믿음이 좋고 승리하고 있는 양 착각하게 만든다. 신자들이 자기들 발꿈치에 난 상처 고치는 데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까 정작 사단의 머리는 한군데도 상한 데 없이 너무 멀쩡하다. 이런 엉터리 같은 신앙이 따로 없다.
뜨겁게 찬양하고 청산유수처럼 기도한다고 예배가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사단의 전략의 초점은 크신 하나님을 신자가 자꾸 작게 축소해서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략을 뒤집어서 적용해야만 한다. 자꾸 작게 보이려는 하나님을 크게 보고 또 자꾸 크게만 보이는 발꿈치 상처를 작게 볼 줄 아는 일이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예배란 상상조차 안 되는 하나님을 우리의 지정의를 최대한 동원해서 얼마나 크게 보고 가느냐의 싸움이다. 아니 최소한 그분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며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라도 확인해야 한다. 요컨대 예배 중에 사단의 머리를 밟아야 한다. 아니 최소한 우리가 사단의 머리를 밟을 수 있는 권능을 가졌다는 것이라도 확인하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러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 예배다.
그런 확신을 가진 신자가 찬양을 하면 사단은 완전히 물러가고, 또 기도하면 하나님의 왕국이 크게 확장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의 인생은 십자가의 당당한 승리가 보장되며 그가 속한 가정, 직장, 사회, 민족, 국가도 거룩하게 바꿀 수 있다.
이 예배가 끝난 후에 바비큐를 맛있게 먹고 교우들끼리 재미있는 게임을 하며 이민 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만 가면 안 된다. 여전히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고약 조금 바르고 가는 것에 불과하다. 비록 오늘 예배에 나올 때는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채 왔더라도 너무나 크셔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가야 한다. 북극곰에게 최고의 방한복을 입히신 하나님이 이름 없는 들꽃 하나에도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도 더 신비하고 오묘한 권능을 입혀 놓았음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나아가 하물며 들꽃에도 그런 영광을 숨겨 놓았다면 태초부터 나를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로 나를 반드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다시 붙드셔야 한다.
예수님이 전도 여행에 처음으로 파송했던 70명의 제자들이 돌아와서 사단의 머리를 밟았다고 신이 나서 보고를 했더니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는가? “뭐 그런 일로 기뻐 날뛰느냐? 너희들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정도쯤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주 안에 있는 여러분도 사단의 머리를 밟는 것쯤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이미 하늘의 족보에 하나님이 나의 아빠라고 적혀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염려할 것인가?
(5/7/2006 아름다운 교회 야외 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