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믿는 대로 기도하라.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창40:21-23)
바로의 두 관원장의 꿈은 요셉이 해몽해 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꿈을 꾸었고 또 그 꿈대로 되었다는 것은 그 배경에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술 관원장도 그 정도는 쉽게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감옥에서 꺼내달라는 요셉의 신신당부를 잊어버렸습니다. 자기 급한 불만 꺼지면 남에게 신세 진 것마저 금방 잊어버리고, 어쩌면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며, 나아가 분명히 신의 손길을 인식하고도 자기 살길만 찾으면 그만인 것이 인간이란 존재입니다.
물론 그로선 바로의 오해를 사서 감옥까지 갔던 터라 재신임을 얻기 위해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 요셉의 죄명은 강간 미수였습니다. 그것도 바로의 시위대장의 아내가 상대였습니다. 아무리 바로를 지근에서 모시는 술 관원장이라도 그런 예민한 문제에 개입하기가 꺼림칙했을 것이며 또 바로를 설득할 자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만 이년 후에 바로도 꿈을 꾸었는데 애굽의 모든 술객과 박사들이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비로소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내 허물을 추억하나이다.”(9절)라고 실토했습니다. 뒤늦게나마 자기 잘못을 깨닫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하여 정확하게 해몽토록 했습니다. 요셉은 또 풍년과 흉년이 겹칠 것에 대비한 현명한 해법까지 제시해 주어 감옥에서 풀려난 정도가 아니라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 요셉은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남들에게 은혜만 베풀었습니다. 그에 비해 시위 대장과 술 관원장은 은혜를 잊거나 악으로 갚았습니다. 인간들은 그를 기억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념하시고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셨습니다. 틀림없이 요셉도 그들을 용서하고 서로 화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당사자 중에 어느 누구도 사태가 그렇게 진행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정말 한 방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인간의 허물과 죄악이 용서 받았고 또 억울한 사정은 신원되었습니다. 나아가 노예이자 죄수였던 자가 하루아침에 이방 나라의 총리에 올랐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궁리조차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한 순간에 사막을 옥토로, 바다를 산으로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결국 배은망덕했던 술 관원장의 허물마저 요셉을 애굽의 총리에 오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땅과 하늘 차이만큼 인간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다르고 큽니다. 만약 술 관원장이 자기 누명이 벗겨진 직후에 바로를 설득해 요셉을 감옥에서 빼내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틀림없이 가나안으로 되돌아갔거나 애굽에서 종살이를 계속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총리가 될 가능성도 아예 없었거나 아주 희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였을까요?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울 계획을 갖고 계셨다면 그 후 사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든지 간에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술 관원장이 복직되자마자 바로로 꿈을 꾸게 했다면 그가 요셉을 잊어버릴 리 없이 즉시 바로에게 천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 단 번에 하실 수 있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일 뒤에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요셉으로 감옥에서 “만 이년” 더 썩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환난을 이기는 인내심을 더 키우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요셉마저도 자기가 술 관원장에게 해몽해주었던 일을 잊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게 하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가 전혀 꿈도 꾸지 못하는 때와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확신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서 이년 전과 후의 요셉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겠습니까? 성경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 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40:14,15) 이년 전 요셉의 유일한 관심은 오직 감옥에서 빨리 나가는 것뿐이었을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돌아가 부모를 만나고 형들과 화해하게 되길 간절히 소원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것이 그의 유일한 기도제목이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호와의 도움만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년이 지나도록 술 관원장으로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또 옛 주인인 시위대장도 자기에 대한 오해와 미움을 풀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으로선 인간적인 도움과 수단을 모두 포기할 단계에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당연히 기도의 내용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하루 빨리 풀어달라는 것보다는 하나님 이제는 나를 죽이든 살리든 당신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 다르고 큽니다. 그럼 당연히 우리의 생각과 길부터 바꿔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은 최악의 환난에 빠진 신자를 단번에 최고 좋은 형편으로 올려주시는 분으로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당신께 완전히 항복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신자가 자신의 생각과 길을 완전히 포기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가져야 할 믿음의 가장 근본 요소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인간의 것과는 다르고 크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슨 일을 하든 그런 바탕 위에서 해야 합니다. 특별히, 아니 당연히 현재 진행되어져 가는 상황이 내 생각과 길과 달라 보일 때, 그래야 합니다.
믿음의 근본이 그렇다면 기도의 내용도 마땅히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우리의 것과 다르고 크니 기도 제목을 아주 크게 잡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요셉을 죄수에서 총리로 그것도 단숨에 바꾸는 정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요셉을 만 이년이나 감옥에서 더 썩게 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알아 나가야 합니다. 신자가 자기 소원은 간절히 기도하되 만약 그것이 그분의 뜻이 아니거든 자기는 어떤 형편에 처하든 오직 그분의 뜻에만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혹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여건에 처해있거나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는 환난에 빠졌을 때에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됩니까?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기도란 자기 믿음대로 따라 나오는 법입니다. 자기 문제만 해결해주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만 기도할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진다고 믿고 또 그것을 소원하는 자는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신자가 전자의 기도를 한다고 해서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런 기도만 하면 하나님은 요셉에게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환난에 가두어 두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후자의 기도로 바뀔 때까지 말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신자로 총리가 되게 하는 것보다는 당신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당신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항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그렇게 항복한 후에도 신자를 어떤 그릇으로 빚을지는 토기장이이신 그분의 절대적 주권입니다. 응답의 확신도 없이 무조건 의무적, 때로 가식적으로 계속 기도만 하기보다 믿음부터 바로 세워야 합니다. 응답은 믿는 만큼만 됩니다. 당신은 지금 정말로 당신이 믿고 있는 그대로 기도하고 계십니까?
7/7/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