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가?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인생 말년에 아브라함은 외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합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백세에 난 아들을 실제로 칼을 들고 죽여서 제물로 바치려 했을 정도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제야 당신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는 칭찬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으로 우리의 귀감입니다. 그럼 우리 또한 정말 모든 것을 바칠 정도가 되어야만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는 것입니까? 우리 가진 것 전부, 그것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조차 전혀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바칠 수 있어야만 온전한 믿음입니까?
당연히 그러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께로 왔음에 그분께 돌려드림에 주저할 바가 없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이삭을 죽이기 직전 하나님이 중지시켰지만 졸지에 아들을 전부 잃은 욥이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이다.”(1:21) 말하자면 자기 아들을 죽인 여호와를 경외를 넘어 찬송까지 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단순히 바치는 것의 양과 질을 최대한으로 높여야 참 경외나 온전한 믿음이라고 간주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바치는 것에 비례한 믿음의 우열이 하나님 쪽에선 몰라도 인간 사회에선 필연적으로 형성될 것입니다. 사정이 여의찮아 많이 바치지 못한다고 그 믿음마저 열등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최대한이 아니라 전부를 바쳐야 한다는 의미로, 믿음의 더 정확한 정의이긴 하지만, 그쳐서도 안 됩니다. 자칫 무조건 독선적으로 앗아가거나 받기만 좋아하는 하나님으로 비췰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오로지 신자의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동반되는 자발적 순종일 뿐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치면서 마냥 기뻐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틀림없이 인간적 비애와 고뇌는 태산 같은 무게로 양어깨를 짓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에 대해서만은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경외심은 분명 가졌습니다.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순전한 믿음이 없는데도 그렇게 칭찬할 리는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야말로 하나님 혼자서 아브라함을 갖고 논 꼴 밖에 안 됩니다.
그럼 그의 믿음에서 자기 생명보다 더한 외아들 즉, 자기 전부를 바친 것 외에 더 따져볼 요소는 과연 무엇입니까? 지금 외아들을 바치면 하나님이 자기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완전히 무산될 판입니다. 물론 하나님으로선 또 다른 기적으로 그 약속을 이어갈 수 있겠지만 그가 당장 눈앞에 상식적으로 판단되는 상황은 그러합니다.
다른 말로 아브라함은 주위 환경이 하나님의 약속과는 완전 정반대로 향하고 있을 때에도 순종을 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전에 직접 확약하신 내용을 스스로 깨트리는 것 같은 말씀을 하셨음에도 순종한 것입니다. 비유컨대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라는 확실한 소명을 하나님께 직접 받았음에도 주변 상황으로 인해, 아니 다시금 하나님이 미국의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로 가라고 명하신 경우에 해당됩니다. 도대체 어린아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맞는데도 그는 묵묵히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최고 최대로 바치기는 비교적 쉬울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이나 약속이 충분히 믿을 수 있고 그분께 받은 여유가 있다면 말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도무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때에, 그것도 당신의 약속과 완전히 어긋나는 곳으로 이끌 때는 여유가 많음에도 바치기가 너무 힘듭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치고 안 바치고의 여부가 하나님 그분이 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와 동의 수준에 달렸습니다.
순종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종인 인간의 소관 사항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말로 명하는 내용의 합리성과는 전혀 무관하며 오직 명하신 분이 누구이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군대나 회사에서도 부하가 상관의 명령을 대하는 자세로 “안 되면 되게 하라!”고 강조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두고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주전체에 한 분 하나님일 뿐입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자 주관자입니다. 우주의 어떤 것도 그분에 힘입지 않고는 성장은커녕 생존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분의 명령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따질 수 있습니까? 나아가 거역할 수 있습니까? 그분이 말하시면 신자는 자기 목숨까지 내놓고 그저 그냥 순종만 하면 됩니다. 따로 토를 달 여지는 단 한 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말하지만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당신을 온전히 경외하게 되었다는 참 의미입니다.
그럼 앞에서 부인했던 것과는 달리 하나님은 여전히 독재자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적 순종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가운데도 아브라함을 향한 그분의 온전한 은혜는 따로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창15:3)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7:17,18)
그는 두 번이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자기 임의로 변개하려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면전에서 대놓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종을, 나중에는 첩에게서 난 자식을 하나님의 약속의 씨와 대체하려 했습니다. 그분의 뜻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단지 인간적 상식에 따르려 한 것입니다.
지금 모리아 산에선 거꾸로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겠다고 나선 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겠습니까? 두 번이나 하나님께 얼마나 큰, 아니 죽을죄를 지었는지 절감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기를 긍휼 가운데 붙드시어 신실하게 당신의 약속을 지키어 기어이 백세에 이삭을 주시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에 도무지 고개조차 들을 길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그분의 약속이 수정, 변개, 포기될 리는 절대 없고 반드시 이뤄질 것임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설령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들 백세에 아이를 낳았는데 또 다른 아이를 주시지 못할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너무나 가혹해 보이는 명령에도 그가 묵묵히 순종했던 이유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이 다다른 단계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기에 그분의 관점에서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그분이 지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기에 당신의 약속도 오직 한 분 하나님이 지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약속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은 전무(全無)합니다. 어찌 신자 쪽에서 그 순종함에, 비록 약속이 취소되거나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은 상황이 닥쳐도, 망설임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경외함의 본질입니다. 예배, 찬송, 기도, 말씀을 아주 거룩하고 경건하게 드리는 것보다 말입니다. 요컨대 그분을 제대로 알면 제대로 경외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1/8/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