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6,27 자유의지가 인간을 종으로 만든다?

조회 수 639 추천 수 14 2010.03.14 22: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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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가 인간을 종으로 만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숨어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마지막 6일 째 드디어 인간을 창조했다. 창조의 순서만 밝히는 기록이 아니다. 진화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맨 마지막에 나타났다고 인정한다. 앞글에서 밝혔듯이 인간은 다른 모든 것이 구비된 다음에 창조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기, 물, 빛은 물론이거니와 야채와 과일과 곡물보다 인간이 먼저 창조되었다면 생존조차 힘들었을 것 아닌가?

혹시 생존에 필요한 외적 환경은 다 마련되어졌지만 다른 동물보다는 먼저 창조되었을 가능성도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상당한 지능을 지닌 인간이 창조의 과정을 목격하게 되고 뭔가 기록하여서 혹은 구전으로 그 상세한 과정이 후대에 전해졌을 것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맨 마지막에 만드심으로 그러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의도를 확실하게 드러냈다. 그분이 인간이 쳐다보니까 두렵거나 쑥스러웠을 리는 만무하다. 창조의 전 과정을 모든 피조물로 모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의 독선적 배타성이 아니다. 창조가 진행되어지는 모든 과정과 모습이 그만큼 신비롭고 웅장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어떤 피조물이라도 직접 목격하면 놀라자빠질 정도로 엄청난 광경이었으며 또 아무리 살펴봐도 어떤 해석, 판단, 적용도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예외 즉, 인간이 관찰하게 되는 경우를 빼고는 말이다. 인간은 그분의 형상을 닮을 만큼 지혜로웠기 때문에 단박에 창조뿐 아니라 어쩌면 그분의 실체까지도 눈치 챌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그분의 신묘불측(神妙不測)한 지혜와 권능을 온전히 깨닫기는 피조물인 인간과 그분 사이의 괴리는 엄청나게 크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감춘 것은 인간을 그만큼 귀하고도 지혜로운 존재로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아니 당신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이미 인간은 그만큼 지혜로운 마지막 피조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인간보다 앞서 창조된 사자나 원숭이가 창조를 본들 대체 무엇을 알며 어떻게 기록을 남기겠는가? 반면에 인간이 사자나 원숭이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면 그 사정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겠는가? 최소한 창조의 주역이 따로 있으며 그분이 모든 피조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이 땅의 온전한 주인임은 온전히 인정할 것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실체를 부인하려야 할 수 없고 그분 앞에 두말 않고 항복했을 것이다.

이제 역으로 따져 창조의 과정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에게조차 비밀로 남겨둔 이유가 밝혀졌다. 인간이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를, 그것도 엄청난 권능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적을 보아야만 당신을 믿겠다는 심사를 사전에 막으신 것이다. 또 그런 권능이 확연히 보이는데 안 믿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당신을 찾기를 원하신 것이다. 엄청난  능력으로 인간을 무력화시키지 않아도, 아무 명확한 증거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당신을 더듬어서라도 찾게 만드신 것이다. 물론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롬1:20) 해놓으신 연후에 말이다. 최후에 창조된 인간은 이미 구비된 자연에서 너무나 아름답고 정교한 질서를 발견하면 창조를 보지 않아도 그 주관자가 따로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창조 당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여전히 숨어 계신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그 실체를 결코 볼 수 없다. 숨어 계신다는 것이 당신을 보여주기 싫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 분명히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이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진화나 창조나 결정적 증거나 자료가 없어도 정말 진지하게 찾으면 둘 중 어느 것이 진리인 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또 깨달으면 그분 앞에 엎드려 진정으로 겸손히 경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신의 실체가 육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너무나 큰 은혜가 된다. 인간이 추측, 계산, 기대하는 것과 당신의 권능과 은혜가 동일하다면 구태여 숨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그분의 그릇 크기가 인간보다 작아서 부끄러워 나서지 않을 리는 더더욱 없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지 않는가?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되므로 숨어 계신 것이다. 생일날 깜짝 놀랄만한 선물이나 파티를 본인 모르게 비밀로 하듯이 말이다.

첫 인간이 창조된 직후에 보인 반응이 어땠을까? 아담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하며 신비로웠을까? 내가 바로 아담의 자리에 있었다고 가정해서 상상해보라. 비록 창조자 하나님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인류 역사상 최고 최대의 서프라이즈 파티였지 않겠는가? 또 그 파티를 마련해준 주관자에게 진정으로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돌렸지 않겠는가? 인간이 맨 마지막에 창조된 가장 일차적인 뜻이다.  

창조의 궁극적 목적

인간이 마지막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또 인간이 하나님의 최종 작품이라는 뜻이다. 창조의 궁극적 대상이자 목표가 인간이다. 단적으로 말해 첫 5일 간은 인간 창조를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인간이 그분의 창조 사역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가장 중심일 뿐 아니라 유일한 의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실감이 나지 않는가? 미국은 한국전이 재발할 것을 염두에 두고 중성자탄이라는 신형 무기를 개발했다. 남북이 거리상 너무 인접해 있는데다 휴전선에 배치된 화력은 가공할 정도다. 서울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눈부시게 발전했는데 만약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다면 그 재건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그래서 시설물은 전혀 손상이 없고 인간만 죽는 폭탄을 개발한 것이다. 일단 서울을 비워주고 전략상 후퇴를 해도 중성자탄으로 북한군만 살상하고 무사히 서울을 탈환할 수 있다는 전략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 없는 서울시를 한 번 상상해보라. 그 높고 화려한 고층 빌딩들과, 사통팔달 발달된 지하철과, 수려한 한강 경관 등이 대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뉴욕에 사람은 모두 죽고 한 명만 남은 대신 온갖 동물들이 설치는 주제의 미국 영화도 있었다. 그처럼 지구 전체에 인간은 한 명도 없고 사자가 왕이 되어 어슬렁거린다고 가정해보라.

인간이 없는 창조란 아예 상상이 안 된다. 그랜드케년과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관을 보고 경탄해줄 존재가 없다. 불타는 저녁놀, 온산을 물들인 단풍, 호수에 비친 달을 보고 원숭이가 과연 시를 지을 것인가? 의미, 가치, 덕, 정의, 진리, 선, 아름다움, 사랑 같은 개념 자체는 오직 인간만이 인식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 개념들 인간만 깨달을 수 있다면 바로 그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인 것이 확실하지 않는가?

또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근본 목적이 본문에 나와 있다. 인간더러 세상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다스려야 할 대상인 다른 만물은 당연히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져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인간에게 가장 고급한 지성을 주고선 이제 너희가 알아서 정복 통치하여 군림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진짜 의도를 알 수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성경이 “우리”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절대자가 여럿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한다. 문제는 하나님이 다스려야 하고 다스릴 수 있음에도 인간으로 대신 다스리게 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계의 통치는 일단은 인간에게 전부 위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당신의 형상과 모습을 닮게 만드셨다. 만약 당신을 대신하여 다스릴 책임을 맡기지 않았다면 구태여 당신의 형상대로 닮게 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는가? 단지 다른 동물보다 가장 높은 지능을 부여하거나 아예 가장 힘이 세고 덩치가 크도록 만들면 된다. 인간이 없다면 사자가 왕이 되는 것과 같은 논리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대신 통치케 하셨다는 것이 인간을 최고급 피조물로 만들었다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께서 만드신 만물을 그대로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또 영원토록 그럴 것이라는 뜻이다. 만물이 자동적으로 운행되는 법칙을 제정하여 작동시켜 놓은 다음에 완전히 손을 떼고 멀리 초월해 있는 분이 아니다. 불신자들도 흔히 말하듯이 “조물주는 있는 것 같아.” 수준의 피조세계가 아니다. 그분의 피조물을 향한 사랑과 권능은 자연과 인간에 흘러넘치고 특별히 그분의 백성들을 통해 영원토록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그분은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 세웠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에는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이 땅을 통치하신다. 인간이 이 땅에서 활동할 수 있는 모든 시공간 영역 안에 그분은 사실상 충만히 임재해 있는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은 미리 제정된 당신의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며 그 틀을 벗어날 수 없다. 해와 달은 자동으로 운행 되며 물과 바람도 순리대로 흐르며 모든 동식물은 본능대로 생존 번식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만은 이 땅을 대리 통치시키기 위해서 그런 고정된 프로그램을 입력해 두지 않았다. 대신에 인간이 그분의 뜻대로만 통치하면 피조세계는 온전하게 운행될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직접적 간섭이 임할 것이다. 또 인간이 잘 통치하면 그 복은 전부 인간에게, 잘못 통치하면 그 벌도 전부 인간에게 돌아가게 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창조의 최종 목적이자 궁극적 대상이 된 까닭이다.  

청지기 직분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다스려야 하는 인간 고유의 특성과 역할을 신학적 용어로 청지기 직분(stewardship)이라고 한다. 이와 대조되는 두 가지 신분과 비교하면 그 뜻은 확실해진다. 그 둘은 바로 주인과 종이라는 위치다.

우선 종은 간단히 말해 어떤 사물이나 사안에 대해 소유권과 주권은 물론 통치권도 갖지 못한다. 스스로 판단하여 의사를 결정할 권한이 아예 없다. 오로지 주인의 명령에 의해서만 활동할 수 있다. 심지어 그 명령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물론 주인은 그 셋을 다 가진 자다. 청지기는 이 중에 소유권과 주권은 없지만 통치권은 가진 자다.    
성경에 청지기 직분을 가장 잘 수행한 대표적 인물이 있다. 바로 요셉이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總務)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 자기 식료(食料)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창39:4,6)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은 자신의 전 소유를 요셉이 다 관리하도록 했다. 심지어 요셉이 사업계획을 혼자 세워서 투자해도 되었다. 고대에는 주인이 신뢰하는 청지기에게 자기 돈을 맡겨 임의로 장사케 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다. 그런 배경에서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특별히 자기 권한으로 계약서를 다시 고쳐 작성한 청지기의 비유(눅16:1-8)를 하신 것이다.

보디발이 자기 식료 외에는 전부 맡겼다고 한다. 식료는 순전히 자신의 기호품(嗜好品)이다. 오늘 무엇을 먹을 것인지는 아무리 요셉이라도 정해줄 수는 없다. 그것만 제외한 것이니까 어떤 옷을 입을지 마저도 요셉이 정해준 것이다. 보디발 집안의 사실상의 주인이 요셉이 된 셈이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창41:40) 요셉은 감옥에서 알게 된 술 맡은 관원장의 추천으로 바로의 꿈을 해몽해주고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다. 바로는 너보다 높은 것은 왕이라는 타이틀뿐이라고 했다. 실제로 왕의 인장(印章) 반지를 빼주었다. 고대 왕들은 인장을 반지로 만들어 끼고서 어떤 문서든 그 반지로 보증했다. 그런 반지를 요셉에게 끼워줬으니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왕의 상징이던 세마포와 금 목걸이와 버금 수레까지 내주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뜻이 바로 이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의 인장 반지를 빼서 인간에게 끼워준 셈이다. 피조세계를 완전히 인간에게 맡긴 것이다. 당신만이 관리할 수 있는 자연에 이미 내장시킨 운행법칙을 빼고는 나머지 모두는 인간이 계획을 세워 자의로 관리할 수 있게 했다. 요셉이 애굽 국민들 앞에 왕과 같은 권력과 신분으로 왕 대신에 행하였듯이, 인간도 세상 만물 앞에 하나님과 같은 권력과 신분으로 하나님 대신에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청지기에겐 여전히 소유권과 주권은 없다. 요셉이 아무리 재산 운용을 잘해서 몇 배로 불려도 여전히 보디발과 바로의 것일 뿐이다. 또 그 재산을 요셉이 착복, 횡령, 파손은  물론 개인 목적과 용도로 임의 처분할 수는 결코 없다. 반드시 주인의 유익을 위해서만 관리해야 한다. 물론 청지기가 판단을 잘못하여 재산에 손상을 줄 수도 있다. 그래도 주인이 그 순수한 동기를 충분히 인정하면 둘 사이의 신뢰 관계는 이어지고 직분을 유지하며 여전히 제한 없이 권리 행사를 하게 해준다.  

만약에 요셉이 정직하고도 성실하게 그 재산들을 관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사리사욕을 채웠다면 당장에 그 청지기직은 빼앗기고 투옥 아니 사형까지 당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청지기의 임의통치권은 반드시 주인의 절대적 소유권과 주권 안에서만 행사할 수 있는 제한적인 자유다. 주인의 뜻까지 벗어날 수 있는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재량권은 아니다.

요셉이 비록 보디발의 처를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긴 했지만 엄연히 주인의 소유권과 주권을 침해한 사안이기에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아마 보디발로선 요셉의 해명을 어느 정도 신뢰했기에 감옥에 가는 벌로 그쳤지 진짜로 강간하려 했다고 판단했다면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애굽에 풍년이 들었을 때에 만약 요셉이 따로 부정축재를 했다면 7년간이나 총리직에 계속 머물 수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청지기 직분에 필요한 두 가지 자격

이제 하나님의 청지기로 인간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자격 요건이 드러났다. 요셉 같은 성실함과 정직함을 가져야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 둘은 죄악이 설치는 인간 사회의 청지기라면 가장 먼저 구비해야할 자격이다.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기독교 신앙의 소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땅히 갖추어야할 근본 요소다. 부정직하고 게으른 자는 청지기는커녕 아예 인간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할 것 아닌가?

청지기는 소유권과 주권을 가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실상 통치권마저 제한되었다. 주인의 뜻과 유익을 위해서만 그 통치권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 가장 먼저 요구되는 자격은 주인의 뜻을 잘 헤아리는 능력 내지 지혜다. 하나님과 온전한 교통이 가능해야 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로 창조한 것이 셋이 있는데 그중 마지막이 인간에게 영혼을 불어 넣어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27절)라고 ‘바라’(창조)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이 전혀 갖지 못한 영혼을 갖고 있다. 인간에게 만물의 통치권을 맡겼지만 원주인인 당신의 뜻을 제대로 헤아려 다스리라는 것이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1,12)

바울은 예수로 인해 거듭난 인간은 그 구원의 은혜를 성령의 지혜로 깨닫게 된다고 했다.   구원이란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만드시고 당신의 영을 부어넣어 주신 상태로 되돌아 간 셈이다. 사단이 차지해 있던 전적으로 타락된 영혼에서 사단이 물러가고 성령님이 대신 좌정한 것이다. 예수 믿은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여 청지기 직분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 쪽에서 보면 신자를 통해 이 땅을 당신 뜻대로 거룩하게 다스릴 수 있는 기회를 회복한 것이다.  

둘째로 인간이 청지기 직을 수행하기 위해선 당연히 자기 임의로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생존과 번식의 두 기능만 수행하는 본능만 가진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달라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시행할 수 있어야 했다. 바로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신 까닭이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전적 소유권과 절대적 주권이 전제된 자유의지다. 그분을 무시한 채 멋대로 시행하거나, 무시하라고 주신 자유는 아니다. 비유컨대 자녀를 향한 부모의 뜻은 공부 열심히 하고 인격을 올바로 가다듬어 온전한 성인이 되라는 절대적 한계가 있다.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직업을 가질지는 전적으로 자녀의 뜻과 계획에 달렸다. 그러나 자녀가 조직폭력배나 사기꾼이 되어도 좋다는 자유는 결코 아니지 않는가?  

자유의지의 역할

그런데 문제는 지금껏 자유의지는 너무 선악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설명되어왔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거나 순종하는 선택에 그 의지를 사용하도록 주어졌는데 인간은 의도적으로 그분을 배역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물론 전혀 하자가 없는 설명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도덕적 실태만 해명하느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더 근본적 의도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말하자면 불신자들로부터, 일부 신자도 포함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줄 미리 알고도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반발 내지 불만을 사고 있다. 마치 자유의지가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 주범처럼 되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 자라도 자유의지가 단지 선과 악을 선택하는 역할만 하는 양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혹은 그 이전에 인간이 인간답게 창조되려면 반드시 자유의지는 필요했었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존재 내지 실체와 연결하여 더 폭넓게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자유의지야말로 인간이 정말로 인간다워지는 즉, 하나님의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게 만드는 두 기둥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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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영혼이었다. 자유의지가 없고 영혼만 있다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순종하는 천사 같은 존재가 된다. 영혼도 없고 자유의지도 없다면 완전히 짐승과 같아진다. 자유의지는 만물을 하나님 대신에 다스려야 하는 청지기직에 필수불가결이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더러 만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아니 인간을 창조할 목적 자체가 실효(失效)되며 더 나아가 창조 자체도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자유의지는 선악 간에 선택하는 과제를 넘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느냐는 문제다. 더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갖고 있되 소유권과 주권은 그분께만 있음을 의지적으로 철두철미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통치권을 재량껏 사용하되 그분의 거룩하고 온전한 뜻의 한계 내에서 하는 것이다. 단순히 도덕적 죄를 범치 않는 정도가 아니다. 도덕적 선을 실천하는 측면은 기독교 신앙의 일부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자발적으로 따를 때에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것은 선악과 금령 제정 이전에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다. 자유의지가 없으면 선악과 금령도 아예 성립이 안 된다. 성경 기록의 순서상 문화 명령으로 불리는 이 본문보다 마치 선악과 금령이 뒤에 제정된 것처럼 보인다. 또 선악과라는 문자적 의미 때문에 자유의지의 역할을 도덕적 측면에 한정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선악과 금령의 의미는 자유의지를 주신 목적과 단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어폐가 있긴 하지만 어떤 하나님이라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야 하고 또 선악과 금령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다워지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떠나선 인간으로서 절대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유의지를 그분의 절대적 소유권과 주권을 벗어나게 행사하면 당장 죽음을 면할 수 없다. 보디발이나 바로에게 반항하는 요셉을 상상해보라. 가당치나 한 일인가? 반면에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을 부인하는 자라면 얼마든지 제 멋대로 살 것이다. 물질에서 진화되었는데 어떤 극악무도한 짓을 한들, 비록 그 짓을 함에 거리낌이 있고 싫어할지라도, 무슨 문제가 되랴?  

그런데 어떤 인간이라도, 기독교 신앙이 없는 자라도라는 의미임, 악을 행하기 전에 심적 부담을 느끼고 행하고 나면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생긴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자유의지의 사용에 이미 뭔가 제한이 가해져 있었거나, 다른 부분에 뭔가 잘못이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 이유는 물론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인간의 영혼이 타락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에 따라 자유의지의 사용에도 자연히 모순과 왜곡이 생긴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진화론자가 자유의지를 사용해 자기 임의로 선택해서 행했는데도 행위 전후에 양심과 죄책감의 제약을 받았다. 그럼 자신이 온전한 주권으로 선택한 행위가 아닌 셈이다. 쉽게 말해 자신은 물질이 진화되어서 제 멋대로 한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비유컨대 요셉이 청지기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인양 생각하고 제 멋대로 행한 것이다. 그 결과는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유의지는 선악이라는 도덕적 측면을 넘어서, 반드시 그것도 포함된다는 의미임,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인간 존재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재조명 혹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영혼과 자유의지는 인간을 진짜 인간답게 만드는 두 가지 필수요소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게 창조된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이라는 것이다.

결국 자유의지는 창조주의 은혜와 권능의 틀을 벗어나 행사할 수는 없다. 아예 벗어나지 못하게 기계적으로 묶여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 자유의지가 아니다. 벗어날 수는 있지만 벗어나는 순간 그분의 은혜와 권능의 공급이 당장에 중단된다는 것이다. 모든 선한 것은 그분께로 오는데 그분을 벗어나는 순간 죄악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의지가 하는 역할은 인간이 마음 놓고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게 하려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영혼의 주파수를 부단히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데 자기 지정의의 모든 것을 의지적으로 걸라는 것이다. 그것도 기꺼이 자발적으로 말이다. 요컨대 자유의지가 하는 기능은 인간으로 철저한 청지기 의식을 갖고 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세 종류의 인간

청지기 의식과 대비 되는 것은 종과 주인 의식이라고 했다. 바꿔 말해 모든 인간은 피조 세계 즉, 자기가 처한 여건과 인생 등에 관해서 반드시 이 세 가지 의식 중에 하나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인간은 세 종류로 나뉠 수밖에 없다.

먼저 주인 의식은 보이는 모든 것이 인간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제 멋대로 자기 능력껏 행하기만 하면 된다. 이 땅이 전부로 인간이 얼마든지 정복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 공동체의 생존과 번식에 심각한 장애만 주지 않으면 된다. 하나님을 향한 영혼은 없고 온전한 의미가 아니라 형식적 의미에서 자유의지뿐인 인간 즉, 짐승으로서의 인간이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도 조절하지 못하면서 다른 모든 것이 자기 것이며 자기 통제권 안에 있다고 믿으니 세상에 이런 착각도 없다.

자연을 자기가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다고 믿으니 자연히 누가 먼저, 많이, 좋은 것으로 차지하느냐만 문제될 뿐이다. 아프리카 정글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인생사에도 그대로 복사판으로 적용된다. 먹고 먹히는 싸움만 있다. 시기와 분쟁이 끊일 수 없다. 자유의지를 마음껏 사용하여 완전히 자유롭게 살려고 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도무지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의지가 오히려 자신을 묶는 수단이 되었다. 모든 사고와 행동이 물질에서 시작되어 물질로 마친다. 결국 물질에 묶여 물질의 종이 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없다고 부인하고 오직 물질을 신으로 모신 당연한 결과다.

세상의 불신자가, 정확히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갖는 인생관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니 어느 누구도 관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있을 리가 어디 있어. 눈에 전혀 보이지도 않는데... 설령 있다고 쳐도 알게 뭐람. 누가 뭐래도 내가 내 맘대로 사는데. 신이라고 간섭할 수 없어. 아니 간섭하는 신이라면 그 신이 잘못된 것이지. 나로 형통하게 해줘야 신이지 그렇지 않다면 아예 믿을 필요도 없어.”

둘째는 하나님에 대해선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자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알 필요가 없다고 아예 제쳐둔 것이다. 인간이 제 멋대로만 살 수 없으며 뭔가 더 큰 힘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세상에 온갖 모순과 죄악이 횡행하고 자연재앙이나 사고로 애꿎은 사람들이 죽으니 도무지 믿을 만한 신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그런 복잡한 문제는 전혀 생각하지 않기로 작심한 것이다.

마치 구름에 달 가듯이,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인생을 그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특별히 애를 쓸 필요도, 무엇을 이루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도리어 자신을 자연과 환경에 완전히 묶이게 만들었다. 너무나 복잡 미묘한 환경과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에 어떤 소중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인생이란 으레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치부하고 치운다. 불신자 중에서 불가지론자의 입장이다.  

간혹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 중에서도 종의 의식을 갖는 경우가 있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길 가다 차가 고장 나면 아무리 고급차라도 신의 뜻이라고 차를 버리고 걸어가는 극단적인 경우가 있다. 숙명론적 신앙을 가진 자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상실되어 있다. 자기 일생이 사전에 결정된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는 인간로봇일 뿐이다.

기독교 신자 가운데도 비슷한 의식을 가진 자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자기 계획과 소망은 인간의 욕심으로 간주하여 간구하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치운다. 자신을 완전히 비운 아주 좋은 신앙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아주 부족하다 못해 잘못된 신앙이다.

범사를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주관하시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만물을 다스리는 청지기로 삼으셨다. 또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즉, 신자의 개인적 계획과 소원이 상충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계획과 소원이 다 거룩하고 아름답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인간을 당신 대신에 청지기로 삼았으니 인간더러 임의로 자기 인생을 끌고 가게 허락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뜻에서 벗어나게 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은 당신께서 반드시 이루시기에 신자라면 아무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한 것 같지만 그 뜻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유의지를 정말 자유롭게 사용하여 빚어낸 세 결과가 아주 흥미롭지 않는가? 세 종류의 인간 모두 각기 다른 주인을 모시는 종이 되어버렸다. 먼저 진화론자 내지 무신론자는 물질의 종이 되었다. 불가지론자는 환경의 종이 되었다. 신자 또한 자발적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종이 된 자이지 않는가? 물론 신자의 종됨은 오히려 자유함을 얻는 것이므로 다른 둘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안에 그 평생이 붙잡혀 있음으로써 그분이 주시는 모든 복락을 마음껏 누리는 종됨이다.  

어쨌든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행한 결과가 이렇다면 그 자유의지는 애당초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또 완전히 무제한의 자유의지도 아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즉, 청지기로 살라고 주신 자유의지였다. 그러나 죄로 왜곡된 자유의지는 스스로 물질과 환경의 종이 되는 길로 가버렸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그 의지가 제대로 회복된 자만이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청지기 의식

따라서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자 인간이 취해야 할 가장 온당한 태도는 바로 정당한 청지기 의식을 갖는 것이다. 자신이 큰 소망을 갖고 계획을 세워서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자신의 의지로 그 일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단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먼저 점검해야 한다.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과 인생을 보는 태도 등을 오직 하나님의 창조라는 큰 틀 안에서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청지기 의식을 단순히 재물을 정직하게 다스리고 또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다는 측면에만 국한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만물을 정복하고 통치하라는 명령에 더 충실해야 한다. 물질계를 그분의 뜻에 맞게 다스리는 것은 물론 맞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탐욕은 당연히 버릴 뿐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도 절대 여기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하고 나아가 어려운 이웃과 나눠야 한다.  

그러나 흔히 문화 명령이라고 불리는 본문을 문화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 앞에 세웠다는 인간 특유의 정체성을 확고히 붙들어야 한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신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청지기 의식이 물질의 관리 방식을 넘어 하나님 창조 안에서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필연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간만의 신분과 자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에 걸쳐 청지기 의식을 갖고 살아야만 한다. 나의 생명, 삶과 죽음, 생각 말 행동도 전부 하나님의 선하고 거룩하신 뜻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불신자나 불가지론자와는 판이하게 달라야, 정확하게 말하면 정 반대가 되어야 한다. 오직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하늘의 보물을 땅에 옮겨와서 심는 방식이어야 한다. 생존과 번식을 넘어서 거룩하고 온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로 일관되어져야 한다. 그분 대신에 세상의 죄악과 사단과 사망 앞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또 올바른 청지기의식은 자기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주위를 보는 관점과 그 주위와 맺는 관계 전부가 그 의식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부모, 자녀, 가정, 직장,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와 그 소속원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대신 구현하여야 한다. 세상 만물과 인간 만사의 소유권과 주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달렸으되 자신은 단지 그분의 거룩한 뜻에 쓰임 받는 도구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무리 작은 일에서도 그분의 영광스런 빛이 비추일 수 있도록 충성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도덕적 종교적으로 심오하고 경건하게 따져 볼 필요까지는 없다. 바로 종의 의식이나 주인 의식을 갖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주인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울타리를 부인하지 않고, 종처럼 짐짓 외면하지 않으면 된다. 그분의 품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갈망과 열의만 있으면 된다.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이루겠다는 생각과 습성과 고집을 자꾸 죽이는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선하고 아름다우니 받아 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자꾸만 솟구치는 인생에 대한 주인 의식 또는 종의 의식을 의지적으로 부인해야 한다. 삶이 물질에 묶이지 않게 하고 또 아무 의미 없이 인생을 흘려보내지 않아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그분과 함께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      

다윗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시8:1)라고 찬양했다. 온 땅이 창조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하늘 위의 영광을 알게 하는 영혼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다. 또 온 땅에 주의 이름을 더욱 아름답게 드러나도록 다스릴 수 있는 자유의지도 주셨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시8:2)라고 선언했다. 앞 절과 연결해서 해석하면 창조에 나타난 인간의 정체성만 제대로 알아도 비록 세상에선 어린아이나 젖먹이 같은 모습일지라도 더 이상 두려울 대적은 없다는 것이다. 청지기 즉,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다스릴 자 앞에 감히 어떤 것이 맞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지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우고, 당신께서 만드신 만물을 발 아래 두어 다스리게 하셨다고 담대히 선포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마지막에 창조하셨다. 인간이 창조의 궁극적 대상이자 목표였다.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게 했다. 어찌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그런 형상을 가진 자라면 어찌 이 땅의 대적들에 대해서 두려워할 여지가 있는가? 나아가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려면 피조세계 특별히 신자와 멀리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 언제 어디서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함께 바로 곁에서 동행해 주어야 한다. 온전한 청지기 의식은 바로 이것이다. 창조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 한대로 자기 존재를 거룩하게 바꾸고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서 거룩한 인생으로 마감하는 것이다. 예컨대 요셉과 다윗처럼 말이다.

2/28/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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