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정녕 염려한 것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46:3,4)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당신께서 함께 하시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어떤 통계로는 365번 등장한다고도 합니다. 일 년 365일 매일이 힘든 고난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하나님도 잘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원죄 하에 태어나고 또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께 벌을 받은 마땅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역으로 따지면 모든 인생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더 정확히는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은, 그 두려운 마음부터 없애는 것이 됩니다.
문제는 이미 사단에 넘어가 흑암으로 물든 영혼의 상태로는 그 일을 스스로 이룰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묶고 있던 사단의 권세를 끊어준 은혜 가운데 들어와야만 합니다. 구원이란 그래서 항상 불안해하는 인간의 마음을 고쳐 주신 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1:7)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야곱처럼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새로운 큰 일이 생기면 여전히 불안이 엄습합니다. 물론 그 첫째 까닭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생소함과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자연발생적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천국의 소망을 갖고는 있지만 육신적 죽음 앞에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 더 중한 원인은 원죄로 생성된 심판에 대한 두려운 마음은 기본적으로 제거되었지만 사단에게 묶였던 흔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귀신과 그 더러운 기운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속박 받는 것을 귀찮고 불편해하는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이 살아 있습니다. 아담이 분홍빛 미래를 상상해 제멋대로 했지만 정녕 죽음을 맞았듯이, 믿음 안에 들어온 신자도 그 본성에 져서 아담이 실패한 전철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매번 되풀이하는 실패는 자아를 깨트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절대 속박이 아니며 오히려 크나큰 축복임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거나 수시로 잊는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인간을 철두철미 농락하며 속였던 체험이 너무나 강하게 남아 있어서 또 다시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란 신자가 스스로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뒷전으로 밀어내는 모든 행동, 말,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당신의 약속을 두고 구태여 정녕 이뤄지리라 강조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러시는 까닭이 바로 잘 믿는 자마저 죄의 본성에 넘어가 수시로, 아니 평생을 두고도, 불안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성경을 통해 신자가 불안이 생길 때마다 즉, 365일 내내 “정녕 당신께서 함께 하시므로 두려워 말라”는 약속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은 자세히 볼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만 해석해도, 야곱이 정작 불안해진 까닭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우선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고 했으므로 분명 그에게 미래 상황에 대한 불안감은 생겼습니다.
그러나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애굽 총리의 아비 자격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을 것이 확실함에도 그런 불안이 생겼으니 말입니다. 무슨 뜻이 됩니까? 야곱은 애굽에서 바뀔 자신의 여건과 상황 즉, 자신의 안일과 형통에 대해 염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야곱의 심령을 꿰뚫어보신, 혹은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그가 진짜로 염려한 내용들을 열거하신 것입니다.
그 염려는 구체적으로 네 가지였습니다. 우선 애굽이란 타국에 가서 살면 여호와 하나님만 알고 따라야 할 자기 후손들이 자연히 그들과 동화되거나 핍박 받아 쇠약해지지 않을지 염려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는 하나님 약속의 성취여부를 걱정한 것입니다. 선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약속이 자기 때문에 혹시라도 변개, 취소되지나 않을지 불안했던 것입니다.
둘째 염려는 그래서 하나님이 애굽으로 동행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의 자녀를 떠날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으로선 지금의 애굽 이주가 단지 기근을 피하고 총리 집안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인간적 욕심이 앞선 것은 아닐지 자꾸 자신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나고 또 모든 주변 상황이 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요하지만 말입니다.
이제 세 번째 염려에 대고 하나님은 “정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으로 되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을 가장 걱정했다는 뜻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가 속임수로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탈취하고, 이방 땅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갖은 고생을 다 참아내고, 죽음의 복수를 당할지 모르면서도 기어이 되돌아 와야만 했던 그의 평생은 오직 그 땅을 향한 강한 집념 때문이었지 않습니까?
그 집념이 결코 땅 부자가 되려는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민족 위에 그 이름을 창대케 하여서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시겠다는 언약을 가장 크게 누리고 또 후대에 전해주어야 하는 장자(長子)가 되고 싶었던 열망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 안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겠다는 끈질긴 고집으로, 심지어 때로는 인간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일관되었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맡긴 하나님의 소명이 제대로 완수될지 여부를 그는 “정녕” - 가장 크게 걱정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사랑했던 아들 요셉과 또 다시 이별하게 될까 염려했습니다. 단순히 그에 대한 편애만은 아니었습니다. 열두 아들에서 하나라도, 특별히 요셉은 거의 애굽 사람이 다되었을 것이므로,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자기 후손 전부가 오직 여호와의 은혜와 권능 안에 붙들려 있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염려를 야곱의 장례를 요셉이 치러줄 것이라는 약속으로 씻어주었습니다. 요셉이 당신의 언약에서 벗어날 리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야곱이 염려한 내용 전부가 이미 받았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여부였습니다. 비록 고향에 돌아오고 또 요셉과 다시는 헤어지기 싫다는 개인적 소망도 드러났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언약에서 기인하여서 언약으로 결말지어져야할 염려였습니다. 자신의 안위와 형통에는 사실상 어떤 염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일이 제대로 이뤄질지 염려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 신자가 시건방지게 절대자 하나님을 되려 걱정해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길 바라고 또 바랐던 것뿐입니다.
그는 구약의 족장시대 사람이었지만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대로 이미 따랐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그러므로 나의 일용할 양식에 대해선 아무 걱정도 하지 않겠습니다.” 애굽 총리의 아비로서, 아니 그 이전에 현실적 지혜의 최고 고수인 그가 일용할 양식을 걱정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저를 필두로 많은 신자들이 “오래되고 굳세며 뜨거운 믿음(?)”으로도 거의 평생을 두고 염려를 잘 없애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비로소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일신상의 안위와 형통에만 자꾸 적용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약속을 받을 때부터 그렇게 이해하고 약속의 이행을 점검하는 과정에도 오직 자신과만 연계시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의 실천 여부는 일단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레 나타난다고 여깁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형통하는 것만큼 자기 주위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잘 증명하는 일이 없다고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믿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성경 말씀 중에 자신의 현재 형편과 가장 잘 부합하여서 제일 쉽고도 편하고 빠르게 해결해 줄 것 같은 약속만 골라 읽습니다. 자기 사정에다가 가장 적절한, 사실은 자기 편의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넣는 것입니다. 감히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을 대신해 그분과 같은 약속을 하는 꼴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께 받은 일생의 소명을 자기 모든 것을 걸고 이루고야 말겠다는 소망과 열정을 찾아보기 너무 힘듭니다. 아니 그런 일에 아예 관심이 없는 신자도 꽤 많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어 구원 받았다는 것이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화목의 직책을 받는 것이라는 원리조차 모릅니다. 그저 잘 믿기만 하면 천국이 보장되고 현실에서도 형통하리라 기대합니다.
개인적 안위와 형통에만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접목시켜선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불안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일차로 외부환경에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마련이므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 걱정이 생기에 마련입니다. 그 일차 반응을 잘 절제하여 이겨내야 할 지성과 의지도 사실은 연약하며 불완전한데다 죄의 본성이 살아있어서 온전하게 작동되기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개인적 고난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믿음의 사람도 그 세기는 달라도 어떤 형태이든 염려를 안고, 혹은 잠복해서, 갑니다.
일신상의 안위와 형통에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넣을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 안에 일신상의 문제를 녹여서 집어넣어야 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환난과 문제를 믿음으로 견디며 이겨낸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자신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야만 인생사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불안감을 떨쳐내고 환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야곱처럼 자기 일생을 통해 그분이 이루시고야말 일이 있음을 확신하고, 가능한 구체적으로 그 뜻을 알아서 자기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야곱도 물론 인생의 초창기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장자권를 탐낸 것이 인간적 욕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장자권을 재조명하니까 자신의 비전으로 굳어졌습니다. 또 모든 인생사를 그 비전에 비추어 해석하니까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평생에 염려가 든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그래서 항상 성령에 취해 평강과 기쁨이 넘쳤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여 불안이 생기면 단순히 믿음으로 이겨내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소명을 온전히 다시 붙들 때에 그 불안을 부차적인 문제로 약화 내지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의 근심은 자신만의 개인적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생긴 하나님이 심어준 근심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오직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될 것만 염려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로 걱정하게 만드신 근심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0,11)
자신의 현실적 안일과 형통만 바라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부추기려고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더러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을 없애거나 줄이기는커녕 더 크게 만들어 달라고 간구하는 꼴 아닙니까? 또 그러는 것이 작금 더 뜨거운 믿음인양 호도되고 있지 않습니까?
인생사는 누구에게나 파란만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 하나 없다”는 속담이 바로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런 인생에서 불안 염려를 없애는 길은 그런 세상적 염려를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으로 바꾸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거나 그분의 일에 양껏 충성하지 못해 생기는 근심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나를 통해 드러내시고자 하는 의와 영광을 마음껏 열망하는 근심입니다. 그래서 그 일에 아주 적은 일에서부터 자신을 바치는 실천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 아니 확신할 때만이 평생을 붙드는 염려를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현실에 끊임없이 닥치는 시련이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비장의 무기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시련을 없애야만 불안이 없어지는 것은 믿음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또 믿음으로 시련만 없애려 시도하는 것은 모든 이방종교가 다 권하고 실천하고 있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독생자까지 내어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신자에게 닥친 시련이야말로 그분의 영광이 가장 극명하게 잘 드러날 수 있는 지름길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히 받으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라는 권면을 한 바울 사도의 당시 형편도 어땠습니까?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7:5) “그러나 비천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6절)듯이,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책망한 자신의 편지로 인해 근심하더라도 성령님이 역사하시어 너희로 깨끗케 하는 구원으로 인도했지 않느냐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일은 신자의 궁핍과 부요와 아무 상관없이 당신께서 반드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주신 어떤 약속도 당연히 그러합니다. 따라서 야곱처럼 평생을 붙들 약속이 있는 자라면 일상의 염려에 붙들릴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근심을 해도 그 약속 안에서 하고, 그 근심을 없애는 것도 그 약속 안에서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참 신자라면 평생토록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해야 할 그분의 근심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일상의 근심은 완전히 뒷전이 되어버립니다.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만 열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땅에서 이루지 못한 자기 뜻을 하늘에까지 끌고 올라가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쓸 시간과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1/1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