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과연 영생할 수 있었을까?
- 선악과에 대한 셋째 의문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선악과 금령에 대해 대표적으로 품는 세 가지 의문 중에 마지막을 알아볼 차례다.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과연 영생했고 또 그 후손인 우리도 불로장생할 수 있었을지 여부다. 그 답을 따져보기 전에 사실은 이 질문자체가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부터 먼저 깨달아야 한다.

예컨대 가난한 집에 태어나 학비가 없어서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고학생은 이왕이면 재벌가에 태어났더라면 이런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미국 유학생들은 좀 더 일찍 미국에 왔더라면 영어를 훨씬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여기다가 이왕이면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 두 소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미 자기 소원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졌고 도무지 되돌릴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이미 하나님을 거역해 선악과를 따먹었고 하나님도 생명나무를 에덴에서 옮겼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이전 상태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다. 아담이 하나님의 벌을 받은 원죄 상태로 태어난 인간의 수명도 한정되어졌다. 과학과 영양의 발전으로 조금은 늘릴 수 있을지 몰라도 육체적 죽음 자체를 없앨 수는 결코 없다.  

그럼에도 이 질문의 답을 한번 추적해보려는 이유는 불신자들에게 변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앞선 두 질문과는 달리 오히려 믿는 자의 의구심을 씻어주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신자의 의구심보다는 미련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질문의 저변에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깔려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주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는 관련이 없지만 더 성숙하게 자라기 위해선 한번쯤은 정리해둘 필요는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인가?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2,24)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가장 염려한 것은 혹시 그 타락한 상태에서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어 영생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럼 만약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실과를 먹었다 해도 분명 영생했다는 뜻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 중에 어느 쪽을 먼저 먹어야 할지 그 순서는 고려 대상에서 일단 제쳐두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아담이 당신의 명을 위반하자 생명 나무 과실을 옮겨서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벌을 확실하게 내렸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육체적 영생도 누렸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은 분명히 옳다.

그래서 그 원죄 하에 태어나는 후손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신령한 몸을 언젠가는 덧입고자 하는 소원과 기대만 가지게 되었다. 아담으로 인해 실패했던 영생의 길이 마지막 때의 부활 가능성으로 대치 또는 연기되었다. 단 아담에게 물려받은 원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히 씻음 받은 자에 한해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4-5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모든 눈물은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마지막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때에는 다시 사망이 없다고 했다. 마땅히 육신의 사망도 없지만 무엇보다 이젠 인간을 통해 악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와 그 근원인 사탄과는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라.”(계22:1,2,5)

대신에 에덴동산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생명 나무가 열두 실과 즉,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먹고 남을 만큼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진정으로 부르는 자는 마지막 때에 온전하고도 영화로운 육신의 몸을 다시 입는다. 그분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된다. .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아담의 배역으로 육신적 영생은 물거품이 되었고 마지막 때에나 누릴 수 있는 소망으로 대치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죄의 삯이 사망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선악과 금령을 어겼을 때에 정녕 죽게 된다는 뜻이 그것이 전부일까, 아니 진짜 육체적으로 죽게 된다는 뜻일지 조금 더 음미해볼 여지는 있다.

기독교 교리를 듣고 온전히 납득이 안 되면 반드시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수학공식 암기하듯이 받아들여선 안 된다. 수학 공식이야 시험 점수를 잘 받느냐 못 받느냐만 좌우하지만, 성경 말씀은 영원한 운명을 비롯해 인생의 모든 면에 결정적이고도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데 어찌 이해도 되지 않는 교리를 무조건 수용만 하고 치울 수 있겠는가?

교리로 정리될 수 있는 성경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들을 교회에서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그 교리가 실제로 역사하여 은혜와 권능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오직 일대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객관적 교리라도 신자는 반드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 그분과의 온전한 언약으로 변화시켜 자기 몸에다 새겨두어야 한다. 은사, 체험, 신비주의를 강조하려는 뜻이 아니다. 교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온전히 이해하여서 자신의 삶에 실현하는 것이 바로 개인적 신앙 체험이라는 뜻이다.    

성경말씀이 난해(難解)하다는 것은 본문 그대로 읽었더니 뜻을 잘 모르거나 완전한 실감을 하지 못하는 경우다. 문자적 신학적 해석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살아 있는 생생한 신앙으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아무리 목사님에게 문의하거나, 혼자 계속 묵상해도 여전할 때가 많다. 지금 다루는 주제가 그런 대표적인 경우다.

그럴 경우는 역(逆)으로 가정해 따져보면 의외로 쉽게 문제 해결의 키를 발견할 수 있다.  수학에서 3+4=7이라는 해답이 맞는지 틀렸는지 의심날 때는 어떻게 하는가? 7-4=3으로 검산해보지 않는가? 어떤 사안이 확실히 그렇게 되려면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 둘 다 만족시켜야 하듯이, 본문대로 해석한 내용을 역으로 따져보는 것이 신앙성숙에 큰 도움이 된다.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현실적으로 가정해보라. 모두가 영생을 얻었을까? 그러면 지구상에 발 디딜 틈도 없는 인구폭발이 되었지 않겠는가? 또 이 땅에 악은 드러나지 않고 선만 실행했다면 그래서 모두 육체적으로 영생했다면 이 땅에는 인간보다 천사 내지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들만 남아 있지 않겠는가?

먹지 않았다면 육체적으로 영생했을 것이라는 가정 자체를 다시 역으로 따지면 먹었으면 당장 죽었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바로 죽지는 않았다. 대신 얼마간의 수명을 허락받고는 죽었다. 또 초기의 인간은 지금보다 수배나 오래 살았으며 거의 천년이나 살기도 했다. 번성하여 생육하려면 당연히 장수하며 자식을 많이 낳았어야 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수명을 허락한 후에 죽일 양이었다면 하나님이 꼭 먹지 말라는 절대부정 형식으로 당신의 의지를 강조하지 말았어야 했거나,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정녕 죽는다고 재차 강조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근 천년이나 살 수 있다면 오늘날의 수명과 비교하면 사실상 육신적 영생이나 다름없다. 또 실제 그렇게 오래 살면 인생에 더 이상 미련도 남지 않고, 어쩌면 계속되는 수고와 환난 때문에 오히려 빨리 죽었으면 바라기도 할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지금 타락하지 않았다면 육체적 영생을 누릴 수 있었다는 성경 진리를  부인코자 하는 뜻이 아니다. 서두에 말한 대로 이 질문 자체는 아무 의미와 소용이 없다.  단지 신앙을 견고히 세우기 위해 죽음에 대한 의미를 좀 더 깊이 따져 보자는 뜻일 뿐이다.

죄와 죽음의 연관관계

무엇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음에도 즉사(卽死)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죄와 육신적 수명 내지 죽음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뜻이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죽음이 죄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연관 관계는 더 폭넓은 차원의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에서 강조하려는 초점이 육신적 죽음보다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이다.

앞 장에서 배운 선악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 선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종교적으로 경건한 것을 떠나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께 순종하면 모든 선한 것의 궁극적 근원이신 그분으로부터 선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행할 선의 근거, 기준, 판단, 분별 등을 오직 절대적이고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께만 두어야 한다. 궁극적 구원과 심판도 당연히 오직 그분의 몫이다. 나아가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소망, 열정, 능력, 기회, 여유마저도 그분만이 공급해주신다. 신자가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선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고 실천할 힘도 그분께 얻을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땅의 모든 악은 그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근원인 사탄으로부터 온다. 인간이 적극적으로 그를 따르려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벗어나면 자동적 즉각적으로 사탄의 노예가 된다. 그 결과는 무엇보다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나아가 악을 행할 힘을 사탄에서 직접 공급받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을 행할 소망, 열정, 능력, 기회 전부에서 차단된다. 자연히 그 일생이 악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그런 선악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그 과실을 따먹는 순간 사단의 종이 되었다. 정확하게 말해 하나님을 배역하는 순간 이미 사단에게 넘어갔고 그 결과로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런 상태에서 생명나무 과실도 먹으면 영영 구원할 길이 없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옮기시고 대신에 사단의 머리를 밟을 여자의 후손을 예비해 놓으셨다. 비록 아담과 그 후손들이 사단의 종이 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구원할 길을 에덴동산에서부터 활짝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담이 순종하였다면 그 후손의 구원 방안은 어떻게 되겠는가? 참으로 미묘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앞에서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과실을 따먹는 “순서”가 문제될 수 있다고 언급한 이유다. 두 가지 경우, 구체적으로는 세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선악과를 먹기 전에 생명나무과실부터 먹는 경우다. 그럼 도덕적으로 완전 중립인 상태에서 즉, 진정한 선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육체적으로 영생해버린다. 인간이 선악을 모르면 그 실현도 전혀 불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이 바라셨던 바가 전혀 아닐 것이다.  

창세기 3:22에 따르면 육체적으로 영생한다는 것은 어떤 특성이 그대로 굳어져서 아무 변함없이 끝까지 이어진다는 의미이지 않는가? 또 그래서 생명나무를 먼저 먹고 선악과를 그 후에 먹는 경우는 아무 의미가 없기에 검토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미 도덕적 중립 상태로 굳어진 후인지라 변화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반대의 경우는 현재 성경이 기록된 그대로다. 하나님을 배역하여 선악과를 먼저 먹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생명나무를 먹느냐 마느냐의 두 가지 경우를 가정해볼 수 있다. 만약 먹게 되면 3:22대로 구원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타락한 아담이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하게 아예 하나님 쪽에서 먼저 옮겨버렸다.    

창3:22에 드러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어디에 가있었는가? 아담과 그 후손의 구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만은 어떡하든 막으려 했지 않는가?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반드시 실현시키시려는 뜻이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라면, 생명나무 과실을 먹든 안 먹든 간에, 그 후손에 대한 구원 기준도 여전히 선악과 금령이 되지 않겠는가? 지금껏 모두가 영생하고 선악과나무도 남아있다면 선악과 금령 또한 전 인류에게 여전히 유효한 계명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 없게 된다.

또 혹시 누군가 그 열매를 따먹으면 남과 비해 너무나 짧은 수명으로 죽는 것을 목격할 텐데 누가 그 금령을 어길 생각을 하겠는가? 그럼 단지 오래 살고 싶다는 이유로, 또 하나님이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무용지물이다.

초점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도 인간이 선악과 금령을 잘 지켜냄으로써 구원 가능성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그 정반대로 인간은 절망의 나락에서 여전히 흑암 가운데 헤매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 없이는 죄가 처리되지 않고 그럼 그 삯인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엉터리 같은 가정을 하여서 이왕의 교리를 고치자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또 아담이 받은 벌로 인간 육체의 수명이 얼마로 바뀌었는지 혹은 영원했을 가능성을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역으로 따져 봐도 선악과를 따먹어서 받은 벌인 죽음이 인간 수명의 길이에 좌우되기보다는 예수님과 연관되어서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적 죽음보다 더 중한 일

선악과 금령은 사실상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에게만 유효했던 계명이었다. 그 일차적 이유는 하나님으로선 그들이 위반할 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아들 대(代)부터 사실상 무효하게 될 줄도 그분은 아셨다. 그 무엇보다도 앞에서 살펴본 대로 만약 계속 선악과 계명으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하다면 주님이 오실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선악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계획으로 가는 첫 관문이었다. 이를 또 역으로 따지면 골고다 십자가가 예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도무지 인간에게 명할 수 없는 계명이었다. 그것도 순종과 불순종을 책임지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었기에 비로소 성립되는 계명이었다.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최초 인간 부부에게 “절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먹으면 진짜로 죽는다.”고 간절히 호소했다. 따먹기만 하면 당장 죽일 것이다가 절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여서 다른 모든 것은 다 해도 좋은데 당신이 그들을 비롯해 우주만물의 주인이자 통치자라는 그 진리만은 절대 잊지 말라고 읍소한 셈이다.  

하나님의 이런 본심에만 비추어보아도 계명을 어기는 것과 죽음의 직접적 관련성은 훨씬 감소되지 않는가? 그리고 따 먹었음에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지 않은 것도 진짜 죽음이 따로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비록 육체적 죽음이 임할지라도 당신과의 온전한 교제를 더 중히 여기셨다는 뜻이지 않는가? 비유컨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외동아들에게 큰 고생이 될 줄 빤히 알아도 온전한 성인으로 자라게 하려고 면제가 이미 확정되었음에도 일부러 군대에 보내는 부모 심정과 같은 셈이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하여 그 벌로 육신적 영생을 잃어버릴지라도 자유의지를 주셨지 않는가? 그분은 인간이 당신을 진정으로 기꺼이 스스로 찾아주기를 가장 원하셨던 것이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가 인간의 모든 수치와 고통과 죄책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게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죄인을 살리셨던 뜻도 바로 그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에 심히 좋아하셨다. 창조의 최종 목적을 인간과의 아름다운 교제에 두었다는 뜻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인간이 정말로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의 장중에 붙들려 있는 것뿐이다. 그 외의 길로는 절대 온전한 인생이 되지 못한다.  

요컨대 하나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에게만은 육신적 죽음이 진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선악과 금령을 어겨 그 벌로 육신적 죽음을 입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이 주신 진짜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아담이 선악과 계명을 어김으로써 원죄를 범하게 된 결과로 모든 인간이 얻게 된 진짜 죽음은 무엇이며, 또 진짜로 받은 벌은 무엇인가?

진짜 죽음은 무엇인가?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葬事)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8:21,22)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부친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러지 말고 즉시 따르라고 대답했다. 신자는 장례 같은 사회 관습을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죽음의 본질을 가르치려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돌아가신 부친도, 그 장례를 치를 자도 죽은 자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전자는 육신적으로 죽은 자였고 후자는 살아 있었다. 그럼 예수님은 전자는 육신적으로 죽은 자를, 후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눈 것인가?  

언뜻 그렇게 보이긴 한다. 그렇다면 두 종류의 죽음을 나누는 기준이 단지 육신적으로 죽었는지 아닌지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장례 치를 자가 육신적으로 죽지 않았다고 해서 영적으로는 살았다고 아무도 말 못한다.

그보다는 둘 다 예수를 따르지 않은 자임은 분명하다. 예수를 따를 자는 이 제자뿐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 말씀의 본의(本意)가 있다. 당신을 따르지 않으면 육신적으로 살아있든 죽어있든 간에 둘 다 영적으로는 죽은 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이 육신적 죽음과 영적 죽음의 두 가지가 있는 것은 분명 맞는데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오직 예수님을 따랐느냐에 따라 나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더러 두 죽음 중에서 어떤 죽음의 길을 택할지 확실히 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심지어 육체적으로 영생을 해도 영적으로 죽긴 마찬가지다. 요컨대 진짜 죽음은 예수를 모르는 것이다. 그 결과 진짜로 받는 벌도 하나님 대신에 사탄과 짝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신자는 창조에 대한 새롭고도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선악과 금령에 대해 온전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 계명은 아무 의미가 없고 한갓 하나님의 독단적 명령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한 것도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하여 실패할 것을 무릅쓰고 감행한 도박이 되는 셈이다. 나아가 타락으로 받은 인간의 육신적 죽음도 그야말로 긍정적인 측면이라곤 하나 없이 저주에 가득 찬 벌로만 그칠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태초부터 성자 예수님이 계셨기에 우리 눈에는 미처 이해되지 못한 일들이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시행되었다. 너무나 크고 놀라운 은혜가 그런 외형적 모순들 안에 숨겨져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에 이미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전제로 당신의 모든 역사를 진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으로선 쉽게 순종하기 힘든 계명들도 줄 수 있었고 또 주셔야만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비록 아담의 원죄 때문에 인간이 육체적 죽음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십자가의 완벽한 은혜를 통해 육신적 영생과는 도무지 비교도 안 되는 너무나 좋은 진짜 영생이 예비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원죄의 잔재가 펄펄 살아있는 신자들  

그럼에도 신자들마저 자꾸만 아담이 순종했더라면 우리도 육체적 영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과 미련을 품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의 십자가 구원을 얻고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것보다는 육체적 영생이 더 나은 것 같다는 마음이 깔려 있지 않는가?

만약 모든 인간이 진짜 육체적으로 영생한다면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 내지, 아예 하나님이 되는 셈이다.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실제로 죽음을 벌로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알려고도 않고 찾지도 않으니 말이다.  

이 질문의 배경에는 원죄로 타락한 악의 잔재가 도사리고 있다. 육체적으로 영생하여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원 말이다. 사탄이 아담에게 어떻게 유혹했는가? “너는 선악과를 먹어도 절대 죽지 않는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 아니 더 뛰어난 존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괜히 너를 시기 질투하여 먹지 못하게 하려고 겁을 준 것뿐이다. 이제 네가 선악과까지 먹으면 육체적으로 영생도 하고 하나님 대신에 네가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보다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어디 있겠니?”

바꿔 말해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믿음으로 일석이조를 누리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잘 믿어 영적으로도 충만하고 또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현실적으로도 크게 형통할 것을 소원하고 믿는다. 이왕이면 신자도 무병장수(無病長壽)하면 좋지 않는가라는 뜻이다.  

물론 신자가 영육 간에 형통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소원하는 바다. 그러나 그분은 일차적으로 당신과의 온전한 교제를 더 원하신다. 신자가 십자가 은혜를 통해 당신을 진정으로 찾고, 알고,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경배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당신의 뜻대로 기꺼이 순종하며 그 뜻을 실제로 삶에 드러낸다면 나머지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풍요하고 안일하게 해주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풍요나 궁핍이든 당신께서 주권적으로 나눠주신다. 그보다는 당신과 온전한 교제와 동행을 유지하는 신자라면 이미 세상의 안일이나 핍박은, 심지어 육체적 죽음을 당하는 순교까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진짜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속에 소지하게 되었고 그분의 은혜로만 이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어떤 안일과 풍요보다 더 충만한 하늘의 신령한 것에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위배하는 바람에 그 후손들의 육신적 영생은 물 건너갔다. 그러나 그 영생은 천국에서, 특별히 마지막 부활 때에 육신의 몸을 입음으로써 더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맛보게 될 것이다. 또 그 전에 이 땅에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나감으로써 영생을 미리 소지하게 될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신자는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위반하는 바람에 모든 인간이 육신적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기독교 교리를 실제 삶에서 철두철미 깨달아 적용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이전에 불신자 시절에는 하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삶보다 육신적 죽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사실은 하나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든 현실에서 육신적으로 죽지 않은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육신적 죽음과 현실에서의 궁핍함보다는 하나님을 알아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을 깨달아 그렇게 실천하며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마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아담이 죽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질문과 의구심은 가질 필요도 의미도 전혀 없다.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보다 육신적 안일을 더 바라는 불신앙이자 죄다.

그보다는 선악과 금령의 배경에 우뚝 서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 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저 마련해 놓으셨다. 온 세상을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사랑하신 그 은혜 위에 만드셨다. 그리고 아담에게 제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즉, 그 사랑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간절히 호소하셨다.

예수님만이 알파요 오메가이자,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인간의 창조 때에 예수님이 계셨고, 그 타락의 현장에도 눈물지으셨고, 십자가에 죽으시어 구원을 다 이루셨으며, 마지막 때에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심판과 구원을 이루려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때에 끝까지 그분을 따르는 자는 영생을 입을 것이요, 그렇지 못한 자는 둘째 사망을 맞을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5,16)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5-8)  

4/27/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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