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배필의 일차적 의미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18,19)
창조의 정체성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성경의 네 거대담론 중의 첫째인, 창조 담론을 전개해 나가는 중이다. 이쯤에서 지금껏 살펴본 바를 간단히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창조를 살펴보는 이유가 진화론과 창조론 중 어느 쪽이 더 과학적 사실에 가까운가를 따지자는 정도가 결코 아니다. 신자라면 자신의 정체성을 창조 안에서 찾아 확정한 후에 실제 삶에 구현시키기 위해서다.
그 정체성은 간단하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존재다.”라는 확신이다. 물론 그 안에는 수많은 뜻이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보아 둘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알자는 것이며, 그리고 그 앎에 바탕을 두고서 자신을 자기 주변과 올바르게 연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먼저 창조의 정체성을 지닌 신자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천하 만물에 대한 인식부터 달라져야 한다. 정말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예비해 놓으셨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자연, 기후, 음식, 사람 등등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선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전부가, 가깝게는 가족부터 멀리는 지구 아니 우주 전체까지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의 온화하게 밝은 기후나, 네바다의 황량하고 후덥지근한 자연조건이나, 지금쯤 들꽃이 만발한 그 아름다운 해변국도 1번의 경치나, 하나님이 오직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요컨대 온 천하가 바로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확신이다.
그렇다고 한 없이 교만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져서 나를 위해 마련해주신 모든 것들에 감사해야 한다. 예컨대 지금 환난 가운데 힘들어 하고 있어도 당장 그것에서 구원해달라고 매달리기보다는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물어야 한다.
한 마디로 범사에 감사하며 범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일생에 채워주신다.
순서가 뒤바뀐 감이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창조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빚으신 예술품(art work)이다. 한정된 수량만 만들어 가격만 올리는 고급한 명품(premium brand)을 훨씬 뛰어 넘어 예술가가 직접 손으로 만든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작품이다.
세상에서 하나뿐이라면 당연히 그 신자 한 사람만을 위한 하나님의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며 거룩한 뜻과 계획이 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와 말씀과 묵상을 통해 그분과 일대일의 깊은 교제를 하면서 자신만을 향한 소명을 깨달아야 한다. 또 실제로 삶에서 그 소명에 헌신 실천하고 있어야 한다.
요컨대 모든 이가, 특별히 신자의 경우는 더더욱 하나님 품 안에서 그분께 순종하는 인생을 살지 않는 한에는 절대 참 안전, 만족,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오직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지 그 외의 길은 결단코 없다.
보통명사 아담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어로는 동일한 ‘아담’이 보통명사 ‘사람’에서 고유명사 ‘아담’으로 전환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으로 번역되는 경우(2:18까지)는 모든 인간 전체에, 아담으로 표기된 경우(2:19 이후)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인류의 선조였던 한 역사적 개인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자는 모든 인간이 가져야 할 창조의 정체성이고, 후자는 아담 개인의 창조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애매한 경우가 바로 2:18이다. 지금껏 배워온 바로는 2:18 이후는 여자의 창조와 결혼에 관한 진술이었다. 그렇다면 2:18도 아담으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여전히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은 아담의 아내 이브이지 않는가?
이에는 크게 세 가지 뜻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사람은 독처 즉,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니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더불어 사는 최소 기본 단위가 남녀가 만나 결혼하여 이루는 가정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은 남녀 간의 결혼의 의미가 반드시 하나님 뜻 안에서 돕는 배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19절 이하는 여자의 창조와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이 들어나 있는 반면에, 18절은 인간관계 전체에 해당되는 그분의 더 일반적인 뜻이라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특유의 복을 주셨다. 모든 피조물에 해당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해지라는 복 외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다. 하나님 대신에 그분의 피조세계 전부를 아름답고 거룩하게 가꾸어야 한다. 그분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그분의 왕국을 세워 이 땅에 편만하게 확장해야 한다. 따라서 그 일을 수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바로 “돕는 배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해서 기독교라는 종교체제와 그 조직을 구축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오직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또 반드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사람이 위치하여서 활동하는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그분의 모습이 구현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런 거룩한 다스림을 가장 기본적인 체제인 가정에서부터 이루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 간에 평생을 함께 지내기로 언약하고 아이 낳아 기르며 열심히 일하여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가정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결혼이란 두 남녀 간의 사랑의 언약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분의 거룩한 명령을 이룰 수 있는 근본적인 통로다. 그래서 부부가 그분 앞에서, 아니 그분과 맺는 엄숙하고도 영원한 언약이다. 결혼 이후의 가정도 마땅히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신 뜻 안에서만 유지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돕는 ‘배필’이라는 용어를 쓸 수밖에 없고 또 바로 이어서 여자의 창조 기사가 나타나는 이유는 지금 이 단계에선 사람이 번성하면서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길은 최초 남녀 간의 결혼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손이 번성해야만 함께 도와가며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지 않는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는 말씀이 일차적으로는 여자의 창조와 결혼에 관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넓은 틀 안에서 인간관계 전체에 관한 말씀이다. 이어지는 19절에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해야 할 일 즉, 하나님께 받은 동산지기의 소명을 말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불신자의 모든 선행은 자기 자랑
하나님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돕는 배필을 붙여 주신 것이 단순히 외로움을 줄여주자는 정도가 아니었다. 당신의 일은 혼자서보다 여럿이 함께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힘이 모자라 인간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한 사람보다 여럿이 힘을 합해야만 꼭 능률이 더 오른다는 뜻도 아니다.
인간끼리 순수하고도 진실하게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순전한 사랑의 섬김이 실현되는 공동체를 통해서라야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절대 더럽고 추한 죄악과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공동체라면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처럼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은 그런 관계를 얼마든지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신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일로 누구를 만나도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을 함께 감당해야 할 사이라고 확신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불신자의 것과는 정반대되는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신자의 인간관계는 상대로부터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자연히 권력, 재물, 실력을 많이 갖춘 자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려 든다. 반면에 아무 유익이 없겠다 싶으면 아예 상대를 않거나 멀리 한다. 역으로 나에게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덤비는 자에게도 주판알을 잘 튕겨보다가 손해가 되겠다 싶으면 괄시하거나 아예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 가운데 정말 의로운 사람도 많다. 자기 가진 것을 사용해 진정으로 남을 섬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보면 남보다 어떤 면에서든, 꼭 재정적이 아니라도 지성이나 도덕성이나 육체적 힘이나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월한 자가 그렇게 한다. 자기가 쓰고 남는 여유분으로 남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자기에게만 공이 돌아가는 적선(積善)이자,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셈이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선하고 의롭다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다고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사단도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다. 또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가 가지 않는 태도로는 자신은 고결한 모습은 유지할지 몰라도 벌써 상대를 까마귀로 비하했고 자신은 백로라고 교만하게 자부한 것이다.
심지어 전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이웃을 도와도 불신자의 선행은 자기 자랑일 수밖에 없다. 그들 사이에 하나님이 관여한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하고 의로워 보여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인간이 보기에는 모순되고 부정적이고 추할지라도 그분의 놀랍고도 신비한 뜻은 얼마든지, 그것도 풍성하게 숨겨질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로선 그런 모습을 절대 선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쉬운 예로 불신자는 자기 여유분 없이는 남을 도울 수 있다고 꿈도 못 꾼다. 그러나 신자는 현실적 여유분이 전혀 없고 오히려 도움 받을 자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으로 얼마든지 자기보다 우월한 자를 도와 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불신자는 아무리 순수하게 남을 도와주어도 그 모든 여유분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마련해 준 것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다. 돈, 지성, 권력, 육체적 희생 모든 것이 오직 자기 능력으로 자기가 이룬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순수하게 도왔어도 결국은 자기 잘난 자랑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행 자체의 도덕적 양과 질을 평가하는 것보다는, 선행을 하는 본인의 영적인 실상이 선과 악의 참된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신자의 인간관계는?
그럼 신자의 인간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흔히 신자는 불신자의 섬김보다 질과 양으로 더 많이 희생해야 하고 그 동기 또한 더 순수해야 한다고만 가르쳐 지고 있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충분치 못한 가르침이다.
무엇보다 신자의 모든 사고와 행동은 불신자의 그것과는 항상 정 반대여야 한다. 그렇다고 종교적 행위만 하면 되지 선행을 구태여 많이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엉뚱한 해석을 내려선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불신자도 얼마든지 상대의 보답을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남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 딱 하나 부족한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정반대가 되어야 할 신자의 사랑은 질과 양의 월등함이나 동기의 순수성을 따지기 이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역사가 드러나야만 한다.
쉽게 말해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내게 붙여주셨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와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은 오랫동안 모를 수 있지만 반드시 그분의 뜻은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와 나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고 또 확장되어서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소망해야 한다.
불신자와의 교제라면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 가운데로 그를 인도하게 될 것이다. 또 신자끼리라면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빛을 함께 받아 누리면서도 세상 앞에 찬연히 비취게 해야 한다. 이런 믿음과 소망을 품고 가꾸면서 상대를 순수한 사랑으로 섬기다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을 당사자 모두 맛보고 누릴 수 있다.
교제의 실제적 모습도 불신자의 것과는 정반대여야 한다. 상대에게서 유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유익을 그에게 나눠주는 모습이어야 한다. 바울이 사랑의 본질에서 크게 강조한 것이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었다.(고전13:5) 불신자의 사랑과 가장 차이나는 요소라는 뜻이다. 나아가 신자는 예수님처럼 자기 가진 것 전부를 줄 수 있는 데까지 자라야 한다.
따라서 신자 자신의 선행, 공적, 의는 상대와 세상 앞에 결코 자랑으로 내세워선 안 되고 또 그럴 수도 전혀 없다. 그 교제의 만남부터 모든 과정이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데 어찌 그분의 영광을 신자가 가로채거나 가릴 수 있겠는가? 또 진정으로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상대를 섬긴다면 아예 그럴 마음이 들지 않거나, 어쩌다 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레 들어도 곧 그 잘못을 깨닫고 고치게 된다.
바꿔 말해 하나님만이 선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인간이 범사의 선악 간을 구별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그분이자 그분의 절대적 계시인 성경이라는 뜻이다. 또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도 오직 그분으로부터 공급받는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 열정, 기회, 능력, 모든 것이 그분의 주도와 간섭에 의한 것이다. 신자로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하고 교제를 이끌어 주며 둘 사이에 생기는 사건의 시종부터 결말까지 그분이 관여하신다.
두 사람의 관계를 하나님이 이끌어 간다는 말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자신의 의도, 계획, 소원, 고집, 욕심 등에 따라 상대를 좌우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한다. 즉, 상대로부터 나의 유익을 구치 않고 내가 가진 유익을 상대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상대가 하자는 대로 다해주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이끄는 것이다. 진정으로 상대에게 유익이 될 것만 하나님 뜻 안에서 잘 분별하여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오류 하나 없이 이 둘을 다 성취해 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신자의 판단과 시행에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적 착오, 잘못, 허물, 심지어 죄까지 개입될 수 있다. 그러나 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그 인간관계에 그분의 선이 실현되어 당신의 왕국이 확장되기만을 소원하는 마음으로 무슨 일이라도 한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정말로 그분이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 왕국은 그분이 통치하시는 것이지 신자가 이끄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단지 그분의 통치 수단이자 통로가 될 뿐이다. 주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꾸어가면서, 최소한 잃지 않고서, 인내하며 기도하면서 무슨 관계든 이어나가면 하나님이 그 사이에 반드시 역사하신다. 절대적 선이신 그분이 개입하는데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지 못할 일이 과연 있겠는가?
신자로선 그분의 뜻과 계획을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차츰 그 관계가 일관된 방향으로 전진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런 압축된 방향성을 발견하게 되면 더 온전한 확신을 갖고 그분만 의지할 수 있게 된다. 또 전적으로 의지하다 보면 일의 진행 과정 중에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인식할 수 있고 심지어 그 결말마저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라고 해서 로또 당첨 같은 대박을 꿈꾸거나 하루 속히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가장 먼저 그분이 가시고 있는 방향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일하고 있는 현장을 찾아 그 일에 모든 힘과 뜻을 다해 동참해야 한다.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
지금 굉장히 심각하고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신자가 어떤 인간관계를 맺더라도 아주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시고 거룩하신 분이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여 운행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만사, 특별히 신자의 삶에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그분께서 더 열망하시고 실제로 그렇게 되게끔 역사하고 계신다. 신자라면 당연히 그분의 이런 열망에 부합하여 그분의 크심이 자신으로 인해 삭감되지 않도록 살아야만 한다.
하나님이 광대하시다고 하면 신자는 그저 자신의 현실적 삶에 풍요와 안일이 크게 넘칠 것만 기대하거나 믿는다. 그런 뜻이 전혀 아니다. 신자가 어떤 사안으로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기대하고 예측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놀랍고도 신비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놀랍고 신비하다고 해서 또 다시 큰 축복일 것이라 기대해선 안 된다. 그분의 일을 이루는 방식이 그렇다는 뜻일 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직 그분의 완전함이다. 신자의 현실적 풍요와는 별개로 절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우며 거룩하신 당신의 당신다우신 방향으로만 범사를 이끄신다. 광대하신 하나님이 신자가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신다. 이만큼 큰 축복과 영예가 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우리 같이 연약하고 무지하며 아직도 죄에 찌든 자가 온전히 감당이나 해낼 수 있는 은혜인가?
따라서 신자는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크심에, 또 오해할 우려가 있으니 그분의 절대적으로 거룩하심과 완전하심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현대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고 말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이라면 모두가 위대하다. 아니 그분이 범사를 주관하시므로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그분의 위대함이 숨겨져 있다.
말하자면 신자로선 지금 내가 처한 여건과 환경도 하나님이 베푸셨기에 이미 위대한 것이다. 만나는 사람과 부딪히는 사건 모두도 하나님이 마련하셨기에 동일하게 위대하다. 심지어 신자가 갖는 생각, 소망, 열정, 모두도 그렇다.
물론 그 자체 하나, 하나가 위대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들을 통해 위대하신 하나님이 위대한 당신의 일을 지금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신자가 구체적 경과나 앞으로 드러날 그분의 영광에 대해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해도 진짜 그렇다. 신자라면 이런 확신을 갖고 기대하고 기다리고 가슴이 설레어야 한다. 아니 신나고 즐거워야 한다. 당면한 환경과 사건과 사람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통해 당신의 위대한 일을 지금도 당신만의 위대하신 권능과 열정으로 위대하게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되어야 한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붙여 주신 하나님의 뜻도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담에겐 이브가 최초의 돕는 배필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인해서 본문의 더 근본적인 의미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되 서로 진정한 사랑으로 섬기면서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크심이 반드시 드러난다.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독처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셨고, 또 그분이 우리에게 돕는 배필을 붙여 주셨다. 그렇다면 그 안에 당신의 위대하심은 살짝 빼놓고 단지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며 자식 많이 낳고 다복하게 살라는 평범한 의미만, 사실은 동물에게 주신 복과 동일함, 들어 있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신자가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 그분의 위대함을 얼마든지 드러낼 수 있다. 성도의 부부사이를 필두로, 성도의 부모 자식 관계, 성도끼리의 교제, 성도와 불신자의 교제 등 그 어떤 만남에도 가능하다. 자기에 붙여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역사하신다는 확신과 기대와 인내와 설렘을 갖고서 진정으로 상대를 섬겨야 한다.
또 본인만 그런 확신과 소망을 가져선 부족하다. 상대도 위대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가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되기를 소망하고 확신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상상을 해보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진 한 신자를 통해서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 전체에 누룩처럼 번져나가는 모습을 말이다.
예수 믿어 천국 가게 된 것이 신자의 유일한 정체성이 되어선 너무나 부족한 믿음이다. 아니 믿음조차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자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확립해야 한다.
구원 얻는다는 것은 아담의 원죄가 씻어졌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원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졌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명령 앞에 서게 된다. 그분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청지기 직분을 회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돕는 배필의 뜻을 정확히 깨달아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내가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날 것을 온전히 믿기에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 또 그 구체적인 모습과 뜻을 발견하여 주위에 증거하고 나눠주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한 마디로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는 이미 그 위대함에 넉넉히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 창조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되찾아 이웃을 내 몸같이 섬기고 있다면 말이다.
5/3/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