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불안을 벗는 길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46:3,4)
애굽 총리가 된 요셉이 자기를 종으로 판 형제들과 극적으로 화해했습니다. 이제 가족 모두가 애굽으로 내려와 함께 살자는 요셉의 청을 받고 여행하는 중입니다. 아비 야곱은 아무래도 가나안을 떠나는 것이 망설여지고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두려움도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밤에 이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 염려 말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면서 “정녕”이라는 말을 붙여 구태여 강조하는 것이 조금 어색하지 않습니까? 사장이 직원들에게 추석보너스 100%를 약속하면서 진짜로 주겠다고 강조하면 도리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장으로서 체신이 떨어지고 혹시 안 줄 수도 있겠다는 의심만 불러일으키지 않겠습니까? 인간 지도자도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무에서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천하범사를 주관하시는 유일한 분 아닙니까? 그분이 구태여 진짜로 약속할게라고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당신의 체면을 스스로 깎아 먹는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그분은 너무나도 자주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사45:22,23) 심지어 당신의 약속이 신실할 것이라는 원칙에도 당신의 명예를 걸며 맹세했습니다.
그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신자들이 그분의 약속을 너무나 자주 믿지 못하고 의심하니까 당신의 눈높이를 아예 그 수준에 맞추어 낮추어준 것입니다. 직원들이 사장의 보너스 약속이 진짜인지 자꾸 물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수표만 남발하는 불성실한 사장으로 매도하면서 성의를 무시했다고 크게 화낼 것 아닙니까? 인간 지도자는 이럴진대 하나님은 전혀 그러지 않고 끝까지 참으시며 오히려 당신께서 당신을 두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46:5-11에서 발췌)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꼭 이행할 것이라는 엄연한 진리, 아니 너무나 지당한 사실을 두고서 두 번이나 “정녕” 이루고 행할 것이라고 강조할 형편까지 이르렀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은 인간이 너무 완악하다고 마냥 비난만 할 사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큰 이적을 체험한 민족도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그 특별한 사랑과 권능을 누린 유일한 백성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정녕은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마저 그들더러 옛적 일을 기억하라고 강조할 정도였습니다.
역으로 말해 인간사가 그만큼 많은 고난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계획과는 정반대로 가는 정도를 넘어서 전혀 꿈도 꾸지 못하는 재앙이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본문의 정녕이라고 강조한 약속도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바로 노년의 야곱입니다. 그 또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도 더 많이 체험한 자입니다. 심지어 얍복 강가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싸워 이겨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기치 않은 새로운 일이 생기자 불안해진 것입니다.
인생은 어느 누구에게나 절대 녹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알량한 믿음으로 능히 모든 환난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는 것이 도리어 교만이며 또 가장 약한 믿음일 수 있습니다. 신자를 보호하는 하나님이 약해서 힘든 것이 아니라, 신자가 가진 믿음이 수시로 흔들리고 약해져서 그런 것입니다. 능히 이길 수 없는 환난이 수시로 닥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더욱 겸비해져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좋고 강한 믿음입니다.
야곱은 현실적 지혜로도 아주 능했던 자였습니다. 어떤 역경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의지력과 분별력을 갖추었습니다. 거기다 오랜 풍상의 세월을 거치면서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이미 다 맛본 자입니다. 지금쯤은 정말 인생을 여유롭게 관조할만한 나이도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불안해하며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도 죽은 줄만 알았던 가장 총애했던 아들 요셉을 다시 찾았을 뿐 아니라 세계 최강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 아비자격으로 귀빈 대우받으며 가는 길인데도 말입니다.
야곱마저 그럴진대 결국 인간만사가 항상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으며 또 인간이라는 존재자체가 평생을 두고 불안을 떨어버릴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누려서 믿음이 좋다고 해도 그러합니다. 과연 그렇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나무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18) 최초 인간 아담에게 하나님은 다른 모든 실과는 먹되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인간더러 당신 대신에 동산의 범사를 다스리되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권능을 가진 주관자 하나님이 따로 계심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에 따르며 살라는 뜻으로 제발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놀라운 은혜와 신기한 능력 속에서 정말로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보장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요컨대 인간은 딱 하나만 참으면 나머지는 뭐든지, 그것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그 하나의 속박마저 귀찮게 여겼습니다. 단 하나의 거침이나 주저 없이 제 멋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신나고 즐거울 줄 알았습니다. 고난과 슬픔이 없는 분홍빛 환상이 현실화 되리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니까 제발 그렇게 만은 하지 말라고 싹싹 빌다시피(?) 부탁했는데도 말입니다.
말하자면 아담은 한 가지 불편을 잠시 동안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정녕 죽는 결과를 맞았습니다. 불편한 것을 벗어버리는 대신에 얻은 것이라고는 정확한 원인도 모른 채 일생 동안 이어지는 두려움과 부끄러움뿐이었습니다. 인간이 더불어 살아나가야 할 주변 환경도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마에 땀 흘리는 일을 그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아담이 잘못 걸었던 길을 정반대로 돌아가면 됩니다. 한 가지 불편한 것을 포기하고 평생의 불안을 얻었으니까 그 한 가지 불편을 다시 감수하면 됩니다. 자기 영혼의 중심에 하나님의 선악과를 다시 심고서 두 번 다시는 따 먹지 않으면 됩니다. 그분을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고 오직 그 뜻에 따르면 됩니다.
물론 우리 모두 죽을 때까지 온전히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아가 불편해지는 것을 잠시만 감수하면 오히려 자아가 하나님 품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설이자 신자만이 누리는 권세입니까? 혹시라도 잠시 자신이 속박당하는 듯한 불편을 참지 못해 좋은 믿음을 갖고도 여전히 불안한 가운데 있지는 않는지요?
1/11/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