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개혁을 하라

조회 수 375 추천 수 13 2009.11.17 00:23:19
날마다 개혁을 하라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스 10:1-4)


바벨론 유수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개와 스가랴의 지휘 아래 스룹바벨 성전을 준공하여 하나님에게 봉헌했습니다. 그 후 2차 포로귀환으로 돌아온 율법사이자 제사장인 에스라가 종교개혁 운동을 벌렸습니다. 그 중에 핵심은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이방 족속의 딸들과 결혼하여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9:2) 한 죄를 씻는 일이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께 통회 자복했고 백성들은 모든 이방 여인들과 소생을 전부 유다 땅에서 내쫓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심한 조치가 아닌가요? 율법에도 이방인, 과부, 고아를 잘 대해주라고 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이방여인과 결혼했다 하더라도 자녀까지 낳고 오래 동안 같이 살았던 가족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인연을 끊고 아무 대책 없이 내쫓는 것은 불의한 일 아닙니까?  

인도에선 결혼을 하면 여자 쪽에서 반드시 상당한 양의 지참금을 시댁으로 갖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 조건을 맞추지 못하면 결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딸 부잣집에 장녀가  부모의 지참금 부담을 덜어주려고 자살했습니다. 아무래도 집안 형편상 자기가 결혼하면 동생들이 결혼하기 힘들 것 같아 자기 몫을 절약해서 동생들이라도 시집을 잘 보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후 둘째, 셋째 딸도 똑 같은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의로운 것 같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같으면 나라에서 효녀 상을 크게 주어야 할 판입니다. 그러나 인도에선 그런 일은 다반사로 있는 일입니다. 지참금 제도가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관습으로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죽은 것이 별반 화제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또 인생은 윤회한다는 믿음 때문에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또 인간적 양심에 엄격하게 비추어보더라도 세 딸의 자살이 꼭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부모의 입장은 어떻게 됩니까?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합니다. 부모에게 비통한 슬픔을 안겨드린 것은 큰 잘못입니다. 나아가 경제적으로 무능하여 지참금 때문에 자식을 희생시킨 매정한 부모라는 사람들의 비난을 평생 동안 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 사회의 윤리는 국가, 민족, 문화, 시대, 상황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한 곳에서 선이 다른 곳에선 악이 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인간만의 윤리라 절대적 선의 기준이 없기에 항상 상대적입니다. 사회의 다양성 때문에 한 지역에서 통용되는 윤리라면 인정해줄 수밖에 없고 그러면 세상의 모든 윤리를 용납해주어야 하는 다원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 하나님이 없는 종교도 동일한 맥락에서 다원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절대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종교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정의가 도출해 낼 수 있는 최고의 선은 결국 인간끼리 서로 포용하고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 이상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만이 유일한 길임을 믿는 개신교가 종교끼리는 관용하지 않겠다고 하면 배타적이라고 비난하고 나아가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지 말자는 뜻이냐고 매도합니다. 이 또한 그들의 논리 구조상 필연적인 흐름입니다.

지금 에스라의 주도로 이방인 아내와 소생을 내쫓는 일도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불의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자”는 지고(至高)의 선의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당신의 뜻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성경을 보는 관점은 오직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인간끼리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두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들었고 심지어 동일한 비중으로 다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순서는 분명히 했습니다. 사람이 인간끼리 사랑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경배와 찬양뿐입니다. 예수님이 두 계명의 비중을 동일하게 다루신 이유는  신자의 하나님 사랑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반드시 이웃 사랑이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이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이웃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결혼한 불쌍한 아내와 자기 소생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절대적 하나님이 선의 기준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 당신만이 참 선이자 절대적 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지키라고 주신 계명은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단 내지 통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계명대로 해야 하고 또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면 당연히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계명 자체가 절대적 기준은 아닙니다.

쉽게 말해 신자의 선도 본질적으로 하나님 쪽에 함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품성이 어떤 형편에 있던 또 어떤 행위를 하느냐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악한 신자라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 거룩한 것이고 그 반대로 인격적으로 아무리 선한 신자라도 그렇지 않으면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자의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에 비해 “그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쪽에 있는 신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두 계명의 내용과 본질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쪽에 있지 않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 사랑과는 상관없이, 즉 인간의 생각만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자가 지고의 선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개혁 운동을 시작하면서 에스라는 통회하며 기도부터 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율법을 어기고 이방여자와 결혼한 죄를 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백성들더러 당장 쫓아내라고 한 적이 없는데도 그들이 함께 통곡하면서 먼저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 동안 이방인 아내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를 했는데 오히려 영적으로는 더 피폐해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에스라와 백성들이 눈물로 기도했더니 성령의 감화가 모두에게 강하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오직 당신과 함께 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자 단 둘이서 일대일로 가야지 그 밖에 다른 어떤 것도 그 동행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신자가 그런 동행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중에 최고의 악은 그 동행에 우상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동행 자체가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선 당신께서 택하시고 사랑하는 백성이 자기와 동행하지 못하는 것을 결코 두고 보실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당신과 동행시키는 것이 신자의 유익이 됩니다. 따라서 그 동행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비록 가족이라도 제거하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5-38) 예수님이 무조건적인 맹종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가족이 있고 예수님이 없는 것보다는 가족이 없더라도 예수님이 있는 것이 신자의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확신하십니까? 원수가 가족 안에 있다고 해서 예수 믿는다고 구박하는 시어머니를 당장 미워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 각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가족에게도 동일하게 예수가 없고 가족이 있는 것보다 가족이 없고 예수가 있는 것이 더 나으니까 그럴수록 더욱 사랑으로 섬기며 예수를 알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했습니다. 시어미의 구박으로 고통당하는 것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자꾸만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려는 마음이 십자가입니다. 가족 때문에 예수님과 동행에 조금이라도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다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보다 자기의 의와 영광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앞세우는 것의 대표는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고집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한 상태에서만 할 수 있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없는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예수님만이 유일한 인간 구원의 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를 잘 믿게 가르쳐야 할 지도자들조차 예수가 없는 사람들이 말하는 최고의 선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죽은 세 딸이 세상에선 효녀로 아주 크게 칭송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선 당신께서 주신 하나뿐인 생명을 인간 스스로 끊어버렸으니 그만큼 큰 죄도 없습니다. 생명의 살고 죽음은 오직 하나님 당신의 주관 하에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경우도 세상 사람들은 이방 여인을 버리지 않는 쪽을 택할 것이며 그래야 선하다고 볼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을 배제한 생각이라 그렇습니다.

지금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혹시 예수를 좇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까? 과감하게 전부 버려야 합니다. 함께 산 아내와 아이들도 내쫓았지 않습니까? 그중에서도 자신의 내면부터 가장 먼저 살피셔야 합니다. 얼마나 치사하고 추한 고집과 욕심들이 뱀이 꽈리를 틀고 있듯이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자기가 자신을 냉정하게 살펴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럼 이 한마디만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심지어 내 생명이 없어지더라도 예수님이 더 좋은가를 말입니다.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많이 남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만이 우리를 붙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이자 능력입니다. 또 그래서 십자가 앞에 통회하며 엎드리는 것만이 신자가 날마다 해야 하는 개혁입니다.

10/31/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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