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에게는 잘못이 없지 않는가?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막14:48,49)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과 하산할 차비에 유다가 검과 몽치를 가진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당도했습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가 한 종의 귀를 검으로 쳐 떨어뜨렸지만 예수님은 다시 붙여 주셨습니다.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부를 수 있음에도 부르지 않고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순순히 잡혀갔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수백 개도 넘는 자신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범죄자 중에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53:12)와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슥11:12,13)와 같은 당신의 체포에 관한 구체적 예언을 지칭한 것입니다.
검과 몽치를 든 대제사장의 하속들에게 유다가 죽음의 키스로 예수임을 가르쳐 줌으로써 체포당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유다의 배반도 반드시 성경대로 이뤄져야 하며 나아가 유다의 배반이 없었다면 잡혀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유다가 반드시 그런 모양으로 배반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성경에 예언까지 하셨으니 사실은 하나님이 계획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유다에게는 아무 죄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계획하여 이루시는 일을 일개 인간이 어떻게 거역할 수 있는가? 그는 단지 당신의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더 드라마틱하고도 심오하게 꾸미려는 하나님의 드라마에 조연배우로 동원된 것 뿐 아닌가?”라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언뜻 그런 면이 없지 않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의 배반 사건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 경험했듯이 어렸을 때에 참고서 산다고 부모에게 거짓말하고 돈을 타서는 다른 곳에 쓴 경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부모는 자식이 다른 데 쓸 줄 알고도 줍니다. 그런데 자식이 다른 나쁜 짓을 할 줄 알고도 말리지 않은 부모도 잘못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부모가 아들의 요구를 거절하려면 그 이유를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입장에선 정말 가난해서 돈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참고서 사겠다는 아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듭니다. 결국에는 아들을 의심해서 못 준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럼 반드시 부자간의 신뢰 관계가 금이 가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가 돈을 순순히 주면 혹시라도 자식이 그 사랑과 믿음에 마음이 찔려 진짜로 참고서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 반대로 자식이 계속 그 잘못을 저지르겠다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할지라도 일단 자신을 못 믿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 그들의 관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과 존경과 믿음에 바탕을 둔 정상적인 부자 관계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의심과 속임과 억압으로 서로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생각밖에 못합니다.
또 방귀 뀐 사람이 먼저 성낸다는 속담대로 아들이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에게 자기를 믿지 못한다고 거꾸로 따져들 수 있습니다. 다음번에는 더 교묘한 속임수를 동원해 더 큰 돈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놀러가는 일에만 정신이 팔린 자식은 타이르거나 야단쳐 봐야 소귀에 경 읽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들로 더 큰 죄에 빠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유다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배반을 알고 있었어도 직접 공개적으로 타이르거나 야단칠 수 없었습니다. 아직은 배반 전이라 유다가 거꾸로 반발할 수도 있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끝이 나고, 또 다른 제자들 사이에서 유다는 완전히 매장당합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이 눈치 못 채게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주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강제적으로라도 막았어야 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영혼이 이미 사단에게 넘어가 배반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에선 돌이키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사랑과 신뢰이지 훈계와 정죄가 아닙니다. 훈계와 정죄로 돌이키는 것은 일시적이며 항상 반발할 소지가 있지만 끝까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만이 그 변화를 진정하고도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유다도 비록 자살로 그 인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무한한 사랑을 보고서야 자기 잘못을 뉘우쳤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제자가 배반하지 않고 단순히 대제사장들이 나서서 직접 예수를 잡아다 십자가에 달게 할 수도 있었지 않는가라고 따지는 것도 사실은 억지입니다. 예수님이 3년이 지나도록 병자와 죄인들만 고쳐주지 로마와 상대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십자가에 죽겠다고 그런 의도를 아예 공표했는데 배반할 자가 안 나오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어쩌면 유다는 스승이 로마 당국으로부터 직접 고초를 당하면 그 큰 능력으로 무찔러 줄 것이라고 기해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잡히자 그렇게도 큰 소리 치던 베드로를 필두로 열한 명의 제자들이 자기만 살겠다고 전부 도망갔지 않습니까? 유다가 아니더라도 누가 배반해도 배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참고서 산다고 거짓말 하여,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잘못으로 우리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마저 배반하는데 유다 같은 자가 한 명이라도 나오지 않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나마 배반자가 한 명만 나온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끝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관원들로선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칠 때는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로마를 상대로 전쟁할 뜻을 조금이라도 비쳤더라면 아마 그들도 뒤에서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해 주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로마보다 자기들의 위선을 비난하니까 화는 나지만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 자기들 잘못을 지적당해 복수하는 것으로 간주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배신자가 나오자 비로소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도가 식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삼년이 지나도록 죄인과 병자와 가난한 자들만 상대했으니까 여론 주도층인 중산층, 상류 계급을 잘 선동하면 눈의 가시인 예수를 죽여도 사람들이 오히려 지지해 줄 수 있으리라 짐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도움을 받은 자들도 계속해서 빵과 돈으로 채워주지 않은 것을 은근히 불만으로 갖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입니다. 부모가 돈이 많은 것을 아는데 참고서 살려는 돈을 안 주면 그 돈으로 나쁜 짓하려고 한 자기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부모만 더 원망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 주었어도 돌아와서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한 자는 단 한 명뿐이었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유다의 배반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성경의 예언 이전에 죄 많은 인간들을 구하러 오신 메시야에게 죄 많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반응하게 된 결과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말릴 재간도 없었고 또 다른 방법으로 십자가 사건을 계획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잘못을 따질 소지는 전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죄가 저지른 사건입니다.
한 마디로 메시야가 로마를 물리치러 오는 대신에 수난 받는 종으로 오게 되면 결국에는 모든 인간이 반드시 그에게 돌을 던지게 되고 제자들마저 배반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단 한명의 예외 없이 방귀 뀐 자가 먼저 화를 내며, 부모마저도 속이며, 빵을 안 채워주면 언제든 하나님마저 배반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런 사실을 하나의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그분이 인간으로부터 모든 멸시와 핍박을 당하며 나아가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해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아니 자연히 그렇게 죽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수치스럽게 죽지 않고는 인간에게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더럽고 추한 존재인 줄 제대로 깨닫게 해주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실체를 그렇게까지 발가벗겨서 보여줄 수는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아니 지금도 모든 종교는 인간을 발가벗기기보다는 포장하기 바쁩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말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뤄지지 않고는 인간의 실체를 인간으로 알게 할 방도는 없습니다.
신자는 유다를 조역으로 등장시킨 하나님이 실수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온전히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부터 십자가 앞에 철저하게 깨트리고 자기의 실체를 똑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를 잘 믿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다는 비난하면서 자신은 매일 유다의 자리에 서있다는 것을 모르는 신자가 의외로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서도 왜 이 환난을 미리 막아주지 않으셨지? 내가 그렇게 잘 믿고 봉사 열심히 했는데도 조금만 빵을 더 주면 어디가 덧나?” 우리가 얼마나 자주 품는 생각입니까? 그것도 그분 앞에 기도하러 나와서 엎드린 채 말입니다.
12/18/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