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하나님만 구하는 신자

조회 수 490 추천 수 31 2009.11.17 23:40:36
싸구려 하나님만 구하는 신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미국의 윌버 리스라는 교인이 “나는 3 달러짜리 하나님을 사고 싶다. 내 영혼을 흔들거나 내 수면(睡眠)을 방해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따뜻한 한 잔의 우유와 햇볕 아래서 즐기는 산뜻한 낮잠과 같은 부담 없는 하나님이 좋다. 내게 흑인을 사랑하고 이민 온 사람을 후대하라고 명령하는 그런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 나는 새로운 탄생보다는 따뜻한 엄마 뱃속이 좋다. 종이봉투에 영원한 것을 1파운드어치만 사서 담아 가지고 다니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 교인 대부분의 생각을 그대로 대변한 것 같습니다.    

종교를 갖든 안 갖든 누구나 어느 정도의 도덕적 죄책감은 기본적으로 느낍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는 인식까지 갖는 자도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결정적인 허물과 나쁜 습관 등을 고치려 듭니다. 자주 빠지는 죄에서 헤어 나오려고 노력합니다. 종교인들은 당연히 좀 더 많이 노력합니다. 또 남들보다 노력을 더 많이 했기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신이 내려 주어야 당연하다고 믿습니다.    

백인 교인이 틀림없었을 리스는 성가시게 흑인과 이민 온 소수 민족까지 교제하며 사랑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통하는 도덕적 종교적 우월감과 성취감으로 만족하겠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화려한 대형교회에서 산뜻한 목사님이 노숙자나 고아를 찾아가 섬기라고 요구하지 않고 또 모든 죄를 회개하여 거룩해지라는 식의 부담 주는 설교만 하지 않으면 교회 회원으로서 열심히 교제하며 봉사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신자를 당신의 아들들로 삼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선 그분께 기도하여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 받고, 죽어선 천국 가는 영생을 물려받게 해준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당신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구원해 주셨다고 합니다. 정말로 당신의 아들답게 거룩하고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몇몇 허물을 고치는 정도의 피상적 변화가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들마저 피상적 변화와 개선만 스스로 노력하는 정도로 신앙에 대체하려 듭니다. 자신에 대한 약간의 성형 수술은 크게 부담 느끼지 않고 용인합니다. 주일에는 세상 대신 교회로 발걸음을 옮겨 도덕적으로 반성합니다. 혼자 집에서 고치려 해봤지만 아무래도 힘드니까 설교 말씀을 듣고 지난주에 지은 죄 몇 가지 회개하여 고치려 노력합니다. 또 세상에서처럼 추하고도 격심한 시기와 경쟁이 없는 교회 안에서 서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따뜻하게 교제하고, 가끔은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며,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의도하는 바는 전혀 다릅니다. 신자는 피상적 변화로 만족하거나 자기 할 바를 다했다고 착각할지 몰라도 그분은 완전히 혁신적 변화를 원하십니다. 신자는 성형수술만 하고 치우려 하지만 그분은 전체적인 개복(開腹) 수술을 하려 하십니다. 그 영혼의 최고로 깊숙한 곳까지 그분의 권능이 파고들어와 완전히 뒤집어지게 만들려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시기 전의 유대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가르친 것은 일부를 고치는 성형기술이었습니다. 인간들의 관점에 그만하면 됐다 싶은 정도까지만 노력하면 신도 응당 그에 맞추어 복을 주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 자체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성형만으로는 절대로 참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조차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을 먼저 개복 수술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분이 인간들로부터 온갖 모멸, 비방, 천대, 핍박을 받다가 역사상 최고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분이 고쳐야 할 부분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벌거벗어 부끄러우면서도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오히려 모든 인간들더러 스스로의 벌거벗은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도 추한지 깨닫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인간을 완전히 개복수술 시킨 것입니다. 그런 실체로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음을 절감케 한 것입니다.

그분이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조금만 고치면 완벽해지리라 자신했던 너무나 교만하고 완악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서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것이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는 소리가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한없이 고개를 떨어트리게 해서 완전한 침묵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저주마저 당신께서 전부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바뀐 신자들이 무릎 꿇고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2-24) “구습”을 고치거나 벗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꾸만 유혹에 넘어가고 욕심이 동해 구습을 좇으려는 “옛 사람” 자체를 벗으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습관”을 만들라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완전히 새롭게 지어진 “새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신자는 아직도 자기 안에 그런대로 쓸 만해서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인격과 능력과 도덕성과 영성이 있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그조차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아야 할 정말로 보잘것없는 인간적 잔재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바로 위선과 가식이자 자기의 의를 앞세우는 너무나 교만스런 죄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탐욕과 탐심과 거짓과 음란 등의 모습으로 너무나 자주 많이 드러나는 근본적인 죄의 본성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며 인간적 의를 자랑코자 하는 모든 시도가 사실은 그 본성에서 뻗어 나온 것이기에 당연히 썩어지는 구습이 아니라 옛사람 전부를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상적 변화로는 의롭고 존경받는 교인까지는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당신의 자녀에는 훨씬 못 미칩니다. 종교적 위선의 탈을 쓴 차갑고 활력이 없는 삶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정말로 풍성하고도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아들이 되려면 그분의 성품, 기질, 생각, 태도, 말, 습관, 행동 모든 면에서 닮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놀랍게도 그렇게 노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사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어져 그분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이기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란 그분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특권을 과거에 이미 확보하여서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신자가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 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3절)라고 확실하게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었다고 해서 그분의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려는 소원과 실천이 없다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은 여전히 하늘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또 단지 피상적 변화만 원하는 자는 하나님이 원하지도 택하지도 않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그 실천은 비록 더딜지라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려는 갈망은 생깁니다. 그런 소망조차 없다면 아직 그분과의 부자관계가 전혀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나아가 신자가 때로 그 실천을 게을리 하거나 갈망이 식어지면 그분께서 주도적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 가십니다. 당신만의 방법을 동원하십니다.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을 만나게 허락하십니다. 물론 그 안에는 강권적인 방식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신자에게 환난과 불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 목적은 당연히 신자의 유익을 위해 당신의 거룩하심에 신자로 참예시키려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게 만들어 의지적인 신념이 강한 자로 단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그분의 거룩하심을 맛보게 해서 신자에게 묻은 흠들을 그분께서 털어내시는 것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5-8)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바가 무슨 뜻입니까? 서두에 예를 든 리스 같은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그분의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 자녀가 되지 않았는데도 자녀라고 스스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웃집 아들이 그 집의 분위기가 너무 화목하고 따뜻해 놀러 와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웃집 아들은 평생을 가도 그 집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아들이란 부모가 자기 기업을 물러줄 자로 직접 낳든지 양자로 입양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를 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하나님 아버지로 알지 못하는 자는, 그래서 그분의 자녀로 거룩하고 흠 없이 되려는 소망과 실천이 따르지 않는 자는 단지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로 아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정도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그 자녀의 자리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어떻게 점검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의 리스 같은 고백을 뒤집어서 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나는 3 달러짜리 하나님은 절대로 사고 싶지 않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것이 너무나 아까울 따름이다. 내 영혼을 흔들어서 내 수면(睡眠)을 완전히 방해하는 그런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그저 따뜻한 한 잔의 우유와 햇볕 아래서 즐기는 산뜻한 낮잠과 같은 부담 없는 하나님이라면 내 쪽에서 먼저 배격할 것이다. 내게 흑인을 사랑하고 이민 온 사람을 후대하라고 명령하는 그런 하나님을 찾고 또 찾을 것이다. 나는 따뜻한 엄마 뱃속보다는 앞으로 어떤 환난과 불 시험이 닥치더라도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하기 원한다. 아니 이미 그렇게 바뀌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전부를 주고 사신 너무나 귀한 존재인 내 속에 오직 그분의 충만하심만으로 채워서 담아 가지고 다니고 싶다”

혹시 지금 말할 수 없는 환난에 둘러 싸여 있습니까? 또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그 어려움에서 빠져나오기만 뜨겁고도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까? 그럼 단지 3 달러짜리 싸구려 하나님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그렇게 기도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님은 바로 그 고난을 통해 백만 불짜리 신자로 바꾸려고 당신만의 열심과 능력과 의지로 너무나 크게 역사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진짜로 확신하는지 한번 쯤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너무나 싸고 싼 신앙 때문에 하나님마저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경우가 너무 잦지 않습니까?

분문에서 우리로 이미 당신의 아들로 바꾼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들어서 또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택하시고 십자가 구원을 주신 것도 거저였습니다. 또 그 이후에도 그분께서 우리를 기어이 거룩하고 흠 없는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길 원하시고 또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요컨대 우리로 백만 불짜리 신자로 바꾸어 주는 것도 완전 공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찬미하게 하려면 이미 그 영광을 보고 만지고 듣고 해야 합니다. 생생한 체험으로 자기의 것이 되어야 진정한 찬미가 나옵니다. 반드시 그런 자리로 그분께서 이끄신다는 보장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진리만 확신해도 즉, 비록 내가 거룩과 흠 없는 위치와는 아직은 거리가 아주 멀어도 그분의 영광을 실질적으로는 맛본 셈이지 않습니까? 그럼 그분을 얼마든지 진정으로 찬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하나님이 환난 가운데 있는 신자에게서 정작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신자의 거룩함과 흠 없음과 당신의 영광에 대한 찬미라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가 들고 나가는 것은 불평, 불만, 의심, 불신뿐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그런 잘못을 자주 많이 저질러도 절대로 싸구려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거나 자꾸 까먹는 신자들만 자신을 너무나 싸게 바겐세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온 천하와, 아니 내 전부와 바꾸어서라도 사야할 만큼 값진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권세와 사랑을 거저 받았고 지금도 이 싸구려 같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분 안에 있는 신자는 영원토록 절대로 싸구려 떨어질 수 없는 신분이지 않습니까?

11/1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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