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눅10:30-35)
아주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핍박 받는 자를 부자나 권력자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외적 조건이 당신께서 사랑을 베푸는 데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율법사에게 대답하신 핵심적인 내용이 하나님은 영생을 주는데 인간의 외적 조건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그 원칙은 한 죄인을 구원할 때뿐 아니라 그 이후 은혜를 베푸실 때도 동일합니다. 부와 권력도 인간의 외적 조건이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 따라 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부나 권력을 악한 수단으로 쌓을 때에는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징계를 반드시 받지만 양심적인 부자와 권력자가 단지 돈과 권력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그분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조건은 꼭 보십니다. 그 사람이 교만한지 겸손한지의 여부, 그것도 하나님 당신 앞에서 어떠한지는 반드시 감안하십니다. 예수님은 팔복 강화를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시작했습니다. 재물의 궁핍이 아니라 그 심령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라야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과 권력의 과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조건이 아니라면 신자들이 갖고 있는 그런 잘못된 상식의 역설도 성립이 된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자가 무조건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만 사랑하면 그 자체도 사랑에 역 제한을 두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그런 자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더 힘든 자이므로 더 사랑해야 하는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엄청난 부자나 세도가를 도와줄 부분이, 세상 사람에게는 없을지 몰라도,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가장 가난하고 핍박을 많이 받는 자들이 그런 자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복지공무원(Social Worker)이 몇 달 전에 교통사고로 몸이 완전히 뒤틀릴 정도로 부상을 당했는데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빈민가 소년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담당할 케이스가 아닌 데도 정형외과 의사에게 치료 받도록 도와주어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인생에서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이 아이에게는 진정한 도움을 주었구나!”라고 생각되어 아주 만족했습니다.
몇 년 후 동료들에게 그 소년이 어떻게 되었을는지 추측해보라고 했습니다. 다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생, 의사, 변호사, 공무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흉악한 범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저는 그 소년을 다시 걸을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지만 그에게 어디로 향해 걸어가야 할지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베풀어준 것이 진정한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돈과 권세로 도와주는 것은 사람의 외적 조건만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찾아가서 말로서 격려하고 함께 슬픔을 나누며 위로하는 것도 일시적인 감정상의 평안을 주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소년은 가장 먼저 고쳐주어야 하고 또 정서적으로 비뚤어지지 않도록 많은 권면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도움은 인생의 방향을 어디로 향해 걸어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직업을 알선해 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 또한 외적 조건을 변화시켜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아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되는지 분명히 알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고 했습니다. 강도당한 자가 초죽음이 되어 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는 뜻입니다. 마침 그 곁을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마도 시체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사장은)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찌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뤄워지게 말며”(레21:11)와 또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 그는 제삼일과 제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민19:11,12)는 율법 규정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강도당한 자를 외면하고 가버린 일이 정당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대제사장이 아닌 한 시체를 만져도 정결례만 하면 됩니다. 그들은 최소한 정말 숨이 끊어졌는지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은 했어야 합니다. 혹시 바쁜 일이 겹쳐 돕거나 결례를 따를 여유가 없었다면 다른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 사정을 이야기해서 뒤 처리를 당부했어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라 다른 사람에게 얼마든지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 돈과 시간을 남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말하자면 돈 같은 외적 조건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평소 확신한 자였습니다. 남을 돕는 일보다 자기 돈과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절대로 남을 진정으로 도울 수 없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사마리아인과는 반대의 사고방식에 젖어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설령 시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다 해도 종교적 관습을 앞세워 자기 안락만 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가장 열심이었던 자들이 사실은 하나님보다 돈과 돈이 주는 안락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 사랑은 돈을 사랑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사랑하면 자칫 돈을 사랑하는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외적 요건을 좋게 해주는 하나님은 누구라도 쉽게 또 언제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웃만 사랑하는 것도 예의 미국 공무원처럼 남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려면 하나님과 이웃을 동시에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종교적 열심과 도덕적 성실을 동시에 갖추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돈, 권력, 명예 같은 외적 조건이 인간의 행복을 좌우하는 결정적 근거가 결코 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그분의 영으로 생기를 공급 받을 때에만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깨닫는다”는 의미는 깊이 연구하고 묵상해서 알게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 삶에서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겪다가 결국 흔들릴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외적 조건이 행복을 보장해주리라 믿고 추구했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환난까지 겹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모든 세상적 방도가 소진되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갔더니 그분의 참 평강과 위로가 자기 심령에 넘쳤었음을 절실하게 느껴야 합니다.
어디로 향해 걸어가야 할지 가르쳐 주지 않고 일어나 걷게만 해서는 진정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옳지 않은 길은 너무 많지만 진정으로 옳은 길은 단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잠기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에게도, 돈과 권력과 명예 셋 다 충분히 거머쥔 자라도, 그런 외적조건과는 아무 상관없이 참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 없이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습니까? 도덕적 성실과 종교적 의무로 선행과 구제를 실천하려 들어선 안 됩니다. 비유에 나온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우리보다 그런 부분에 못 미치거나 아주 흉악하고 나쁜 사람이라 죽어가는 자를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이웃보다 돈과 돈이 주는 안락함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먼저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십시오. 누가 뭐래도 시대가 어떻게 변해가더라도 내 자신부터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만을 추구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돈과 돈이 주는 안락함보다 도저히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실제로 더 사랑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분만을 남들에게 궁극적인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전하고 싶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걸어가고 있는 길만 남에게 정확하게 소개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입술로 복음을 전하거나 온 몸을 바쳐 섬기더라도 자기가 예수님 걸어가는 길로 가지 않을 때는 공염불이 될 뿐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재벌회장에게 예수가 없어도 부럽습니까? 불쌍합니까? 아니 내 자신이 예수 외는 아무 것도 없는 거지가 되었어도 자랑스럽습니까? 부끄럽습니까? 다른 말로 지금 당신은 어떤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걸었던 길입니까? 그 반대 쪽 길입니까?
1/11/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