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1:11-16)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요나서 강해 (4)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1:11-16)

 

너무나 신사적인(?) 사공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배를 타자마자 하나님이 풍랑을 일으켜 파선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선원들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격렬한 풍랑인지라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 누구의 신이 노했는지 알아보려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 결과 요나가 뽑혔고 요나도 여호와의 낯을 피했기 때문이라고 그 간의 사정을 실토했습니다. 선원들로선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신이 격노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심히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10절) 그래서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리고는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11절)는 본문 말씀이 이어지는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점점’이라는 단어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럼 요나에게 다그치고는 곧바로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다그친 것은 단순히 화를 내며 원망한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요나의 의견부터 먼저 물었습니다.

 

선원들은 항상 거센 파도와 싸워야 하니까 대체로 성격이 급하고 거칠게 마련입니다. 요나 때문에 이 풍랑이 임했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그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차분하고 이성적인 선원들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평소에는 아주 과격했으나 이상하게 이때만 온유해졌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사공들이 요나를 잠시 살려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자 그 분의 숨겨둔 또 하나의 우연의 일치였습니다. 만약 사공들이 요나를 곧바로 죽여 버렸다면 요나서는 그것으로 끝나게 되므로 이는 비록 숨겨져 있으나 아주 중요한 우연의 일치입니다. 자세히 그 배경과 의미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불신자들처럼 나라마다 사람마다 섬기는 신들이 다 다르며 또 그러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믿는 여호와가 이 풍랑을 일으켰다면 그 신의 노여움을 다스리는 방법도 요나만이 알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들마다 또 각 경우마다 제사 드리는 절차와 제물의 종류가 다른데 이럴 때에 너희 종교에선 어떤 제사를 드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실토한 요나에게 구원의 방식도 다시 물어서 정확한 답을 받아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네가 믿는 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어서 빨리 이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어보라는 것인데 만약 네 방식으로 잠잠하게 못하면 우리 방식대로 시도해볼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상 종교는 신들의 이름과 종교적 의식은 다 달라도 근본사상은 하나로 동일합니다. 자신과 가족의 현실적인 안락과 형통만을 비는데 자기들 신에게 바치는 치성의 질과 양에 따라서 축복의 질과 양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은 인간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어도 누군가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만 신이 분노를 거둘 것이라고 다들 무언의 합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지자인 요나는 당시 이방인들의 기본적인 종교관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공들이 최악의 경우에는 자기를 제물로 바다에 바치길 원한다는 뜻도 눈치 챘을 것입니다. 본문이 일어난 사실만 간단히 진술하고 있지만 배안의 전체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화물마저 이미 바다에 던졌습니다.(5절) 그만큼 풍랑이 심했고 할 수 있는 모든 방책을 다 동원한 것입니다. 이젠 마지막 조치로 신의 자비를 구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이 요나에게 점잖게 말했지만 “미안하지만 이 사태의 시발자인 네가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어야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입니다.

 

요나도 도무지 풍랑이 잦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어차피 죽을 바에야 스스로 바다에 뛰어드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 전에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 했던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엄청난 풍랑을 보고 절감하고 크게 뉘우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12절)고 말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죽게 할 수는 없다는 윤리적 책임감도 아주 컸던 것입니다. 어쨌든 현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습니다.

 

불신자들의 기도도 응답되는가?

 

그런데 성경은 자진해서 제물로 바쳐지겠다는 요나의 대답을 듣고도 사공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려고 노력했다고 말합니다.(13절) 막상 요나가 자기들이 기대했던 대로 순순히 응해주었는데도 또 다시 곧바로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큰 파도에 자기들을 위해서 스스로 몸을 던져주겠다고 하니까 사공들도 양심에 일말의 가책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 노를 저어 봐도 바다는 더 흉용해져서 배는 전복할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풍랑이 그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고 파도는 곧바로 잠잠해졌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을 것이며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습니다.”(15절)

 

사공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서 기도한 것과 마지막에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보면 언뜻 그들도 여호와를 믿은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은 이 일이 요나가 믿는 신 때문에 일어났기에 기도도 그 신의 이름을 부르며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뿐입니다.

 

실제로 저와 아주 가까운 분이 제가 목사니까 이와 비슷한 주제의 질문을 진지하게 물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특정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대형 병원에서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의 환자들을 위로해주는 일에 자원봉사하고 있었습니다. 환자에게 먼저 종교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미리 작성된 동일한 한 가지 내용의 기도문에 각 종교의 절대자의 이름만 번갈아 대입하여서 수술이 잘 끝나게 해달라고 대신 기도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과연 그렇게 기도해도 응답이 되며 또 그러는 것이 종교적 성경적으로 올바른 일인지 물었습니다. 평소 자신이 생각해도 뭔가 불합리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환자에게 두려움을 줄여서 정서적인 안정은 조금 줄 수 있겠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는 신자가 기도해야만 응답이 되며 그 전에 기도는 제 삼자보다 본인부터 진정한 믿음을 갖고 해야만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동일한 상황이라도 미리 작성해놓은 문구대로 읽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문이므로 아무 능력도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지금 사공들도 그와 같은 맥락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평소에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으면서도 그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여겼습니다. 여호와도 여러 신들의 하나이지만 이번 일은 어쨌든 제비가 뽑힌 것이 증명하듯이 여호와가 분노했기에 그 이름으로 간구한 것입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종교관은 누구나 여러 신들을 동시에 각 신들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주장 같으나 그런 생각이 발전하다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잡신들도 다 능력이 있으며 사탄을 믿어도 된다는 데까지 갑니다. 일류대학을 나와 지성과 이성이 뛰어난 큰 회사 사장도 계획대로 사업이 풀리지 않으면 영험한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벌리는 이유입니다.

 

우상은 참 하나님을 대체하는 모든 것이므로 모든 우상 종교의 배경에는 당연히 사탄의 농간과 조종이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 모든 종교는 창조주 참 하나님을 믿는 종교와 그렇지 않은 사실상 사탄을 숭배하는 종교 두 종류로만 나눠집니다. 바울은 그래서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10:20,21)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중한 경고인지 아셔야 합니다.

 

사공들이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도 잘 따져봐야 합니다.(14절) 요나를 바다를 잠재우는 제물로 바치긴 하지만 요나가 자기 죄 때문에 자원한 것이지 자기들이 강요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연유가 되었던 여호와의 선지자인 요나를 죽이면 혹시라도 여호와가 거꾸로 자기들에게 분노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잠시나마 요나를 살려두고 배를 살려보려고 노력했던 진짜 이유였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 문제없이 자기들이 생각하고 기도한 대로 되었습니다. 요나를 제물로 던지자 바다가 잠잠해졌고 그래서 바다를 실제로 다스리는 여호와가 크게 두려워져서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했다고 말하지 믿었다고 하지 않기에 그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것은 아닙니다. 기도한 대로 파도가 잦아들었고 무죄한 피를 자기들에게 돌리지 않고 목숨을 건졌으니 그 자리에서 자기들 방식으로 여호와께 감사의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주면 그곳에서도 다시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최대한 잘 봐주어야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의 리스트에 여호와를 또 하나의 신으로 추가하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우상과 다른 여호와

 

그렇다면 여호와가 과연 그들의 기도를 들어준 것입니까? 그들의 생각대로 요나를 바다에 제물로 바쳤으니까 잠잠해진 것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기도대로 된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요나를 살렸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요나가 예뻐서가 아니라 누차 말씀드리는 대로 아직 시킬 일이 남았고 그 일을 반드시 요나를 통해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배는 다시스로 향해 가고 있고 태풍은 순전히 요나 때문에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으로선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없고 배도 다시스로 예정된 날짜에 도착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반면에 요나는 정반대의 니느웨로 되돌려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더 정확히는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폭풍우를 일으키고 고래를 예비해둔 것입니다. 고래더러 요나를 보호하고 넓은 바다를 대신 헤엄쳐선 니느웨로 가기에 좋은 해변에 토해내게 만드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제물로 받는 분입니까? 당신께서 어떤 제물이라도 기분에 안 차면 크게 분노하면서 인간들에게 큰 벌을 내리는 분입니까? 결코 둘 다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사공들은 그런 종교관으로 기도했고 형식적으로 여호와의 이름만 불렀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주문 같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며 기독교는 사공들의 그런 종교관과 기도방식을 절대 지지하지 않습니다.

 

지금 사공들의 주문 때문에 파도가 가라앉았다면 여호와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알리바바의 신이 되며, 요나가 제물로 바쳐졌기에 그랬다면 인간 제물을 받은 가나안의 우상 신들과 같은 수준이 됩니다.

 

요나가 회개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일이며 스스로 제물을 바치겠다고 나선 것도 윤리적으로 아주 선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호와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미숙한 믿음일 뿐입니다. 사공들도 요나를 곧바로 죽이지 않고 끝까지 파도를 이겨보려고 노력한 것은 분명히 윤리적으로 선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우상 숭배를 하는 믿음에 따라 여호와도 같은 부류의 신이라고 간주한 것은 영적으로 아주 미개한 탓이었습니다.

 

공리주의 신앙과 예수 십자가 신앙

 

본문의 우연의 일치에서 정작 따져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사항이 남았습니다. 혹시라도 요나가 자원해서 죽어 다른 사람들이 살았고, 사공들도 같은 생각으로 요나에게 대신 죽으라고 요구했으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실현시킨 것이라고 해석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살펴본 대로 어쩔 수 없이 궁리에 물린 것이지 처음부터 그런 숭고한 희생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공들도 근본적으로 다신교 우상 숭배를 한데다 인간적 종교적 윤리에 따라 요나가 책임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둘 다 한 사람이 희생하더라도 여러 명이 사는 것이 좋다는 공리주의(功利主義)적인 사상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왕이면 소수보다 다수를 살리는 것이 좋다는 개념은 십자가 복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주도한 대제사장 가야바가 산헤드린 공회를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요11:50)

 

십자가의 핵심은 자기가 죽어서 다른 이에게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참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택한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땅 끝까지라도 쫒아가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후에 하늘에서 큰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든 하늘의 천국이든 이왕이면 머리 수자를 많이 채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충만한 기쁨을 갖고 당신을 감사 찬양 경배하는 자라면 한 명이라도 족하십니다.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일부 목회자들이 교회의 양적 성장에만 눈이 어두워서 십자가 복음을 퇴색 변개시키며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치성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공이나 가야바 대제사장의 수준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나가 삼일 간 고래의 배속에서 통째로 삼켜졌다가 살아난 사실만 예수님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부활한 사건과 비교할 뿐입니다. 요나든 사공이든 니느웨 사람이든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공로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자에게만 구원을 주십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이 때에 맞추어서 그를 보호해주신 기적에만 주목하면 성경도 하나님도 아직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살펴본 대로 요나와 사공들의 사상으로는 즉, 인간이 고안한 윤리와 종교로는 인간을 절대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여호와는 오직 당신의 뜻대로만 세상만사를 주관하시기에 기복주의, 도덕주의, 공리주의 등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간 제물이 신의 노여움을 푸는데 최선의 방식이라고 믿는 사공들에게 평소와 달리 요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잠시 살려두려는 마음이 생긴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막상 본인들로선 자기들 마음에 어떻게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평소 자기들의 종교적 사상과 관습에 따라 행했습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요나는 물론 그 사공들의 종교관 신관을 포함해 모든 생각을 벌써부터 훤히 꿰뚫어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나가 무슨 생각으로 배 밑창에 깊숙이 숨어들었는지, 그 전에 왜 도망갔는지, 선장이 깊은 잠에 떨어진 그를 왜 깨웠는지 다 아셨습니다. 사공들이 제비로 요나를 뽑고도 항로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다가 결국 무죄한 피를 자기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 것과 파도가 잠잠해진 후의 당신께 서원하게 된 그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모르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안전하게 원래 목적지인 니느웨로 데리고 갈 고래를 훨씬 오래 전부터 준비해두신 것입니다.

 

요나서 결론에서 하나님이 그를 크게 혼을 낸 것도 당신의 니느웨에 대한 심정과 계획을 전혀 눈치도 못 챈 요나의 마음을 꿰뚫어 알고 계셨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분의 우리에 대한 앎은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지 우리가 행동한 이후가 아닙니다. 행동이 끝난 다음에는 누구나 알 수 있고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입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물론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공존하지만 항상 악한 마음이 우세를 보이니까 인간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성경이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인류의 죄악이 끊임없이 발전 확장되었다고 기록한 그대로입니다. 또 그러니까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깰 것이라고 처음 복음을 예시한 이후 줄곧 메시아가 인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인류에게 아무 소망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또 그래서 그분이 꼭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계속해서 밝혀 놓은 책입니다.

 

믿음의 출발과 핵심

 

믿음의 출발이자 핵심은 내가 종교적 치성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분을 아는 것은 그분이 나를 아는 것의 지극히 일부밖에 안 된다는 사실부터 철저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개인적으로 하나에서 열 까지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 당신의 거룩한 계획에 따라 나의 일생을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과 모든 행위와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그분이 나를 그렇게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이하고 그분의 그 지식은 너무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시139:1-6)

 

신자는 인생사의 모든 일을 특별히, 어떤 우연의 일치라도 하나님의 필연으로 바꿔서 분별 해석 판단 결정하여 자기 삶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필연 중에 역사상 최고의 필연이 무엇입니까?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어리석은 백성들은 사탄에게 농락당해 자기들 생각에는 여호와를 위한다는 최고의 종교적 열성과 방식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대신해 하나님께 저주 받는 모습으로 죽어서 인간을 구원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로마총독 빌라도마저 무고한 예수님을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본문의 사공들처럼 예수님의 피는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선언하면서 일말의 윤리적 종교적 양심을 드러냈습니다.(마27:24)

 

반면에 그 말을 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과 그분의 택한 백성들은 곧바로 주님의 피를 자신들과 자기들 자손에게 돌려도 좋다고 큰소리쳤습니다. 본문의 이방인 사공들보다 윤리든 종교든 훨씬 더 타락한 모습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교만이자 죄악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을 저주하며 죽인 자들마저도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 미혹되어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는 당신의 의의 기준에 결코 미칠 수 없음을 인간들보다 더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대신 감당하게 하신 무한한 긍휼 앞에 진정으로 항복하고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믿으면 구원해 주십니다.

 

코로나 사태를 보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은 신자가 십자가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그 믿음이 순전한지 또 그 후로도 그 믿음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다 아십니다. 지금 굉장히 심각하지만 은혜가 넘치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서 그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로 평생에 걸쳐서 따라가고 있는지 아십니다. 반대로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교회에서의 종교적 활동을 구실로 고난에서 구해주고 삶을 윤택케 해주는 복만 구하는지 다 아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라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여서 떠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도록 일생 동안 그 크신 권능으로 보호 인도해주십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신분과 특권입니까?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오늘날의 신자의 믿음은 미숙했던 요나와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 모든 종교와 달리 하나님은 신자의 윤리적 종교적 열성과 실천에 우선적으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신자로선 자신과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외부적인 모습에 따라서 자신의 믿음이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하는 실패 잘못 죄악뿐 아니라 우리의 고뇌 갈등 상처 필요 소망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당신만의 선하신 때와 방식으로 해결하고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풍요와 궁핍을 신자로 당신의 뜻을 실현하게 이끄는 통로로 활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하는 바까지 아시고 내가 진정과 신령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다면 비록 내 판단과 방식과 때가 틀렸다 할지라도 당신께서 반드시 선한 결말로 인도하십니다.

 

코로나 같은 미증유의 사태를 당해서 염려 고민 갈등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 그 중에서도 특별히 신자들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코로나로 인해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무리 나를 실망 염려시킬 지라도 하나님 그분 대해서 결코 실망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혹시라도 코로나 사태를 잘 대처하지 못하는 나라와 백성들을 열등하다고 멸시하지는 않습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참에 세상의 악인들이 병에 걸리고 사태의 주원인인 중국이 몽땅 망해라고 기도 내지 소원하지는 않습니까?

 

기독교 신자들이 은연중에 종교적인 우월의식을 갖는 것은 인종 사상 문화 종교 등의 장벽을 무너뜨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직접 거역하는 큰 죄입니다. 무죄한 자들의 피를 덮어쓰겠다고 나선 사탄에 농락당한 유대인들과 같은 꼴입니다. 무죄한 피를 자기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원한 빌라도나 본문의 사공들보다 도덕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훨씬 더 열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스로 그 배가 무사하게 도착하도록 했고 요나도 안전하게 니느웨로 가서 당신의 일을 하게끔 인도하셨습니다. 비록 요나가 분명히 큰 죄를 저질렀지만 당신께서 합력해 선으로 바꾸신 대표적인 예입니다. 요나서에서 쉽게 알 수 있는 때맞춘 기적에만 주목해선 안 됩니다. 본문의 아주 신사적이고 양심적인 사공들을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숨겨진 엄중한 뜻을 놓쳐선 안 됩니다.

 

더 중요하게는 본문에서 진하게 풍겨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하고 또 주변에 그 향기를 품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오직 하나입니다. 종교적 열성과 행위가 아닙니다. 과연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완전히 잠겨있는지 또 그 사랑을 세상을 향해 실현하고 있는지만 보십니다.

 

(10/1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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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눅22:31-34) 사탄에게 제자들을 넘겨준 예수님 master 2022-01-03 11
135 유다의 자살을 왜 말리지 않았을까요? master 2021-12-03 23
134 예수님 부활사건을 이성적으로 접근해도 되는지요? master 2021-09-04 128
133 (요6:16-21) “내니 두려워 말라.” master 2021-06-28 33
132 (눅15:1-2, 17:7-10) 예수 천당 불신 지옥. master 2021-06-28 36
131 (마27:45-50) 예수부활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 master 2021-04-05 79
130 (눅15:31,32) 인간에게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은? master 2021-04-05 20
129 (눅15:3-7) 잃어버린 양이 과연 누구인가? master 2021-03-02 34
128 (눅15:1,2) 올해를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 master 2021-03-02 14
127 (요7:37-43)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가? master 2020-12-26 52
» (욘1:11-16)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master 2020-10-2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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