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7:45-50) 예수부활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

(2021 부활주일 설교)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마27:45-50)

 

예수는 미친 사람인가?

 

현대의 기독교 최고 변증가라고 말할 수 있는 C. S. 루이스가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유명한 논증을 했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분은 미친 사람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당신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아들, 둘 중의 하나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고 당신이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으로 당신보다 이천 년 전의 사람인 아브라함도 당신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이라면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절대로 입에 담지 못할, 아니 아예 상상도 못할 진술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앞뒤로 따져 봐도 주님이 미친 사람일 리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은 역사상 최고의 도덕적 스승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루이스의 너무나 타당한 논리대로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로마군 백부장도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는 물론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이라곤 전혀 없는데도 십자가 처형 이후에 되어진 상황들을 보고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54절)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해서 그에게 믿음이 생겼다고까지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로마군 장교라면 합리적이고 믿을만한 사람인데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솔직히 말한 것이니까 그 고백의 진실성이 보장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기독교와 예수님에 대해서 비방 반발하는 사람들이 그 주장의 근거를 찾으려고 성경을 세밀히 파고 들지만 거꾸로 자기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번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을 정말로 깊이 연구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비평하는 사람은 성경을 전혀 읽지 않았다는 반증으로 사실상 비평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부터 읽은 후에 타당한 근거를 갖고 비평하라고 하면 성경을 읽으려 들지 않습니다. 아예 믿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혀 놓았기 때문이고 어쩌다 성경을 읽어도 도리어 본문 46절 같은 말씀을 꼬투리 삼아서 비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죄인들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가 왜 아버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의 유대인들도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고 했는데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지 않았으니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승천한 엘리야가 종말에 고통을 당하는 자를 구원해주러 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 당신의 외침대로 하나님께 버림받았으니 주님의 부활도 후대에 제자들이 지어낸 루머라고 아예 무시해버립니다. 유감스럽게도 불신자들만 그런 반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주의 노선의 교회들은 부활 같은 초자연적인 이적은 인간 이성으로 따져서 도무지 믿을 수 없으니 그 배경의 영적인 의미만 받아들이면 된다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간혹 보수 측 교회의 일부신자들도 겉으로 내색은 못하고 은연중에 그런 주장에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조사해보라.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루이스의 변증 논리는 기적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기적들이 사실이거나 지어낸 이야기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의 신뢰성이 무너지기에 기독교 자체도 완전히 무너져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나 기대와는 정반대로 너무나 정미한 기록입니다. 오히려 그들 방식대로 이성적으로 따져보아도 부활의 진실성은 더 견고해질 뿐입니다.

 

우선 십자가에 사형을 당하는 죄수에게 해면에 포도주를 적시어 장대에 달아 마시게 한 것은 일종의 진통제로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마저 마실 기력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목요일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여러 번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온갖 희롱과 매질에 시달리다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 여섯 시간 후인 오후 세시에 운명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금요일 오후에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하게 십자가에서 내려달라고 요구하자 빌라도는 그렇게나 빨리 죽었느냐고 놀랬습니다.(막15:44) 십자가에 달려도 통상적으로 며칠은 버티는데 주님은 겨우 반나절 만에 운명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사십에 하나 감한 39대까지 맞은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것은 유대교의 관습입니다. 로마법에는 그런 규정이 없기에 대수에 상관 않고 죄수가 기절할 때까지 자기들 분이 풀릴 때까지 맘껏 때렸습니다. 채찍을 맞으면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이미 거반 죽은 셈이었습니다. 옆에 선 사람들이 엘리야를 부르는가 보다 오해한 것도 그만큼 예수님이 기진맥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돌아가실 순간이 다가오자 천지 사방이 어두워졌는데 단순히 검은 구름이 몰려와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태양이 가장 밝은 낮12시부터 오후 3시 사이니까 어지간히 먹구름이 끼어도 온 땅이 어두워졌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표현은 그 전에는 해가 비취고 있다가 갑자기 그 빛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이를 두고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사막의 열풍이 불러온 모래먼지였거나 갑작스런 일식 현상이라고 해석합니다. 사막 열풍이 일으킨 먼지 구름이었다면 그런 언급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때가 유월절 절기로 음력인 유대력으로는 14일 보름달일 때인데 그 때는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시의 모든 사람이 먼지 구름이나 일식을 구분 못할 리 없는데다 당시 상황과 시기에 전혀 맞지 않는 너무나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시간에 맞춰서 하나님이 비상한 방식으로 간섭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도 그 일이 심히 두려워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당시의 공용어인 아람어로 외친 것이 거꾸로 부활의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인데 우리가 봐도 당시 상황에 너무나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예수님은 기독교를 창시한 자이고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외침은 세계적 종교의 창시자에겐 너무나 어울리지 않고 도리어 본인을 깎아내리는 진술이므로 종교 경전에 포함시켜선 안 될 내용이지 않습니까? 위대한 인물이라면 아주 의연하게 죽어가는 모습으로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만 합니다. 이순신장군이 최후의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유탄에 맞아 죽어가면서 적에게 자신의 죽음을 절대 알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으로 인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를 받기는커녕 존경받을 만한 측면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3 년간의 공사역 동안 쌓았던 신망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말씀입니다. 최소한 평온이라도 유지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죽음 이후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야 하는데 큰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기 싫어서 치사하게 구걸하는 모습이어선 전혀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완전한 절망에 빠져 패배하는 모습으로 어떻게 당신을 따를 추종자에게 구원을 베풀 수 있습니까? 부활할 것이 계획되어 있었다 해도,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의연하게 숨을 거두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 구절만큼은 성경에 대해서 가장 비판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조차도 그 진실성을 인정합니다. 후대의 제자들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머리를 짜서 지어내었다 해도, 아니 그럴수록 이 구절만은 절대로 포함시켜선 안 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을 후대에서 지어냈다면 그만한 바보 멍청이도 없습니다. 제자들끼리 편집회의를 거쳤다면 틀림없이 통으로 편집 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겪은 극심한 고통을 강조하려고 지어내었다 쳐도 복음서가 회람 되자마자 신자들로부터 적합하지 않다는 항의가 빗발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이천년 간 아무도 이 말씀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초대교회교인들 중에는 골고다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도 많았고 그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바로 이런 모습으로 외쳤고 그대로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뜻은?

 

예수님의 이 외침에 주목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대못에 찔린 손과 발이 찢겨져 아프다거나, 오래 동안 매달린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던가, 입안이 바싹 마르고 머리가 빠개질 것 같다거나, 가시 면류관이 이마를 파고들어가 흐르는 피로 눈을 뜨지 못하겠다는 등의 말씀은 일절 없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만 괴로웠던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왜 나를 버렸느냐고 말합니다. 성육신하여 인간으로 사셨던 그 인간 전부가 버려진 것입니다. 인간 예수로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전부가 완전한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신의 전부를 죽어 마땅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내어준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 할 때에 이삭도 틀림없이 속으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또한 동일한 슬픔으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의 생명보다 더 귀한 이 아들을 버리셨나이까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외침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들의 장례식에서 울부짖을 슬픔까지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시고 함께 슬퍼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당신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여 실제로 칼로 내리치려 할 때에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둔 어린 양을 제물로 받으시고 대신에 이삭을 살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보다 이천 년 전의 사람인 이삭을 구원하려고 십자가 대속 양으로 모리아 산의 현장에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의 그 울부짖음을 듣고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정말로 아브라함이 당신의 구원의 때를 보고 즐거워하게 만들었던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심에도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제로 완전히 단절 되었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전부를 버림받았으니 그만큼 인간의 죄는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가 사악하게 타락한 죄의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썩어 빠진 존재인지라 속에서부터 온갖 더러운 것이 나온다고 선언했지 않습니까?

 

부활이 사실이라면?

 

사도가 되기 전의 바울로선 인간 예수를 부활한 독생자 하나님이라고 믿고 경배하는 나사렛 이단을 하나님을 위해서도 절대로 그냥 둘 수는 없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어겼고 특별히 안식일에 멋대로 행하여 유대 사회의 질서를 흩트렸고, 성전 제사가 타락했으니 성전을 헐라고 명했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며 성부와 성령과 같은 위치에 두었고, 삼일 만에 부활할 테니 당신의 살과 피를 마시며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가장 경건하고 의로웠던 자기 같은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소경 인도자라고 정죄하며 화를 내릴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하나님께 저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이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로서 이스라엘 성전의 영광을 회복하는 자여야 하는데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는 천하 이단 중의 괴수였고 그 황당한 거짓말을 믿는 자들이 더 늘어나기 전에 씨를 말려야 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고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처형도 주도했습니다. 급기야 디아스포라 유대인 신자들을 잡으려고 대제사장의 라이선스를 받아들고 다메섹까지 가려했습니다.

 

그러다 알다시피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늘의 찬란한 빛 가운데서 일대일로 대면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처럼 그도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또 예수님이 무덤에 갇힌 것처럼 사흘 간 흑암에 잠겨 봉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보내신 평신자 아나니아의 기도로 광명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처형 현장에는 없었으나 예수님의 이 외침에 관해선 익히 전해들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간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 일대일로 대면한 후로는 자기야 말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대신에 버림받아 죽음으로써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다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이 외침이 당신보다는 바로 당신을 완악하게 거역하는 자기 같은 사람들을 위한 외침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미워했던 예수님은 당신께서 선언한 그대로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무엇보다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부활이 사실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는 은혜를 통해 바울은 이 땅에서부터 자신의 썩어빠진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나중에 자기가 순교하더라도 주님이 자기에게도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동일한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고 선포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성경의 부활 기사가 엉터리라면 그것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이 가장 바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거룩하게 사느라 현실에서 뒤처지고 거기다 불신세상으로부터 비방 멸시 박해를 받으니까 이 땅의 삶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하고 죽도록 고난만 겪다가 마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선언은 반어법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신자들은 거꾸로 이 땅에서 가장 불쌍하지 않은,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자에게 부활이 있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이지 않습니까? 모든 인간이 최후에 정복할 대상이 바로 죽음인데 그것을 뛰어넘고 더 영광스럽고 영원한 다음 생애가 확보되었지 않습니까? 바울과 베드로를 필두로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그러니까 그 극심한 핍박에도 순교를 마다 않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태초부터 약속하신 대로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을 주려고 정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셨다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인간들을 죄악에 빠진 채 사탄에 미혹되어 있는 잃어버린 상태로는 절대로 버려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또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없이는 어떤 인간도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이의 인생이 온 땅을 뒤덮은 어둠 속에서 시작해서 여전히 어둠 속에서 마쳐야만 했습니다.

 

천지를 뒤덮은 어둠이 구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니까 주님이 운명하신 오후 3시에는 거두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전과 후의 시대가 흑암에서 광명으로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의 인생도 부활영생을 못 얻는 자에서 이미 얻은 자로 바뀐 것입니다.

 

최고로 비참한 죽음

 

세계적인 종교 창시자 중에 예수님만 너무나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것도 메시아로서 단 한명도 제대로 구원해놓지 않고서 말입니다. 회계를 맡았던 성실한 제자는 스승을 팔아 넘겼고, 수제자는 비천한 하녀 앞에서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며, 나머지 모든 제자들은 전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서 골고다 현장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옷을 다 벗고 나체로 도망갔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스승의 임종도 지키지 않았고 심지어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렇게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유대 대중들도 순간적으로 안면을 싹 바꿨습니다. 자기들이 추종하는 이유와는 달리 로마를 물리칠 시도를 하지 않자 그렇게 기적을 베풀고 말씀으로 위로해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인간의 마음은 세상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했고 그 존재 전체가 죄악의 덩어리였습니다. 정작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어야 할 사람은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선 예수님은 반드시 하나님에게 완전히 버림받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다 짊어지고 완전히 죽어야만 완전하고도 영광스런 부활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죽음이 그만큼 비참했기에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 따라오는 부활이 그만큼 영광스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너무나 극심한 고난이 지속되자 하나님마저도 자신을 완전히 외면하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예수님처럼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시편22:1) 다윗 본인은 몰랐지만 성령의 영감으로 시편 전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마치 그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것처럼 세밀하게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예언한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주님은 이천년 전의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의 절대 절명의 순간에나 천 년 전의 다윗의 고난의 때나 함께 계셨던 영원한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과 똑같은 방식으로 두 번 하나님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다윗은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15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망 일보 직전까지 가서 제대로 말도 못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위 사람이 제대로 못 알아 들을 정도로 기진한 상태에서도 애타게 하나님을 부른 것과 같습니다. 다윗의 그 극심한 고통도 주님이 대신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사역 내내 제자들과 떨어져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는데 틀림없이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아버지가 시키지 않으면 아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선언했듯이 성부와 성자라는 실제로 부자간의 친밀한 관계에서 대화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이 하나님이면서도 성부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인 우리 대신에 달린 인간의 입장이니까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정작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어야만 하는 우리더러도 성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더 나아가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요컨대 지금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외침이 없었다면 우리는 참 생명으로 살아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 본체로선 너무나 비천한 모습으로 운명하셨지만 실은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었던 우리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 각자가 이런 외침을 하면서 이삭과 다윗과 바울처럼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을 맞아 우리에게 심각히 물어볼 질문은 하나입니다. 과연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본문의 주님처럼 외쳤다가 다시 살아난 체험이 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도무지 내 스스로는 바꿀 수 없던 내가 새롭게 부활했으니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는지 여부입니다.

 

만약에 그런 체험과 확신이 있다면 당연히 남은 생애를 바울과 스데반처럼 보내야 합니다. 이 땅보다 천국을 특별히 요즘 같이 허망하고 생존마저 염려되는 세태에선 더 간절히 소망하지만 주님이 이곳에 계속 남겨둔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너무 거창하게 내 목숨 바쳐 헌신하겠다고 나설 필요까지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생하게 예언했던 다윗은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24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주님이 반드시 들으시고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응답하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의 모든 고통을 주님 앞에 내어 맡기면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한 것입니다.

 

시편 118편의 기자는 또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4-6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영원히 자기와 함께 하시니까 영원하지 않고 금방 있다가 들풀처럼 사라질 인간이 나에게 이 땅에서 행하는 어떤 수모, 비방, 박해, 고통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죄악과 사탄 앞에 당당히 맞서면 주님의 부활 생명을 이미 소지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활절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내 자신이 십자가 은혜 안에서 거듭난 은혜를 기뻐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세상의 핍박에 전혀 구애 받지 않고 평생토록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세상 사람과는 정반대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4/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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