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1,2) 올해를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 

돌아온 탕자 시리즈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1,2)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가 바뀌어도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으며 세상은 여전히 온갖 고난 시기 분쟁으로 지새기에 올해도 평안한 날이 하루도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궁핍했던 현실과 종교적 핍박을 이겨냈던 초대교회 때처럼 순전한 복음을 붙들지 않으면 코로나가 종식되어도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새해 벽두에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배워보고자 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이만큼 잘 드러나 있는 비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집 나간 둘째 아들의 세 비유로 구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가지 주제로 죽 연결해서 가르치신 말씀이므로 처음부터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서론 격으로 예수님이 세 비유를 말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모든’이라고 수식했지만 이스라엘의 세리와 죄인들이 전부 다 모였다는(all)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 ‘모든’이라는 수식어가 종종 등장하는데 많다는(many) 것을 강조하는 히브리 어법입니다. 우리도 시골운동회에 사람이 많이 몰리면 그 동네 사람 모두 모였다고 말하듯이 말입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의 세금 징수 업무를 그 속국의 현지인에게 맡겼습니다. 세리는 동족에게 주민세나 관세 등을 수거해 로마에게 바치는 유대인으로 로마의 관리입니다. 자기재량으로 세율을 결정하고 인하 면제도 해줄 수 있었는데 그 권세를 이용해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로마를 위해 충성하는 민족의 배반자인데다 불법과 부패를 자행하니 사람들로부터 크게 미움을 받아 유대사회에선 출교된 신분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던 시기에 일본에 온갖 아부를 바치면서 동족을 등쳐먹는 일본경찰의 한국인 앞잡이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죄인은 별도의 수식이 없으면 이방인을 말합니다. 온갖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고 모세의 거룩한 율법을 몰라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세속적인 쾌락만 쫓고 살기에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보듯이 식사 교제를 하면서 중요한 거래나 일을 처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했고 율법과 무관해 심판이 확정된 이방인과의 식사 교제는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세리와 죄인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에 아무도 상종도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봐선 일반 유대인에 비해 숫자로는 훨씬 적습니다. 그런데도 ‘모든’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한 것은 상당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을 따랐고 그 현장에 있던 자들은 모두 주님 앞으로 나아왔다는 뜻입니다. 평소에는 유대인들과 전혀 어울릴 수 없고 지금도 그들이 냉대할 텐데도 비유컨대 선뜻 예배당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셈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사회의 관습과 인식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을 한 번도 배척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그들과 식사를 나눴고 삭개오의 경우는 그 집에서 하루 밤 유숙하면서 교제했습니다. 히브리 어법상 ‘모든’은 또 “각각의 개인”(everybody)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세리와 죄인들이 어느 누구의 강요나 권면 없이 각자가 자기 판단 하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 원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미워해도 주님의 가르침은 꼭 들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고 뒤에서 수군거렸습니다. 나사렛에서 온 한 랍비가 모세 율법과 유대 사회 관습을 지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이구나라고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가르친 이유

 

주님은 그 수군거림을 듣고 세 비유를 가르쳤습니다. 그럼 일차적으로 당신께서 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유대인들이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음식도 나눠먹지 않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세 비유의 내용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구원에 관한 것이므로 세리와 죄인을 배척하는 너희야말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유대인들더러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고 식사 교제를 나누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려는 뜻은 아닙니다. 세리와 죄인에게까지 교제 범위를 넓히는 것은 조금 더 착하게 만들 뿐이며 여전히 행위 구원에 머무는 것입니다.

 

거기다 유대인들의 그런 규정이 사실상 잘못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살펴본 대로 삭개오만 예외였지 세리는 민족을 배반한 매국노요 부정부패로 치부한 악인들입니다. 이방인들도 음란하게 우상을 숭배하며 자기들 평안과 형통만 추구하며 세속의 쾌락만 탐닉한 죄인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그들과 교제하느냐 마느냐보다 교제를 금지시킨 근거와 기준이 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그들 스스로 제정한 도덕적 종교적 규정이었습니다. 당장 유대인들로선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 따라 나눈 것이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리는 율법을 제정할 당시에 있지도 않았던 직업이라 율법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외국인은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라고 분명히 지시해 놓았습니다.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레19:33)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24:22) 특별히 모세가 유월절 제사를 규정하면서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출12:49)고 선언했습니다. 유월절 제사는 일차적으로 출애굽 탈출을 기념하지만 근본적으로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하므로 구원에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도덕과 종교의 기원

 

지금 도덕과 종교가 나쁘다고 말하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유대사회 전체의 질서를 바로 잡고 악에 오염되는 것을 막으려고 세리와 죄인과 교제를 금지한 의도는 나름대로 타당했습니다. 도덕과 종교가 맡은 역할과 그 범위를 아셔야 합니다.

 

먼저 도덕과 종교가 어떻게 해서 생겼습니까? 어떤 공동체가 최초로 도덕을 제정한 배경은 사람의 탈을 썼다면 이런저런 일은 범해선 안 되겠다고 공통적으로 본성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거를 하지 말며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자연스레 합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인간관계 여섯 계명들은 모든 인간 공동체들이 적용하는 최소한의 윤리입니다. 사람은 한 조상을 지녔고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가 아니며 인생살이에 인과응보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진리를 깨달은 결과물입니다. 개인이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도 많이 발생하고 무엇보다 한 명의 예외 없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벽은 절대 뛰어넘을 수 없다고 인식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을 움직이는 어떤 절대자 내지는 절대적 원리가 있으리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종교가 출현했습니다. 이 또한 창조주 절대자에 의해 피조 된 연약하고 제한된 인간인지라 자식이 부모를 찾듯이 하나님을 소망하는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절대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도덕과 종교를 고안하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인식은 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심어놓은 본성에 따라 당신을 경배하며 그 거룩한 뜻에 맞게 살아야만 하겠다는 영적인 갈증 내지 요구를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짐승이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일은 결코 없지 않습니까?

 

모세 율법의 헌법 격인 십계명이 첫 네 계명은 하나님만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하고 그 바탕에서 인간관계를 세워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여호와를 따르지 않으면 온전한 의미와 가치 있는 인생을 결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율법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만이 구원과 심판을 주관하고 이 땅의 삶도 아름답고 거룩하게 통치하시는 존재이라는 것입니다.

 

도덕과 종교의 한계

 

문제는 어떤 인간도 모세의 거룩한 율법은 둘째 치고 도덕과 종교가 규정하는 계명조차 제대로 준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그 간단한 가르침조차 아무도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에 절대 들지 못한다고 정죄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세리와 죄인과 교제를 금한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그만큼 완악한 교만 아니 큰 죄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수여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산 밑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백 년간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할 동안 황소 신의 제사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방의 우상제사는 음주가무는 물론 성적으로 음란한 교섭으로 끝나는데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모세가 격분하여 도대체 웬 우상이냐고 따지자 아론이 어떻게 대답한 줄 아십니까?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출32:22-24)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는 섬기기 싫으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근사하게 만들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아론은 굴복하여 그가 금을 갖고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론 스스로 애굽의 황금 황소 신을 만들어야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그는 모세 대신에 책임지고 백성들을 통치해야 할 지도자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잘못을 백성 탓으로만 돌립니다.

 

나아가 그 금붙이들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합니다. 마치 도둑이 길 가다 줄이 있어 들고 왔는데 나중에 보니 그 끝에 황소가 달려 있더라고 변명하는 꼴이지 않습니까? 아론의 지휘 감독 아래에 백성들이 모은 금붙이들을 녹여서 황소로 조각한 것입니다. 엄청난 양의 금이 소요되어야 하므로 수많은 백성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영적 상태에서 율법을 받았는데 그 후에 온전히 지켜지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조금만 힘들면 하나님께 대적했고 구약 내내 이방 족속의 우상도 함께 섬겼습니다. 결국은 자기들이 의지하던 그 이방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포로 귀환 후에도 말라기 선지자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한탄했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바꾸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지도자들부터 썩고 또 썩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유대인들의 의가 이방인보다 전혀 나을 것 없으며 도리어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롬2:23)고 한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사회는 세상에서 최고로 의로웠습니다. 그럼 그들이 정한 규율도 당연히 인간사회에선 반론이 있을 수 없는 최고의 선이었습니다. 당시 어떤 유대인도 바리새인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과 세리들과 예사로 교제했습니다. 인간사회 최고의 선도 당신의 관점에선 완전히 틀렸다고 선포한 셈입니다. 그러니까 맨 뒤에 숨어있어야 할 세리와 죄인들이 성큼 앞자리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시쳇말로 예수님 ‘빽’ 믿고 당당해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세리와 죄인이 악인으로 취급 받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만 통하지 하나님의 나라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긍휼이 많고 나아가 모든 인간을 당신이 지으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한 명의 예외 없이 자기중심으로 자기가 최고로 선하다고 착각하므로 하나님도 자기 기분에 차지 않으면 거역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당신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일 뿐입니다.

 

본문의 상황을 알기 쉽게 비유해보겠습니다. 매일 장소만 다른 진흙탕에서 형제 둘이 뒹굴며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 말 조금 잘 듣고 공부 조금 잘하는 형제가 자기 옷은 양털처럼 희다고 하고 공부 못한 형제 옷은 너무 더럽고 추해서 밥도 같이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와서 더러운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같이 밥 먹자라고 권해도 공부 잘하는 형제는 죽으면 죽었지 그러지 않겠다고 하는 꼴입니다. 고집이 센 것이 아니라 너무나 어리석다 못해 불쌍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려고 이 세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부 잘하는 형제인 유대인들더러 공부 못하는 형제인 세리와 죄인들과 똑같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지 않느냐 내가 새 옷으로 갈아입혀 줄 테니 제발 너희도 그들처럼 내 앞으로 나오라고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 외에 아무 소망이 없다.

 

작금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지금껏 살아보지 못한 세상을 지나고 있습니다. 마스크 쓰기와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두 예방조치라도 엄격히 지키면 사정은 급속하게 나아질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마저도 귀찮고 싫어서 지금 같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번 주에 너무나 엄청난 일을 TV 뉴스로 보고 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스크를 쓰라는 정부의 명령은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이기에 지키지 않겠다는 미국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이런 점을 계몽시키고 행동으로 자기들의 의사를 표시하겠다는 단체마저 생겼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무리를 지어서 쇼핑몰과 슈퍼마켓에 돌아다니면서 마스크 쓴 사람들을 큰소리로 비난했습니다. 선량한 고객들은 그들로부터 도망치기 바빴고 만류하는 경비원들과 몸싸움을 벌렸습니다.

 

참으로 개탄할 노릇입니다. 비유컨대 에이즈 보균자가 무작위로 아무하고나 성관계를 가져서 병을 퍼트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단체로 대외적으로 공표하면서 말입니다. 인간이 정말로 갈 때까지 간 것 같습니다. 이젠 상식과 교양도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자유는 반드시 희생과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첫 걸음도 모르거나 무시한 것입니다. 이러다 도대체 어디까지 타락할지 생각하면 절망감만 앞서고 저절로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십시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본성이 변함없이 똑 같았습니다. 며칠 전 미국 국회 의사당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폭도들이 같은 공화당의 부시 전 대통령이 반란(insurrection)이라고 평할 정도로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 동안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랑하던 미국이 도리어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신기하게도, 아니 인간의 본성상 당연한 일이지만, 트럼프는 삼천 오백년 전 아론과 똑같은 핑계를 댔습니다. 자기를 열렬히 지지하는 백성들에게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서 국회로 진군하라고만 했지 폭력을 사용하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누가 들어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지 않습니까?

 

한 정파가 아니라 한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라면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어떤 데모를 해도 되지만 평화적으로 하고 절대로 폭력을 쓰지 말라는 당부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그런 일이 일어나자마자 큰 잘못이라고 야단쳐야 하는데도 여론이 들끓자 서른 몇 시간이나 지나서 마지못해 짧은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언급하고 치웠습니다.

 

데모 군중이나 트럼프가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나쁘며 자유에는 희생과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청개구리처럼 정반대로 행합니다. 인간 본성의 추함 완악함 무지함 어리석음이 얼마나 비참한지 실감할 수 있습니까? 이런 판국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구원의 은혜 외에 과연 인류에게 어떤 해결책과 소망이 있겠습니까?

 

마스크 쓰기와 모임 금지 같은 조치는 자기를 지키는 최선의 방안입니다. 그와 동시에 무증상 감염이 많으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최소한의 배려입니다. 그런 극단주의자들만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나 간단한 일인 마스크만 제대로 썼어도 세계 최강국 미국이 세계 최고의 감염자 사망자를 냈다는 오명은 벗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정도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이타심이 급속히 사라진 탓입니다. 자기만 안 걸리면 된다는 이기주의에,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선 절대로 안 된다는 비뚤어진 개인주의에, 찰나적인 생각과 감정에만 따라 행동하는 쾌락주의가 이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죄송하지만 교회와 신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와중에도 끝까지 교회에 모여서 대면예배를 주장합니다. 물론 철저하게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행하면 됩니다. 문제는 교회 모임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정부명령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위배하는 것이라고 반발합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기독교 내부적으로는 온라인 예배로 모이는 것은 마치 믿음이 없는 양 간주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우상에 바친 고기는 우상이 실존하지 않으니까 신자라도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거나 복음의 진리를 미처 모르는 자가 기독교에 대해서 오해할 소지가 있다면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지금 가뜩이나 교회에 대한 반감이 많은 세상은 왜 자꾸 모여서 코로나 전파에 앞장서느냐 비난합니다. 대면 예배가 불안해 온라인 예배를 선호하는 신자에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안 걸리게 지켜주신다는 식으로 몰아갑니다. 바울이 주님의 사랑으로 연약한 신자들을 품어주고 진리를 모르는 불신자들까지 배려한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 아닙니까?

 

정부로선 대면 예배만 그것도 일시적으로 금해달라는 것이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와 신자들도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기독교적인 규정과 관습에 완전히 묶여있습니다. 전도해야 할 대상인 교회 밖 사람은 물론 주안에 있는 같은 형제까지 비난하기 바쁩니다. 신자는 반드시 예수님을 아니 바울만이라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진홍 같았던 자기 죄부터 양처럼 희게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상반된 모습을 비유로 말씀했습니다.(눅18:9-14) 바리새인은 실제로 자기 말대로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는 대신 금식하고 십일조 바치면서 율법대로 의롭게 살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마저 세리와 따로 서서 기도하면서 세리와 비교해 자기는 의롭고 세리는 악하다고 했기에 정작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고 처절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적국 로마를 위해 봉사했고 알게 모르게 부정으로 치부했을 것입니다. 항상 그것이 마음에 큰 짐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기들을 상종조차 않는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을 평생 받지 못하는 저주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싫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내면이 한 순간이라도 평안한 적이 없이 죄책감 자책감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마저 이 죄인을 외면하시면 저는 정말로 소망이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울부짖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출발은 이 세리처럼 자신의 인간적인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윤리적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과 종교로는 절대로 선해지지 않더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도덕교과서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초라한 자신의 영적 실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새해 출발

 

십자가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교회가 종교적으로 거창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각자가 당장 저부터라도 자기만 높이려 들고 남을 깔보려는, 그래서 내가 정한 기준에 맞지 않으면 원수가 되는 내 속의 본성이 너무나 추악하더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로운 일마저도 엄격히 따져보니 내 유익, 감정, 자존심, 욕심 등을 채우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내 진짜 실체를 하나님은 물론 남들 앞에 들키기 싫어서 도덕적 종교적으로는 의로운 척했던 적이 많았다고 솔직히 겸허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의롭게 행했으나 그 숨겨진 본성 때문에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그 마음에 상처를 수도 없이 주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배우자나 자식들에게 그랬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들이 바로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하늘을 향해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저들보다 자기는 의롭다고 하나님께 기도가 아니라 일일이 자랑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상종도 않음으로써 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음에도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지금도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말씀을 맡아 가르치는 목회자 중직들이 기독교 교리로 서로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할 교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람을 차별해선 절대 안 됩니다.

 

신년 초에 잘 믿으면 올해도 풍성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제가 감히 단언하는데 사실은 지금 우리 모두 참된 복을 받을 수 있는 진리를 말씀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해지고 그 가난해진 심령을 애통해 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는 자가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랬습니다.

 

올 한해에 우리가 끝까지 기억하고 붙들 것은 복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사랑 안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그분의 심정을 헤아려서 우리 마음에 채우십시오. 그럼 성령님이 우리로 범사에서 주님을 따라가게 인도해주셔서 반드시 넉넉히 승리하는 올해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1/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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