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2:31-34) 사탄에게 제자들을 넘겨준 예수님
성탄절기 설교 (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22:31-34)
두 번이나 애타게 부르는 이름
본문은 마지막 만찬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탄이 너희를 요구했으나 당신께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기도했다고 해놓고 곧이어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언뜻 주님이 기도까지 했는데도 사탄에게 진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가 죽기까지 스승과 함께 하겠다고 큰소리치니까 너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깨우쳐 주신 말씀이긴 하지만 주님이 기도한 것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베드로가 배반할 줄 모르고 기도에서 빠트린 것입니까? 그러나 이 두 질문은 하나님 독생자인 예수님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보다 사탄이 주님에게 요구한 것과 주님이 기도한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베드로를 유대 식 이름인 시몬아라고 두 번 불렀습니다. 히브리어에는 비교급 혹은 최상급의 표현법이 따로 없고 같은 단어를 두 번 이상 반복하면 그 뜻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주님이 두 번이나 부른 것은 그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아주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여준 이름인데 시몬이 그 이름을 얻게 된 계기를 마태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시는 길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가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라고 고백했습니다.(마16:15-16) 그 신앙고백을 들은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7절)고 약속해주었습니다.
우선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유대인에게는 흔한 별명입니다. 시몬이 본명인데 갈대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게바는 바위라는 뜻으로 그 헬라어가 페트로이고 영어로는 Peter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 시몬에서 정반대로 어떤 외부 상황에도 전혀 꿈쩍하지 않는 바위라는 뜻의 게바로 바꿔주었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이 때 역사적인 신앙고백을 했지만 그 믿음이 반석처럼 굳건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주님이 그를 제자로 택하면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 지금도 당신이 붙여준 이름 대신에 제자가 되기 전 옛날 이름으로 불렀지 않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던 마지막 날까지도 그는 게바가 아니라 사실상 시몬이었으나 주님은 언젠가는 그렇게 불리게 될 것이므로 미리 이름을 바꿔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했는데 일종의 언어유희로 그가 고백한 믿음의 내용을 그의 이름인 반석에 비유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진심으로 동일한 고백을 하는 자들을 모아 음부가 이기지 못하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밀 까부르듯 시험하는 사탄
주님은 시몬아 시몬아라고 두 번 부르신 후에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고 덧붙였습니다. 밀을 추수할 때 바람을 불어서 쭉정이를 골라내는 일에 비유했습니다. 속이 텅 빈 쭉정이가 가벼워서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다 땅에 떨어지는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라는 복수로 지칭했으니 사탄이 제자들 모두를 시험에 빠지게끔 흔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 네가 가장 많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이전의 갈대로 돌아갔다는 뜻으로 두 번이나 시몬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제자들을 요구했다는 헬라 원어는 받을 수 있도록 확실하게 허락 내지 보장해달라는 요청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베드로를 완전히 넘겨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요구대로 넘겨주지 않았다면 구태여 기도했을 리 없습니다. 그럼 주님이 정말로 당신의 제자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었는지 또 만약 그랬다면 왜 넘겨준 것인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과 베드로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부터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성을 지니고 이 땅에 오셨기에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하에 범사에 성부 하나님께 기도해왔습니다. 주님은 그런 기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끼리 서로 상의 협력하여 당신의 공사역을 실현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완벽한 주권과 섭리 하에 이미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으로선 사탄의 시험 자체를 막아달라는 기도는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그것까지 미리 막아주려면 사탄을 없애든지 제자들의 믿음을 순간적으로 어떤 일을 당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게끔 말하자면 신적인 경지에 이르도록 바꿔야 합니다. 둘 다 제자들에게 바람직한 일이 아니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대신에 제자들로 세상과 사람과 사탄의 시험을 받더라도 서서히 믿음이 자라가면서 이겨내길 바라십니다.
요컨대 당신의 백성들의 영적유익과 성장을 위해 사탄의 시험을 사전에 막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도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지 시험을 막아주는 기도는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간혹 세상의 고난을 왜 미리 막아주지 않는지 하나님을 의심하는 신자들이 있는데 자기를 신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이거나 스스로 자라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지내고 싶다는 심보인 셈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에게 최고 극심한 고통을 주자는 사탄의 요청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 이해할 수 없는 큰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오래 갈등했지만 결국은 전지전능하시어 무슨 경영이든 이루지 못할 분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려 했던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절감하고 회개하여 믿음이 성숙해졌습니다. 베드로도 세 번 부인하자마자 정확히 닭이 울자 자신이 큰소리쳤던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져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면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사탄의 시험을 미리 막아주지는 않지만 말 그대로 시험(temptation)까지만 할 수 있도록 그 범위를 제한해놓았습니다. 사탄이 그 범위를 넘어서 신자의 내면을 완전히 점거(indwell)해서 제 멋대로 조종하게는 절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사탄과 특정한 일을 두고 함께 모의 도모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거룩한 권세로 사탄의 모든 행위를 통치하시므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결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지금 베드로에게 스승을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소망과 의지는 분명히 있었으나 여전히 그 내면의 영혼은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했습니다. 예수님이 택하여 제자로 삼아서 장차 게바가 되도록 훈련받고 있는 중입니다. 구원 받기로 작정은 되어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이 오시기 전이라 거듭나지 못해서 예수십자가 대속구원의 진리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신자의 바뀐 신분
주목할 사항은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에 넘어간 자는 너희라고 제자 전체를 가리키는 복수로 말씀하셨으나 기도는 내가 너를 위해서라고 일인칭 즉, 베드로에 한정했습니다. 그가 가장 크게 시험에 넘어갔을 뿐 아니라 수제자인 그를 통해서 제자들 전체에게 가르칠 내용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살펴봅시다.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 짧은 문장 안에 세상에서 부름 받은 신자의 신분, 권세, 소명이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관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준행해야 할 내용은 마지막의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하나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주님이 행하시는 일들뿐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저렇게 다 해주었으니 너는 그 일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너는 돌이킨 후에”라고 했으니 돌이키는 일은 당연히 베드로가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돌이킨 후에 형제를 세우는 일까지 말씀하셨으므로 반드시 돌이키게 된다고 미리 못 박은 셈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되도록 인도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를 먼저 용서해주었기에 그는 평강과 기쁨 가운데 지난 잘못에서 돌이킬 수 있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부터 주님은 그것을 알게 해준 이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깨우쳐주었습니다.
예수님 오신 계절에 신자가 올해를 되돌아보는 기준도 바로 이 말씀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식을 했든 못했던 베드로에게 행하신 그대로 우리에게도 똑같이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시험을 받게 허락했지만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주셨고 그 결과 돌이켜서 형제를 굳게 세우는 일을 하도록 모든 여건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회상할 내용도 이웃과 성도를 굳게 세우는 일에 올해 얼마나 충성했는지 하나뿐이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현실적 문제와 고난에 치여서 형제를 돌아볼 여유가 거의 없었습니까? 올해는 펜데믹 때문에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고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금 얼마나 구제와 봉사를 많이 했느냐 나아가 전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를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온전히 돌이켜서 돌이킨 자답게 세상 앞에 서있었는지 만이라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했으니 돌이킨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왜 새삼 문제 삼는지 의아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 주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뜻대로 정확하게 돌이킨 자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온전히 돌이키는 것인가요?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아주 간단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위해서 옥에도 죽는데도 갈 준비가 되어있다고 큰소리치는 데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나중에 자기가 말한 대로 실천했고 우리도 당연히 그래야 하고 주님도 그렇게 하길 바랍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베드로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친 것이며 또 그 때문에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전부터 바로 그런 자신감 때문에 제자들과 베드로가 사탄의 시험에 넘어진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의 공사역 중에 마지막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서 만찬을 마친 후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고 가르쳤고 인자는 작정된 대로 간다고(22절) 즉, 오늘 저녁이 바로 그 날이라고 다시 확인해주었습니다.
그럼 제자들로선 안타까워하면서 주님을 만류하고 최소한 스승을 위해서 함께 기도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로 제자들끼리 누가 큰지 다투고 있었습니다.(24절) 누가 봐도 너무나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장단에 맞춰 춤추고 있습니다. 누가 큰 자인지 다툰다는 것부터 모두 자기야말로 큰 자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자신만만한 것입니다.
큰 자가 어떤 자인지 주님은 이미 여러 번 가르쳤습니다. 지금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이 자리다툼을 하는데도 주님은 끝까지 참으시고 마지막으로 새 시대의 지도자가 어떠해야 할지 다시 가르쳐주셨습니다. 세상 왕국의 집권자들은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나 당신의 나라에선 거꾸로 서서 섬기는 자가 크다고 하시면서 당신부터 그런 섬기는 자로 제자들 사이에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25-27절)
제자들이 그런 한심한 논쟁을 한 까닭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예고를 전혀 믿지 못한 탓입니다. 최고로 잘 봐주어야 믿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십자가에 죽는다 해도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고 했으니 십자가 처형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신에 이번에는 스승에게서 뭔가 비장한 각오가 보이니까 정말로 새 시대를 열어주시는가 보다 크게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 왕국에서 자신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겠다는 욕심을 드러냈고, 잘 봐주어야 자가기 더 큰 일을 맡아야 한다고 충성 경쟁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스라엘에 다윗 왕국의 영광이 실제로 회복될 것이며 그럼 수제자인 자기가 예수님 다음의 국무총리는 차지해야 한다고 가장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래서 내가 게바로 부르고 싶어도 지금은 이전의 시몬으로 완전히 돌아갔다고 안타까워하며 두 번을 부른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탄의 시험에 완전히 넘어간 것입니다. 거기다 아직까지는 사탄이 영적으로 배후에서 시험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마저도 자신의 훈련과 유익을 위해서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지정의적인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주님은 당신께서 세울 나라는 누가 높고 낮은가 없으며 백성은 앉아서 먹고 지도자들이 서서 섬기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높이며 떵떵거리는 것이 인생의 첫째 목적이었던 자들이 자기는 아무리 낮아져도 좋으니 형제를 굳게 하는 일에 주님처럼 목숨을 걸게 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신자가 받을 영광
나아가 주님은 그런 한심한 제자들에게 너무나 엄청난 약속까지 해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에게 이 땅의 통치를 맡겼듯이 당신께서 이제 십자가에 죽기 때문에 너희더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도 밝혔습니다.(28-30절)
낮아지는 자가 높아진다는 가르침은 지금까지와 같습니다. 이 마지막 날 밤에는 주님과 함께 모든 시험에 같이 했기에 당신의 상에서 먹고 마실 것이라는 약속을 덧붙였습니다. 백성들로부터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다는 뜻이지만 이 땅이 아니라 보좌 즉 천국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당신의 십자가 죽음 이후로 너희도 십자가를 지는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므로 천국 보좌의 당신의 상에서 먹으며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영광을 얻게 된다고 보장한 것입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주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순교를 당하는 일을 위해서 기도했던 셈입니다. 제자들이 당할 그 큰 고난을 생각하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땀이 핏방울로 변할 때까지 기도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더러도 함께 깨어서 당신의 십자가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세 번이나 당부했는데도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마지막에 떠날 때까지 죄로 찌들어 하나님의 긍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세상에선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현장에선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데 까지만 기도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이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주었는지 기록한대로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5-17)
제자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사탄의 시험을 받겠지만 악에 빠지지 않게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은 세상 안에 살아도 영원한 본향이 하늘이므로 세상에 속하지 않게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돌이켜 주셨다는 의미도 이 땅에서 세상 시민인 시몬으로 살아가는 데서 천국 시민인 게바로 살아가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죽어서 천국 보좌의 예배에 참석할 것입니다. 때가 차면 육신도 신령하게 부활하여서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이 땅을 다스리게 되는 엄청난 영광이 기다립니다. 그런 영광을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통해 직접 베드로에게 보여주기까지 했습니다.
그 때까지 이 땅에서 사탄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자들을 주님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바꾸어 세상 안에 모든 이로 보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하실 것입니다. 현실을 도피하는 종교적 왕국을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충만하고 의미와 가치 있게 사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뿐입니다. 모든 선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만나주시고 그들에게만 당신의 온전한 선을 나눠주십니다. 신자가 그 받은 선이 너무 귀하다고 절감하면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이며 그럼 하나님도. 신자가 행하는 일을 통해서 세상 앞에 예수님의 참 생명의 빛을 비춰내실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신앙이 정확히 말해서 신자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가난해졌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신앙인이 아니라 교회에서 기독교의 의식과 활동에만 열심을 내는 종교인이 대부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의 정확한 의미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세상으로부터 불려 나왔다는 인식조차 없습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내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철두철미한 죄인이었다는 깨달음조차 없습니다. 한마디로 당신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나에게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무한한 긍휼을 베풀어주셨다는 체험적인 간증이 거의 없습니다.
단순히 여러 종교 중에서 그 가르치는 내용이 기독교가 제일 낫다고 자신의 지정의적 판단에 따라 스스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 객관적인 교리로는 알고 있으나 실제로 십자가 앞에서 거듭난 체험이 없습니다. 내가 그분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지 하나님 그분이 나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으며 내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혹시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더라도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준다는 사실은 아예 모릅니다. 그저 자신이 열심히 기도해서 사람들 사이에 자기를 높이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분에 의해서 그분께로 내가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내 치성과 열심으로 그분을 내게로 돌이키려고만 애를 씁니다.
신자가 받은 소명
대부분의 신자들이 스승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의 입장에는 아무 부담감 없이 자기와 동일화시킵니다. 그렇지 나는 여전히 그보다 더 치사하고 믿음이 약한 자라고 종종 회개하면서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받은 후에 완전히 변화되어서 형제를 굳게 하는 베드로의 모습에는 자기를 대입시키지 않습니다. 이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신자가 스승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자리에만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주님이 맡기실 일을 알고도 일부러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고 있는 셈입니다. 아니면 아예 택함 받지 못해 교회에서 형제를 굳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형제들 앞에 굳게 하려고 예수님을 종교적 방안으로만 이용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신을 세 번 부인해도 미워하는 내색 하나 없이 그윽이 바라보는 주님의 긍휼의 눈길과 마주치자 밖으로 뛰쳐나가 자기 존재 전부를 걸고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자 장정이 통곡할 일은 부모나 나라를 잃었을 때 즉, 자기 실존의 뿌리가 완전히 잘려나갔을 때 정도입니다. 제자들 중에 최고라고 뽐내었던 자기 존재가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고 연약하고 무능한지 나아가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이 죄 뿐임을 철두철미 깨달은 것입니다. 인간적인 도덕과 종교가 그 썩어빠진 존재 앞에 전혀 힘을 쓰지 못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그 사랑 없이는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진리를 절감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똑같이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으로 당신을 세 번 배반했던 죄를 완전히 씻어주시고 내 양을 먹이라는 직분까지 주었습니다. 비로소 베드로는 주님의 십자가 긍휼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고는 백성들은 앉아서 먹게 하고 자기는 서서 그들을 섬기겠다고 헌신했고 실제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그의 이름도 시몬에서 게바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신자더러 형제를 굳게 하라는 소명에 대해서 오해하시면 안 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서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차피 사탄에게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구원 받을 자는 점점 줄어들고 이 땅은 결국 타락의 절정으로 치달아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주님이 재림하여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가 악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여 보존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은 이미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으나 멸망을 막아주는 힘이 있습니다.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2:6-8)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주님이 다시 와서 사탄을 멸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성도들을 지켜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들더러도 그 때까지 주님이 따로 남겨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여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초대하고 굳게 세워서 그날까지 보존하게 하는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단순히 택한 자를 구원해서 천국으로 입장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땅에서 가르치고 사역했던 그 모습대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제자들로 당신과 기거하면서 당신의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에서 열까지 그대로 보고 배워서 따라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는 주님 부활 전의 베드로의 모습에 대입하지 말고 오순절에 성령 받아 수많은 청중들에게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했던 베드로에게 자신을 대입하며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 그런 준비를 하며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인 신자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진리와 또 그에 따라 신자로 부름 받았다는 그 정체성만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성탄절에 괜스레 부담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가장 기쁜 소식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자로 부름 받은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모릅니다. 천국에 계신 예수님이 나를 알고 계실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을 다 주관하십니다. 비록 수시로 게으르고 넘어지고 사탄의 시험에 져도 끝까지 인내해주면서 우리로 기어이 되돌이키게 해주십니다. 형제를 굳게 하는 일에 매진할 때까지 성령님이 쉬지 않고 보호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결국에는 사도들처럼 천국보좌에 앉게 하실 것이며 주님 재림 시에 신령한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함께 다시 와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만큼 더 기쁘고 권세 있으며 인간을 향한 최고의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올해 성탄절만은 이 영광스런 우리의 신분과 권능을 다시 가슴에 새기며 새해를 힘차게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성탄절에 갈대로 살았다고 후회했을지라도 내년 성탄절에는 반석으로 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이 충만해져야 할 것입니다.
(12/19/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