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서야 이곳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쟁이 있었다는 걸 알고 한은경님과 정순태님의 글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두 분의 글을 통해 이번에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두 분의 글들이 제 수준을 앞서 있으므로 제가 논평할 수 있는 입장은 못되나, 그냥 읽고 지나치기엔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 감히 몇 마디 언급할까 합니다.
우선, 정순태님의 "거짓말은 죄악인가?"라는 묵상나눔이 참으로 훌륭한 묵상이며 더 토론할 여지가 있는 묵상임에도 한은경님께서 그 글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논제를 잡아 논하시고 또 그에 대한 반론이 전개됨에 따라 그 묵상이 묻혀버린 듯해 아쉽습니다. 예리하신 한은경님께서 묵상 주제에 대해선 아무 말씀 없으신 걸로 미루어 그 주제에 대해서는 정순태님과 의견을 함께 하시나 보다 생각되는데, 그 주제를 더 발전시켜 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동정에 관하여는 저로선 정순태님과 의견을 함께 합니다. 한은경님께선 전승을 말씀하셨는데, 교회 성립 이후 약 3백여 년동안 숱한 말과 글들이 난무하였고 그래서 당시 카톨릭 교회가 정경과 외경과 위경을 가리게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외경까지는 어느 정도 권위를 인정할 수있다 하더라도, 교회에서 일찍부터 배척당했던 위경들의 기록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아내가 있었다면, 성경은, 특히 누가는 그 사실을 밝혔을 겁니다. 한 남자에게 아내가 여럿이요 자식 또한 여럿인 경우 성경은 대개 그 자식이 어느 아내의 소생인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동정설을 강화시키기 위해 예수의 형제들을 전처 소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낳습니다. 우선 성경에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전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있었다면 그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있었다면 몇이나 있었으며 이름은 무엇들인지, 전처와는 이혼인지 사별인지, 이혼 사유는 무엇이며 사별이라면 무엇때문에 죽었는지, 예수와 전처 소생들간의 갈등은 없었는지 등등 의문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다빈치 코드와 같은 소설 여러 종류가 쓰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카톨릭에서 상정하고 있는 성가족의 이미지와 맞지 않습니다.
또 하나, 설령 요셉에게 전처가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전처에게 마리아의 역할을 맡기셨을 것이므로 마찬가지 얘기가 됩니다. 전처의 이름이 요한나라 합시다.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아니라 요한나였겠지요. 마리아만 염두에 두지 말고 요셉 또한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부친으로 요셉을 찜하셨습니다. 아마도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마1:19-25)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의 첫 결혼 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마리아와의 재혼에 임해서야 성육신을 결행하신 까닭이 있을까요? 추측과 억측과 논쟁만을 낳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 몸을 빌어 오셔야 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겠다 오래 전에 약속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다윗의 후손 중 의로운 (의롭다 함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사람 요셉을 역시 의로운 (누1:38) 처녀 마리아와 정혼케 했습니다. 성령으로 마리아는 잉태를 합니다. 요셉은 잉태가 기정사실임에도 아들을 낳기까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낳고 나서는, 마리아가 더 이상 동정녀로 있을 필요성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지 마리아가 동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논쟁으로만 미루어 보더라도, 마리아는 요셉과 평범한 정상적인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셨다는 기록이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 그곳에는 예수의 형제들과 다른 제자들은 없었고, 십자가 상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예수께서 혼자 된 모친의 앞날을 걱정하여 하신 말씀이라기보다 기존의 혈과 육에 따른 가족과 공동체 개념을 오직 믿음에 의한 개념으로 재정의하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막3:31-35 참조)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동안 철저하게 그의 사명만을 염두에 두셨지 사적인 정에 연연한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곧 이어질 부활로 인해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가 탄생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 두 사람에게 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말을 전해 듣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일 겁니다.
결론적으로, 마리아가 처녀로 지냈다는 주장은 설득력도 약하고 기독교에 득보다 실을 더 안겨 주는 주장이라 생각됩니다. 저로서는 마리아가 처녀로 지냈다 하여 더 신비하고 거룩하게 여겨지지도 않고, 예수 출생 이후 평범하게 다른 자식들 낳고 살았다 하여 천하거나 중요성이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리아와 요셉이 의로운 사람들인만큼 예수 출생 이후 하나님께서 부부들에게 명하신대로 서로에게 부부로서의 의무를 다 하며 아들 딸 낳고 정상적으로 살았다고 믿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녀복은 큰 복 중의 하나인데 당신에게 몸을 빌어 준 가정에 하나님께서 후히 자녀복을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평범한 사람들을 택하여 그토록 비범한 사명을 맡기셨다 생각하면 가슴이 더 뭉클해지고 감사함이 더 커집니다.
박목사님이 카돌릭의 거짓 증거를 놔두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