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의 필요성[본문 = 출3:14]
▣ 들어가기
⊙ 세상 삶을 살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평신도들에게 있어서 ‘신학 또는 교리’라는 용어는 무척 어려운 말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신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먼저 머리부터 아프기 시작할 것입니다. 워낙 어렵고 또 너무 다양한 이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해 볼 수도 없고, 혼자 힘으로 독학하기도 여의치 않습니다. 일단, 신학은 ‘어려운 학문이다’라고 정리해도 그리 잘못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신학자/목회자들의 현학적 신학이론을 접할 때면, 평신도가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고 다만 ‘그런가보다’라는 수동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 대다수 평신도들이 평소 양육받은 신앙환경의 부정적 영향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현상은 불가피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깊숙이 숨겨져 있는 성경의 참 진리에 비추어 본다면 이는 잘못된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평소의 우리 생각과는 달리, 우리가 올바른 신앙을 가지는 데 있어서 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울러 잘못된 신학이라면 오히려 우리 신앙을 크게 손상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지적/학문적으로 우수한 일부 신학자/목회자들의 견해라 해서 전부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평신도는 ‘신학’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어렵고도 미묘한 주제를 논하려면 공식적인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다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은 됩니다. 그러나 정규 신학을 전공한 사람은 어차피 자기가 선호하는 어느 한 신학이론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신학이론이든 잘못된 신학이론이든, 일종의 편향을 방지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어느 한 학파(또는 교단)의 주장에 동조하는 차원 이상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 따라서 신학에 대한 모든 것을 신학자/목회자에게만 맡겨두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비록 지적/학문적 소양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정규 신학을 전혀 공부하지 않은 평신도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신학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이 꼭 나쁘다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평신도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작업일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 그간 생각해 왔던 평신도의 ‘신학관’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 신학(神學)이란?
⊙ 신학이란, 헬라어로는 ‘데올로지아’(Deologia)라고 하며 영어로는 ‘데올로지’(Theology)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Deo=Theo)이라는 말과 ‘논리 또는 학문’(logia=logy)이라는 말이 합성된 용어입니다. 즉, ‘유일신이신 하나님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 곧 신학인 것입니다. 무척 다양하고 난해한 것입니다.
⊙ 짧은 묵상에서, 조직신학/성서신학/구약학/신약학/목회학/바울신학/바르트신학 등등, 나열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방대하고 어려운 신학이론을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한 분야만 연구한다하더라도 평생을 받쳐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평신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신학이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조금 더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면 간략하게 설명해 놓은 입문서 내지 연구서 등을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이런 것들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 아울러 ‘신학’이라는 용어는 ‘교리’라는 용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닙니다. 기독교에는 핵심적인 교리들이 많습니다. 신론 또는 삼위일체론(기독론/성령론), 교회론, 죄론(구속론), 성육신 등등 무척 많습니다. 이러한 교리 또한 오늘 다루기는 그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이것도 전문적으로 연구한 교리서적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 신학과 교리의 차이점은, 신학은 개인이 이해한 하나님을 체계적/학문적으로 정리한 것을 말하며(개인차원), 교리란 여러 가지 신학 중 다수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공증된 원리입니다(공적차원). 따라서 신학보다는 교리가 객관성이 좀더 높다하겠습니다.
⊙ 어찌되었든, 한글사전에는 신학을 ‘기독교의 원리를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원리’라는 말은 기독교 신학 입장에서는 ‘교리’라는 말로 이해해도 괜찮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신학은 기독교 교리를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 신학은 제한적이다.
⊙ 앞서 말한 것처럼, 신학은 일단 기독교, 정확히는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에 관한 정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요 섭리주며 심판주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의 이해 범위 밖의 초월적 존재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당신께서 알려 주실 때에만(계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해 주신 것을 우리는 ‘성경’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신학은 성경을 기초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을 기초로 하여 인간이 이해한 것을 신학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으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 보여주시며 인간구원의 길을 열어 알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성경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계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66권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 데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으나,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는 부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만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계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실제는 성경에 계시된 범위 이상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주신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구원에 필요한 제한적인 수준이라는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신학 및 교리의 분류에서 보듯이, 신학을 하려면 하나님 당신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내용만으로는 제한될 수밖에 없어집니다.
⊙ 나아가,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말씀의 동기나 원인 또는 이유 등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고 단순히 선포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게 됩니다. 이 또한 신학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됩니다. 이런 경우 불가피하게 인간의 지성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어지는데, 인간 지성은 제한적입니다. 근본적으로 제한적인 성경을 기초로 하여, 이중적으로 제한적인 인간지성 활동에 의한 신학이, 결과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유능한 신학자/목회자의 신학이라 하더라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명약관화한 일인 것입니다.
⊙ 뿐만 아니라,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기록되었다기보다 믿는 자들만 이해할 수 있도록 한정적으로 기록된 면도 있으므로(비유/은유/상징 등), 집단별(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이해의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또 개인의 지적능력과 소양에 따라 성경 해석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성경 해석에 있어 역사적/문화적/언어적 소양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신학자/목회자 각 개인마다의 무수히 다른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 그렇다면 앞서 말한 신학(기독교 교리를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용어의 개념에는, 일종의 제약 내지 한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 제한점은 이것입니다. 즉, 『어느 한 인간(신학자/목회자)이나 집단(교파/교회)이 연구한 신학만으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분을 계시한 성경을 완전하게 포괄할 수는 없다. 진리성을 독식할 수 없고 지엽성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다양한 신학이론의 존재는 불가피하며 그 중 유일한 진리의 신학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각 신학이론은 부분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 신학이론은 다양하다(OT).
⊙ 저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양파이론(OT : Onion Theory)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용어는 어느 한 신학자/목회자 또는 한 교파/교단/교회의 신학이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뜻 전부를 감당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양파는 무수한 껍질들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껍질 하나가 양파 전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껍질 하나 하나가 모이면 하나의 양파가 됩니다. 껍질 하나로는 양파 전체를 규정지을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하나의 껍질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모여야만 전체의 양파가 규정됩니다.
⊙ 성경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학이란 근본적으로 제한된 성경을 기초로 이중적으로 제한적인 인간지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의 해석만으로 성경의 온전한 의미가 전부 망라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일부는 됩니다(양파 껍질 하나와 동일한 가치입니다). 일단 신학자/목회자/교단/교회의 신학은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는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되, 그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따라서 평신도 입장에서 양파이론은,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다양한 해석을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신학이론은 하나님 중심 진리(GCT)로 한정되어야 한다.
⊙ 아무리 양파이론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허용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를 저는 하나님 중심 진리(GCT : God-Centered Truth)라고 합니다.
⊙ 성경해석의 원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문맥/어휘/문법/저자의 의도/배경 등도 고려해야 하고, 비사/상징/표상/비유/풍유 등도 알아야 하며, 시/예언/설화 등의 해석 원칙들도 이해해야 합니다. 아울러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와 교리도 고려해야 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도록(성경에 의해 증거 받도록) 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성경해석에 대한 참고서적은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 강조하는 성경해석의 제1원칙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고(사55:8) 인간은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3:9). 우리가 정통 해석이라고 들었던 해석 중에도 잘못된 것이 많으며 오류라고 생각했던 해석 중에서도 성경적 지지를 받는 해석이 있는 것도 다 이 같은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 무수한 예 중에서 하나만 들어보면, 우리는 가나안 정탐꾼 10명에 대해 항상 부정적인 해석에 익숙해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결론에 이르는 성경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간략히 말해, 인간적 측면에서 10명의 보고가 정확했으며, 오히려 여호수아와 갈렙의 판단이 틀렸다는 점입니다. 갈렙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마치 돈키호테와 같은 막무가내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10명이 옳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시각이지요. 성경에 자세한 설명이 생략되어 그렇지, 갈렙은 이 단계를 뛰어넘어 믿음의 눈을 가지고 가나안을 정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갈렙의 손을 들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좀더 상세히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여하튼 이 예와 같이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항상 인간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 그렇다면 이제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느냐에 대한 정리를 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는 아닙니다. 바른 해석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이 가미된 해석은 배격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만을 수용해야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성경은 거꾸로 해석해야 한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저는 이를 다시 ‘하나님 중심 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별도로 묵상해야 하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부연하지는 않겠습니다.
▣ 마음 정리하기
⊙ 평신도 입장에서 나름대로 신학문제를 다루다보면,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나 상이한 각종 이론에 혼란스러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더욱 나쁜 것은 이들 이론 가운데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를 알 수조차 없어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바울에 대한 평가가 신학자마다 다르고, 바르트 신학에 대한 설명도 긍정적/부정적 견해들이 난무합니다. 요한계시록 해석문제로 가면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평신도로서는 정오의 판단은커녕 오히려 헷갈리기만 할 뿐입니다. 이 점을 부각시킨 어느 인사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면 그나마 조금 있던 신앙마저 잃기 십상이다’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부분적으로 일리 있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 게다가 이단 사설들마저 성경을 인용하며 그럴 듯한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신학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평신도들은 정말로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위에서 이단에 빠지는 안타까운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평신도라 하더라도 ‘신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학은 하나님(성경)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상당한 제한이 전제될 수밖에 없는 학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평신도 입장에서는 ‘신학이란 절대자 하나님과 하나님을 계시하는 성경에 대한 인간 개개인 내지 집단의 지적인 반응(이해) 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불완전성을 고려할 때, 신학은 다양할 수 있으며(다른 의미로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견해만이 유일한 진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임), 평신도 입장에서의 취사선택은 불가피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 바로 이런 때에, 앞서 말씀드린 양파이론(OT) 및 하나님 중심 진리(GCT)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지적/학문적으로 부족한 평신도가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고 난 다음, 그 신학의 정오를 판단하여 취사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양파이론을 적용하여 폭넓은 견해를 받아들이되, 최종적으로는 하나님 중심 진리 기준을 적용하여 세심하게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 작업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실수도 있을 수 있고 제한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실행하다보면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바른 신학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적어도 평신도가 이 정도의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거짓 교사를 만나더라도 짧은 시간 내에 그 정오를 정확히 판단하여, 잘못된 길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가 지키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하겠습니다(물론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영이라 해서 모두 믿지 말고(요일4:1), 성경에 비추어 상고하는 평신도만이(행17:11) 참 믿음의 길을 지키리라 믿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책임도 막중합니다. 참 신앙을 잃지 않고 끝까지 붙잡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