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조금 무거운 주제의 묵상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상당한 논쟁도 가능하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어차피 묵상이므로 개인적 이해일 뿐입니다.
"평신도 입장에서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의 이해만 가지신다면 크게 문제될 것 없다 하겠습니다.
취지의 오해없이 작은 은혜라도 공유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샬롬.
* 보조문자들이 깨지는데 방법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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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사신공식 : 使臣公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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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목회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아주 긴 묵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지는 목회자들 스스로의 주장과는 달리 목회자에게 신적이고 절대적인 권위가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평신도가 목회자에게 절대순종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 오히려 상대순종 하는 것이 옳으며 나아가 목회자도 평신도에게 순종해야 할 경우도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사실 평신도는 목회자의 입술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 전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싶어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성경적이고 바람직할 것 같은 이러한 현상(왜냐하면 성경은 신앙 지도자들에게 순종할 것을 자주 요구하시기 때문)은, 실제적으로는 큰 문제점을 내포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목회자들이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설교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는 세상 사람들까지 하나님을 빙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에게는 묵상의 제목처럼 참 및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있는 영적 분별력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게 또한 만만치 않게 어렵다는 점에서 난감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은 지난번 묵상과 연계될 수도 있는 목회자의 영적 권위에 대해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묵상은, 김지찬 교수가 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에서 강연한 ‘누가 참 선지자요 누가 거짓 선지자인가?’를 크게 참고하였고, 더 나아가 제 개인적으로 생각한 바를 기술하는 방법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김지찬 교수의 강연 내용(요약)(전체 내용은 첨부 참조)
최근 우리 사회는 위기이며 교회 또한 같다. 교계 지도자들은 교회 위기의 원인이 낮은 복음화율에 있다고 하지만, 위기의 본질은 목회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위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들의 위기의식 결여 이유는 문제를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라 보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영적 지도자들은 ‘거짓 선지자는 누가 보아도 분명한 외적 표지가 있는가? 한번 참 선지자가 되면 변함이 없는 것인가? 한번 소명 받으면 언제나 참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등의 심각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구약 성경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근거는 구약에는 ‘거짓 선지자’란 명칭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지자’라는 히브리어 ‘나비’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모두에게 사용되고 있다(신18:20). 구약에는 거짓 선지자를 지칭하는 명칭이 없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렘23:25)로 표현할 뿐이다. 이 현상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즉, 한 인간은 진실과 거짓 사이를 오갈 수 있다.
특히 거짓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니라”(코 아마르 아도나이)라는 사신공식(使臣公式 : messenger formula)을 사용한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모두 여호와를 동일한 권위로 내세우기에 외관상 참 및 거짓 선지자의 구분은 지난한 문제이다(렘28장의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경우 : 거짓 선지자인 하나냐가 승리한 것처럼 보임).
한 선지자가 참과 거짓을 오고 갈 수도 있다(왕상 13장의 경우 : 참 선지자가 무의식적으로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가 참된 예언을 하기도 함).
누가 참 선지자요 누가 거짓 선지자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아래와 같이 결론 내릴 수는 있다.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선지자가 될 수 있다. 한번 소명 받았다 해서 언제나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구별은 처음부터 정해지는 것도 아니며 한번 정해지면 평생 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가 신분상 따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결국 선지자들은 참과 거짓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참 선지자는 그가 전한 메시지를 삶 가운데서 순종함으로 메시지의 신빙성을 높여야 한다. 한 선지자의 예언이 참인지 거짓인지 평가할 때에 그의 행동과 삶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마7:15-18).
거짓 선지자를 구분해야 한다. 인간에게 사단의 유혹이 떠난 때는 없었다. 광명한 천사로 말씀의 허울을 쓰고 유혹하는 사단을 조심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실제로 거짓을 행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이 참 말을 하기에 참 선지자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속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거짓 선지자들도 사신공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외견상 구별은 힘들다. 설교자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다. 진리를 말할 뿐 진리 안에 살지 않으면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기에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말씀은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배척을 받고 수난을 당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끝내 승리한다. 말씀의 성취는 선지자의 개인적 윤리성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은 결국 전진하며 승리한다. 위로가 되는 것은 참 선지자가 타락할 수 있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했던 자도 돌아와서 회복될 수 있다. 비록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선지자의 사명이 완전히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말없는 다수의 좋은 목회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성공주의와 물량주의의 유혹을 극복하며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다면, 오늘 우리의 위기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이기에 위기란 위험의 시간인 동시에 기회의 때이기도 한 것이다.
* 이 내용은 지난번 묵상했던 ‘목회자의 권위’와 표현만 다를 뿐, 실제 내용은 매우 비슷합니다. 저의 이해가 결코 허황되거나 완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 될 것입니다.
사신공식의 대표적 사례들
김 교수의 주장대로, 사신공식은 모든 목회자들이 반드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권위의 원천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고는 단 한마디의 설교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목회자들의 주장(설교)만으로는 평신도들이 도대체 누가 참 목회자이냐를 분간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두가 참 목회자라고 소리 높이기 때문입니다(사실은 이 정도가 아니라 자기에게 굴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엄포 놓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거짓 목회자는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 묵상(목회자의 권위)에서 영분별의 임무가 평신도에게 있다고 담대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여하튼 신구약 곳곳에 사신공식의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몇 군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곳은 렘28장 및 왕상13장인데 이는 김 교수가 이미 자세하고 정확하게 설명하였으므로 김 교수의 강의 내용을 참조하는 것으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살펴봐야 할 곳이 몇 곳 더 있으므로 이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하18:23-27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인 그나아냐의 아들 시드기야가 참 선지자인 미가야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 내용은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주 듣기 좋은 것이지요. 그러나 미가야는 패배를 예언합니다. 듣기 싫은 내용입니다. 예언자의 직분과 예언 내용만으로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예 중의 한 곳입니다(18장은 이스라엘 왕 아합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을 정벌하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렘20:1-6에 보면 거짓 선지자인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이 참 선지자 예레미야를 학대합니다. 바스훌은 이스라엘이 결코 바벨론의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언이 거짓임을 밝히십니다(6절).
렘29:21-32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인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와 느헬람 사람 스마야 등 3명의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당신은 이들을 보내지 않으셨으며 이들은 거짓을 말한다고 선포하십니다(23절, 31절). 이 3명은 누구입니까? 공식적인 제사장이요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예언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히려 더 좋은 듯한 내용이었습니다. 잘 보면 예레미야의 예언보다 더 민족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결은 우리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문제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그럴 듯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직분이나 예언의 내용만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증거 하는 한 곳입니다.
렘43:1-7절에도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및 모든 교만한 자들이 나옵니다. 이들도 29장의 거짓 선지자들과 동일합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인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거짓을 예언하는 경우였습니다. 그렇다면 선민인 이스라엘에서만 하나님을 빙자할까요?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 빙자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인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경우가 있기까지 합니다. 대표적인 몇 곳만 살펴보겠습니다.
○ 뭐니뭐니해도 하와를 유혹한 뱀(창3:1-6)과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마4:1-11)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이 부분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설명은 생략합니다.
○ 왕하18장에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군사력으로는 대항할 수 없고 유다의 패배가 기정사실인 듯한 상황입니다. 이때 산헤립의 야전 사령관인 랍사게라는 사람이 아주 담대히 선언합니다(25절).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분명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셨다고 합니다. 눈으로 보는 상황으로는 랍사게의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물론 이는 거짓입니다만 당시로서는 판단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방인이 거짓으로 하나님을 빙자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 대하35:21절에 보면 애굽 왕 느고가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라 하실까 하노라”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에서는 애굽 왕 바로의 말이 진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애굽 왕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믿지 않은 유다 왕 요시야는 므깃도 골짜기에서 전사합니다. 요시야는 유다의 아주 훌륭한 왕 중의 한 명입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요시야가 맞아야 하고 느고가 틀려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입니다. 참과 거짓의 구분이 그만큼 어려울 수 있다는 진리를 나타내고 있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들어 사용하시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만국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당연한 일입니다. 유다 나라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나 유다 민족의 포로생활을 종식시킨 바사의 고레스 왕 등도 이방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사례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 한가지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름)을 빙자하는 경우, 그것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판정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 우선, 유다 백성이냐 이방인이냐 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느고나 느브갓네살이나 고레스는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 다음으로는, 직분만으로도 구분할 수 없습니다. 보신 바와 같이 제사장이나 선지자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중에는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기록한 것도 많습니다. 구약에서도 꼭 제사장이나 선지자여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던 것이 아닙니다.
많이 헷갈리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냥 유다인이며 제사장이나 선지자인 사람이 하는 말이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고, 평민이나 이방인의 말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얼마나 쉽고 편하겠습니까? 왜 이렇게 헷갈리게 하시는지는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이는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해 놓으신 깊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여하튼 이 영적 원리를 오늘날에 적용한다면, 목회자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이냐 라는 질문이 저절로 나올 수 있음도 아시겠지요? 목회자라는 직분(신분)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사자로 확증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의 일단을 김 교수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방법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다’(사신공식)라는 선언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이라 확증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도 나도(심지어 사단과 대적들까지도) 사신공식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선포하는 자의 직분(신분)과 선포된 말씀의 내용만으로는 진위를 알 수 없다는 이 미묘한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만 할까요? 참으로 난감하다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는 없고,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는 봐야겠지요? 여기서 미리 말씀드리면, 하나님 말씀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는 결코 선포하는 자가 아닙니다. 선포하는 자는 모두 사신공식을 쓰기 때문입니다. 진위의 판정자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바로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영적 비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선포하는 자가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기만 하면, 아무 생각없이 ‘아멘’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신앙이라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아닌 것이 아니라 이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사단(이단)에게 100% 속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신공식을 쓰더라도 듣는 자가 정신을 차리고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만 합니다. 구약에서 도움이 될만한 성경구절을 알아보겠습니다.
○ 렘28:9은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평화를 예언하는 자’는 거짓을 선언한 선지자인 ‘하나냐’를 지칭합니다(그는 기준에 맞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평화를 선언하였고 이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언은 거짓이었던 것입니다.
○ 신18:22절은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부하는 말입니다.
○ 두 곳의 말씀이 의미하는 핵심은 ‘증험’ 즉, ‘성취 여부’입니다. 이루어지느냐 안 이루어지느냐가 하나님 말씀이냐의 여부를 결정짓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포한 내용의 성취’ 여부랍니다. 그런데, 이 기준은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기간 내에 성취되면 문제가 없으나 만약 성취되기까지 장기간이 소요된다면 참과 거짓을 확인하는데 적합한 방법은 못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곧 바로 반응하여 순종해야 하는데, 진위를 가리기 위해 수십년을 기다린다거나 아니면 사후에나 증명이 된다면 개개인 성도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아니면 적어도 수일 이내의 단기간 내에 말씀의 진위 여부를 판정해 내어야만 합니다.
○ 구약의 방법(증험)은 적용상 다소의 무리를 내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신약은 어떨까요? 예, 신약에서는 비록 조금 어렵기는 해도 보다 발전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듣는 자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 행17:11절에는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중에는 오늘 묵상의 주제인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영적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이것이 산상수훈의 팔복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자신을 다 비운 자기부인 내지 자아포기의 마음을 말합니다. 이 마음이 없으면 말씀을 바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성경에 비춘 검토’입니다. 선포자(설교자)의 주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보증을 받아야만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보증하지 않는 말은 아무리 사신공식을 적용하여 주장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성경을 인용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만이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것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김 교수의 말대로, 참 선지자가 거짓을 말할 수도 있고 거짓 선지자가 참을 선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포기는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경우까지도 친절하게 대처방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마23:3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오늘날의 목회자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거짓 부류에 속하기는 하지만(외식의 의미입니다), 그들의 말은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선포자의 신분에 관계없이 성경에 부합되는 말씀에 대해서는 순종하라는 것입니다(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 앞에서 말한 ‘증험’의 방법은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다는 단점을 지닙니다. 짧은 생을 사는 성도들에게 제한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이러한 단점을 해소시킬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목회자의 본(本)입니다. 목회자의 설교뿐 아니라 그의 삶을 보고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입니다. 선언(설교)과 삶이 일치되는 목회자라야 참 선지자입니다. 물론 속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이 방법도 쉽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비록 어렵기는 하더라도, 예수님의 지침(마23:3)과 목회자들의 모범과 성도의 의무(행17:11)를 잘 조화시켜, 듣는 자(평신도)가 스스로 판단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평신도들은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가 깊이 묵상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시50:16절입니다.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고 질문하시는 대상은 바로 ‘악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십니다. 그 자세한 내역이 17-21절까지 나옵니다. 입을 열면 항상 ‘거룩’을 외치지만 속 마음은 항상 자기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지적하고 계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사신공식을 쓰더라도 평신도로서는 항상 검증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나가기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일입니다. 알기 쉽게 편하게 믿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신앙을 바라지 않습니다. 단순한 ‘하나님을 향한 열심’만을 바라시지 않으십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면서도 뱀처럼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지도자들인 모든 목회자들이 전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목회자들 중에는 이단도 많고 다원주의자도 많고 자유주의자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통 신앙에 속한 목회자라 하더라도 때로는 엉뚱한 욕심으로 잘못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목회자들은 사신공식을 씁니다(안 쓸 수가 없습니다). 헷갈리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 사신공식은 참으로 위력적인 것이며(왜냐하면 하나님을 빙자하기 때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때로는 거짓 선지자들의 선언이 더 옳아 보일 수 있다는 데에 함정이 있습니다(마치 선악과와 같습니다). 정말 아름다워 보입니다. 참다워 보입니다.
한편 평신도들은 목회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아멘하며 받아들이려 합니다. 참으로 무모한 일이며 가슴 아픈 현상입니다. 거짓에 속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맹목적인 신앙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설교자의 선언이 과연 성경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게다가 평신도들은 ‘목회자의 말에는 절대 순종해야 한다’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고 얼토당토않은 목회자들의 궤변을 마치 변개할 수 없는 우리 신앙의 최고 진리인양 받아들이기까지 합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문제는 예수님의 지침(마23:3)이 정답입니다. 옳은 선언(설교)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목회자의 인간적인 부분에까지 순종하라니요? 도를 넘도록 성경에 덧붙이는 일이며 이 또한 무모한 짓입니다(지난번 묵상 ‘목회자의 권위’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사신공식을 쓴다고 해서 덥석 믿어 버리고, 강한 열정을 나타내는 것만으로는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신앙은 무모한 신앙입니다. 무모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설교자의 선언 내용을 성경에 비추어 보는 것에 있으며, 그 책임은 평신도(개개인)에게 있습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성경에 비추어 맞으면 절대순종하고 틀리면 절대반대하는 슬기가 평신도의 임무입니다. 이를 위해 평신도의 성경공부가 중요한 것입니다. 모쪼록 성경을 잘 공부하시어 포장된 유혹(선악과의 비밀)에 넘어가지 않는 은혜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