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 :17-18)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전부터 갖고 있었던 저 혼자만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반응하는것에 대한 저만의 생각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십자가가 주는 의미와 상징은 너무나 중요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렵지만 사실은 인간의 구원에서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길이며 문이며 열쇠라는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묵상할때마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 믿어 구원얻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큰 기쁨이며 자랑이며 감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끔식 놀라는 것은 신자들가운데 십자가를 보면서 엄청난 슬픔과 연민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해한 것일수는 있겠습니다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이오니 틀릴수도 있습니다만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영화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로 만든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큰 이슈를 몰고왔던 멜깁슨 감독및 주연의 패션오브크라이스트를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직접 관람을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신문지상에서나 혹은 인터넷이나 각종 포털과 블로그 홈피를 통해서 자료들을 또는 동영상을 간접적으로 접한 정도입니다.
맘먹고 볼수도 있었지만 볼수 없었습니다. 솔직하게 보고싶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냥 싫었습니다. 고통과 처절하게 연출한 그 사진들을 보면서 저는 도저히 계속 볼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자료나 영상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큰 아픔을 경험하기도 하며 슬퍼합니다.
물론 슬픕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래서 많은사람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보며 가슴을 치며 울며 회개합니다. 그러다가 자기연민에 빠져서 마냥 슬퍼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싫어했는가하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몰고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슬퍼하는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눅23:26-31)
인간적인 연민이나 감상주의에 빠지게 되면 십자가의 의미를 혹은 복음의 본질을 구원의 본질을 오해할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에서도 이렇게 인간적이고 인본주의적으로 다가가게 되면 오류와 실수를 하기가 쉽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감정이 필요없다는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십자가 아래 서 있었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내려다 보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 요한을 가리키면서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셨고 마리아역시 무슨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유추해석을 할수는 있습니다만 인간적인 반응이 나올법할때 묘하게도 성경은 그냥 침묵하거나 지나가버립니다. 왜그랬을까요? 성경의 기록 목적은 우리의 구원과 유익함과 풍성함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골탕먹이거나 시험에 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적인 모든 사상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수단이나 사상이나 방법은 실패라는것을 적나라하게 증언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거울로 삼아준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고통하시는 예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또한 십자가를 주제로한 복음성가들도 많습니다만 십자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은혜이며 복입니다. 그러므로 슬퍼할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주께서 십자가에서 내려 오시려고 했다면 그것을 오히려 슬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섬짓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꼭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는 없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주께서는 십자가를 지셔도 되고 안 지셔도 상관 없습니다. 주께서는 그럴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우리는 잘도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면서 왜 주께서는 꼭 순종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는걸까요? 제가 지금 억지를 부리는 중입니다. 괘변일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하나님의 뜻입니다. 계획입니다. 사단은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상의 영의 원리와 세계를 일정부분 다스릴 권세가 정한 때까지는 허락되었다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사단도 알고 있습니다. 사단은 예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유혹한 사단은 예수께서 오셨을때에도 유혹하러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유혹했읍니까? 인간의 필요한 권세와 조건을 자기에게 경배하기만 하면 예수께 다 주겠다는 유혹이었습니다. 얼마나 치밀하였느냐하면 예수께서 모든것을 하실수 있다는걸 알고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 했지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했지요? 뭐하러 힘들게 고난의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하는가 하면서 자기에게 절하기만 하면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한번에 주겠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말고 다른 능력으로 사람들을 구원해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매순간 순간마다 사단의 유혹은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것보다 인간적인 공로나 행위나 업적주의로 자꾸만 부추깁니다. 세상의 화려한 영광으로 미끼를 던지지 않습니까?
그것도 어설프게 속이는 것이 아니라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 대면서 예수 믿으면 이렇게 들어가도 복이요 나가도 복이요 실패에서 성공해야만 한다고 부추깁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박수를 받아야 믿음의 성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높아져야 하고 더 커져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신자가 실패하는거은 하나님 영광을 감추는 것이라고 하고 어떻해서든지 군림하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에 굴복하지 않은 신자가 거의 없습니다. 내 처음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이것을 걸어놓고 장사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좁은 길로 좁은 문으로를 걸어 놓거나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이런것이 있습니까?
다시한번 돌아볼 때가 아닌지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런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보면서 인간적인 감상이나 연민에 빠져서 슬퍼하기보다는 그 십자가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십자가가 없었다면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죄에 대한 마지막이며 결론이며 그 십자가는 우리의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완성을 위한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죽을 수 없는 그 것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기쁨의 좋은 소식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생명이며 시작이며 복음입니다. 우리의 진홍같은 죄가 주홍같은 죄가 십자가로 깨끗하게 해결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이었을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을때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속하시고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끗하게 죄에서 자유한 다음에가 아니라 그러기 전에 먼저 예수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언제까지 가슴을 치며 슬퍼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유혹과 권세에서 번번히 넘어집니다. 그것을 슬퍼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매순간 세상에서 믿음을 감추며 부끄럽게 살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슬퍼하지는 맙시다. 고난을 슬퍼하지는 맙시다. 낙심을 슬퍼하지 맙시다. 그런것으로 인하여 더욱 주를 의지할수 밖에 없다는것을 감사하십시오. 아직도 예수안에 거하지 못하는 자녀와 이웃들의 영혼을 위해서 슬퍼하십시오. 사업 망한거로 슬퍼할것이 아닙니다. 병들었다고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것으로 슬퍼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기쁨입니다. 구원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이 복음의 의미를 알고 누리는 것이 이시대에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가운데 이 십자가의 기쁨이 온전하게 살아 있습니까?
200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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