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주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둘러 보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하십니다.
고아는 어느 시대에나 연약하고 불쌍한 대상입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보살필 것을 말씀합니다.
선지자들도 기회 있을때마다 고아와 과부에게 신경을 쓰라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모든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모든 필요입니다.
부모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예언한 그 메시아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론 이 비밀을 아무나 알 수
없습니다. 이 비밀은 성령의 가르침으로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합니다.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예수께서 구약의 예언으로 오실
그 메시아이며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이해에 도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대망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대동소이
한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적인곳에서의 임함,
즉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하여 이루어질것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과거 다윗왕조가 이루었던 영광과 번영의 왕으로서의 강력한
통치자로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고통하게 만든 불의한 이방나라를
때려 부수고 심판하며 세상의 머리가 되는 복을 실현시킬 영웅적인
메시아상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이렇게 말씀 하셨고 들었지만 본질을 알아듣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도 동일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하신후에 나타나시고
함께40일동안 먹고 마시며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증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1:6)
제자들은,사도들은 아직까지도 메시아상을 이렇게 이해하고
바랐던 것입니다. 언제 메시아의 사역에 대하여 알았을까요?
오순절 날이 이르러 성령이 오셨을 때입니다.
초대교회의 태동입니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한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알고 십자가를 알고
고난을 알고 이사야의 예언적인 성취를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장황하게 말한 것은 이것때문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비밀을 알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식적으로 정보를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고 학습을해서
문제를 내면 정확한 모범 답을 훌륭하게 말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메시아되심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 공부와 배움이 필요 없이 무조건 성령이 가르쳐
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의 탐구가
결국은 신앙의 깊이와 말씀을 이해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가기에는 온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의미를 당장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왜 고아라는 말인가 할 수도 있습니다.
고아를 단순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면에서만 살핀다면 많은것을
놓쳐버립니다. 그런면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해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말씀하심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알게된 것은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밝히 증거하심으로 알았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이것을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요엘서를 인용해서 선포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도들은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죄값을 청산하사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며
돌이켜서 회개하게 하며 그 이름으로 성령을 받으라고 선포합니다.
성령의 권응을 받은 사도들이 한 일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라는것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신분이 하나님이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영원히 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성령 안에서 예수를
믿고 주라 고백케 하시고 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죽임 당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속제물로 받으시고
그의 피로 인하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모든 믿는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루고 계십니다. 이루워 가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오늘도 우리의 작은 신음을 놓치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고통하는 그 자리에 함께 고통하시며
우리가 기뻐할때 함께 기뻐해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세상에서 거절과 멸시와 낙심가운데
있을수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말씀으로 살며 세속에 물들지
않으며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현실은 거부당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잣대는 믿는자들의 고난에 대하여
조롱과 비웃음으로 판단합니다.
그때 우리는 낙담하고 절망하며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고아처럼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성령으로 거하시며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예수님입니다.
때로는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며
좋은일이 있을때는 함께 기뻐하시며 슬픔이 올 때는 위로해
주십니다.
왜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대 이런일을 허용하십니까?
우린 그런 질문을 매번 합니다.
왜 은혜많이 받아서 열심히 기쁨으로 살아가려는대도
삶은 가난하며 사람과의 관계는 곤고합니까?
그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속했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많은것을
주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위로부터 주실 그 소망을
간절하게 바랄까요? 이미 이곳에서 만족하며 살고 있는데
주님의 나라가 오기를 그나라에 갈 것을 소망할까요?
잘 기억하십시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했던 믿음의 선진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았기에 돌아갈 본향을 더욱
사모한 것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자가 좀 어렵고 불편하다고
낙심하겠습니까?
이것은 잠시 잠간이지
난 가야할 곳이 있는데 여기는 평생 머물곳이 아니지
떠나야 할 곳이지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 잠시 여행을 즐길수 있도록 배려해 주심에
오히려 감사할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이런 고백과 찬양이 어떻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정확한 신분을 분명하게 인식하신다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괴로움에 전부를 걸지 마십시오.
다만 내가 어떻게 거룩하신 주님의 손길에 은혜안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는가를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감사하기도
부족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아멘.
2008-07-24. 주님과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