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가 없었다면의 글은 굉장히 오랫동안 다듬어진 글인 동시에 제 글의 결론과도 같은 글입니다.
확장되어 지는 하나님 나라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잘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조금 더
묵상 했던 것입니다.
이제 다음 글입니다.
창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눈이 밝아’ 창3:5에서의 눈이 밝음과 창3:7에서 눈이 밝음은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쓴 ‘눈이 밝음’이란 눈이 밝아짐으로서 일어나는 좋은 영역만을 상상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는 고전적인 수법입니다. 환상을 심게 하였고, 호기심을 자극하였습니다.
창3:7에서 막상 눈이 밝았을 때는 나쁜 영역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눈이 밝아 죄를 알고, 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영적 존재의 시각에서 육적 존재의 시각으로 벌어벗은 몸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이 밝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눈이 어두워 자기의 벗은 몸을 보지 못했다는 뜻일까요?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로 데려오는 모든 생물을 보고 그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마음껏 먹었습니다. 에덴동산을 마음껏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보았고, 하와의 벗은 몸을 보았고, 자기의 벗은 몸을 보았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벗은 몸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의 관점은 벗은 몸을 보았지만 죄악의 관점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 관점이고,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는 벗은 몸을 보았을 때 죄악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관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악의 개념이 들어갔을 때는 성욕이라든지 죄의 개념을 가지고 벗은 몸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보는 모든 시각이 우리와 동일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서 범죄의 순간 ‘눈이 밝아졌다’고 표현한 곳이 유일하게 이곳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범죄의 순간을 긍정적인 듯이 표현한 곳이 이 곳 밖에 없다고 추측합니다.
우리의 눈이 어두워 그를 몰라보았고, 그를 찔렀습니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 후에는 눈이 어두워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눈이 밝아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곰곰이 생각 해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범죄의 순간 눈이 열려(밝아져) 새로운 세상을 본 것입니다.
이제껏 아담과 하와는 죄 없는 세상만 보았습니다. 빛의 세상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에 어두운 세계라는 새로운 세상을 본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는 순간을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새로운 세상은 유감스럽게도 어두움의 세상이며, 악의 세상입니다. 다시 선의 세상만 아는 시기로, 빛의 세계만 아는 시기로 돌아갈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