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어릴 적부터 비전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요셉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이 있어야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그래서 어릴 적부터 나에게도 비전이 있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장래 희망을 무엇으로 결정해야할지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어릴 적 나의 꿈은 목회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흥회에서 나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기성세대를 향해 과감히 돌을 던졌던 말틴 루터처럼 세상을 개혁 시키는 목회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준비하지 못한 나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은 나의 꿈-내가 목회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꿈이 아님-을 좌절 시켰고 그때부터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야만 했습니다.
  내가 목표를 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동안 하나님은 나의 모난 성격을 사용하여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삶-노가다-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8,90년대만 하더라도 술과 여자, 노름 그리고 뇌물의 대표로 불리었던 노가다는 분명 목회와는 극과 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환경으로 이끄셨을까?’를 생각하며 여기에서 나는 좌충우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계속 나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하여 왔는데 나이 40이 넘은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이제 내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 것만 같습니다.

  요즈음은 교회나 학교에서 비전에 대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청소년들이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와 같이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지 못한 체 방황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너무 많으리라 생각하고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은 사유로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그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될까 싶어 이 글을 씁니다.

  그 이전에 나는 왜 그 오랜 동안 나의 비전을 설정하지 못하고 방황했을까?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는데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내가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사고 구조에 기인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미 구원-모든 사람의 인생 최대 목표-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이상 다른 것에 대한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이미 목표를 달성했는데 또 다른 목표가 무었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예수 안에서의 나의 삶은 더 이상 무었을 필요로 하는 삶이 아니고 모든 것을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내가 왜 목표를 가져야 하는가?
세상의 것은 무가치하다. 돈, 명예, 권력으로 대표하는 세상의 것이 나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요셉이 국무총리(권력)가 된들 하나님 앞에 그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생각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를 지배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내가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그 오랜 세월을 보낸 이유로 봅니다. 무의식...

  또 한 가지는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사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교회는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가장 편하고, 나의 장점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며, 교회가 요구하는 신앙덕목이 자연스럽게 몸에 베어 있엇기 때문에 가장 안정적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노가다 세계에서 느끼는 세상은 독특하다.-으로 나아가는 것은 두려움이요, 변화를 거부하는 본능적인 몸짓이었기 때문에 그것-‘세상은 부질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합리화였습니다.
자기합리화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생각하려는 본능과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이것이 자기합리화인지, 신앙에 근거한 옳바른 생각인지 혼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자기합리화임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늘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것을 깨닫는 것도 '기독교 세계관'류의 책자나 주워 들은 풍월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기보호본능의 껍질을 벗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최상위층의 대부분의 사람은 목표가 뚜렷합니다.
중상위층의 대부분은 목표는 있지만 목표가 불분명합니다.
하위층의 대부분은 목표 자체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도 목표는 있지만 목표가 불분명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이제 나는 거창한 목표는 없습니다. 아니 그것을 위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공부를 15등 하는 사람은 10등하는 것을 목표삼고 열심히 공부하면 됩니다.
작은 산을 오르다보면 큰 산을 오를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분명히 작은 산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큰 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작은 산도 오르지 않으면 그야말로 인생 밑바닥을 살 것입니다.
그렇게 단계를 밟아 올라가다보면 큰 산이 보일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는 그때쯤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어릴 적에 한번쯤은 나는 무엇이 될까? 고민 해 보겠지만 목표가 정해지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을 찾는 데 너무 얽매이지 맙시다. 또 그것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지도 말고, 삶을 대충 살지도 맙시다.
‘자기 삶 속에서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만일 나와 같이 목표가 뭔지도 모르고 또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즈음은 덜 하겠지만 옛날에는 부모의 강요에 의해 의대, 법대에 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요구를 하였겠지만 자식은 그 부모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여 의대, 법대를 들어갔다가 다시 재수를 하는 사례를 많이 보았습니다.

  요즈음은 주로 편입하는 것 같습니다. 부모의 강요는 아니겠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특정과를 지원 해 들어갔고, 공부를 하다 보니 적성에 맞지 않아 전과를 하든지, 편입을 많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또 자기의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 속에서 여전히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자기가 원치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또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더 많은 고통이 오는 것 같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참아 내야 하는 고통이란 참으로 무의미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금방 포기하죠. 이런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그래서 대안을 찾아 나섭니다. 그렇게 해서 대안을 찾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여기저기 대안을 찾다가 마침내 포기하고 말죠. 그런 사람 중 대부분은 대안 없는 삶 속에 찾아오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하죠.

  그러나 그 중 일부는 내가 원치 않는 삶을 내가 원치 않는 이유(주로 먹고 살기 위해) 때문에 참아 내야 하는 고통을 묵묵히 이겨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을 묵묵히 살다보면 어느새 자기도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 있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생활의 달인 중에 그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자기가 그러한 삶을 살고 싶어 그렇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살다보면 그 중에서도 제법 살만합니다.

  물론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분야에서 즐겁게 일하고 살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절망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말고 묵묵히 열심히 살아간다면 어느새 제법 살만한 세상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사라의 웃음

2013.01.22 22:34:12
*.109.85.156

나눠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
글을 읽으며 한국교회의 비전에 대한 잘못 가르침의 문제점과 우리나라 교육현실의 문제점이 보여 참으로 안타까운 맘이 듭니다.

개인의 추구하는 소망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비전이라 가르치며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 도우시라고 떼 부림의 모습을 기도라 가르치며 비전이라 말하는 한국교회의 문제점... 저 또한 오래도록, 아주 아주 오래도록 그게 비전이며 그렇게 목표를 정해 놓고 그 목표를 이루어 주십사 빌고 비는 것이 믿음이라 여겨왔었습니다. 조금씩 말씀을 배워가며 또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중입니다만, 하나님의 비전을 자기의 비전으로 대체시켜 버리도록 잘못 가르치는 교회의 문제점들이 마냥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너무도 좋아하는 일을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며 세상에 유익을 줄수 있는 일임이 확신될 때까지 주변에서 부지런히 돕는 교육체제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되어집니다. 공부의 신을 만들려 몸부린 치는 부모님들의 자세, 그리되도록까지 도웁고 있는 교육의 문제점들이, 그 가운데서 방황하며 고뇌하는 자녀들이 너무도 안타깝고 안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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