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3) 예수로 인해 실족하는 신자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6)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하늘에 계신 예수님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사람의 영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선생인 그로선 마지막 날에 성령이 사람들을 새롭게 바꿔 준다는 구약 예언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봐도 아직은 마지막 날이 된 것 같지 않으므로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데도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고 꾸중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사역을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즉 마지막 때가 이미 도래했다는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나사렛 출신의 인간 랍비의 종교적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주님에게 강림했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부와 성령 두 하나님이 이 땅의 마지막 날이 왔다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삼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증해 준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주님과 세례 요한이 증언했음에도 유대 지도층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견책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 꾸중에 이어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덧붙였습니다. 천국이 이미 이 땅에 도래했다는 증언을 믿지 않았으니까, 하늘의 일을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주관하시는 구원에 대해 자세히 가르칠 것이므로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라는 역설적인 당부였습니다. 말하자면 성부와 성령 하나님이 왜 당신에게 그런 증언을 하셨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또다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고 알듯 모를듯한 말씀부터 했습니다. 당신이 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소명을 실현하다가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 즉 인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해 미처 모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말했지만, 그 진술이 문자적으로 옳을 뿐 아니라 당신은 그보다 훨씬 초월하는 존재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말에는 정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으나 원문의 시제만 따져봐도 주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를 몰라도 같은 계통 언어인 영어 성경을 참조하면 됩니다. 먼저 하늘에 ‘올라간’ 것은 현재 완료로 이전에 하늘에 갔다 온 적이 있어서 그곳에서 보고 깨달았던 일들을 지금도 온전히 알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내려온’ 것은 단순 과거 시제로 이미 내려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을 합친 문자적 의미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그 전에 이미 하늘에 올라간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마리아에게서 성육신 하기 전에도 하늘에 계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의미를 더 확실하게 드러냈는데, 우리말로는 단순히 ‘인자 외에는’이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원어로는 현재형으로 인자는 항상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the Son of Man who is in heaven.) 이에 관해선 원어의 배열순서까지 맞춰서 일대일 축자적으로 번역하는 흠정역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늘에서 이미 내려온 자가 지금 하늘에도 있고 또 하늘에 올라간다고도 합니다. 쉽게 풀자면 항상 하늘에 있는 인자인 그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는데, 그분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 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실제적인 거처는 영원토록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일에 대해선 가장 정확히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도 사실 어폐가 있는데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늘을 알지 못하거나 부족하게 아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주님은 인간 니고데모의 수준에 최대한 맞추어서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로선 이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나, 나중에 주님이 당신께서 예언한 대로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에는 주님이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주님의 시신을 침향으로 방부처리를 했기에 더더욱 실감했을 것입니다.
천국 간증과 다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더 정확히 이해하려면 바울의 천국에 갔다 온 간증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늘의 일에 대해 일부 알게 되었어도 설명할 재간이 도무지 없다고 합니다.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자 영적으로 가장 하나님과 친밀한 바울인데도 인간의 말로 풀어낼 재간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신자가 죽으면 그 영이 옮겨질 천국이 분명히 실존하고 있고 또 그곳이 얼마나 좋고 은혜로운지 바울에게 생생하게 체험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다하고 무엇보다 그에게 계속해서 닥칠 온갖 박해는 물론 순교까지도 당당하게 감당할 수 있는 믿음과 권능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로선 자기가 전하고 있는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만이 천국에 오를 수 있음을 더 확신했을 것입니다. 자기부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으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이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고린도후서보다 약 십 년 후에 저작한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 24) 로마 감옥에 갇혀서 죽거나 자칫 사형 판결이 나면 천국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너무 좋겠지만, 그래도 빌립보 교인을 비롯한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서 이 땅에 남아서 자신이 받은 소명을 실현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합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철두철미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현재 완료, 과거, 현재 세 가지 시제를 다 사용해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원한 존재라고 밝혔습니다. 틀림없이 그로선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하늘에 올라간 적이 있었고 또다시 내려왔다는 말만 했다면 그런대로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묵상에 깊이 몰입하다가 신을 만났다든지, 영계를 보고 왔다든지, 심지어 자신이 신과 합체가 되었다는 식으로 증언 내지 자랑하는 현자나 종교인이 종종 있습니다. 그 실체적 진실은 거의 모두 그러고 싶은 자기 소망이 과다해져 착각했거나, 뇌세포의 일부가 단시간에 그쪽으로만 편중 작동해서 생기는 환상일 것입니다. 물론 드물긴 해도 바울 같은 신실한 신자는 하나님이 입신을 시켜서 천국을 체험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현재 하늘에 있다는 주님의 본문 말씀은 종교인들의 극적인 영적 체험은 물론 바울의 천국 탐방 간증과도 차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받기만 하는 처지이나, 하늘에 항상 계시는 예수님은 그에게 계시를 주시는 신분입니다. 지금 니고데모와 상담하고 있으면서 당신이 현재 하늘에 있다고 논리적으로는 틀린 말씀을 하셨으나, 영적으로는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했기에 그가 그 사실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의미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게 당신뿐 아니라 사탄을 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담은 자기 스스로 세상과 자신의 주인이 되려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고, 그 후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끊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구원 주기로 기뻐하는 자를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택하여서 완벽한 섭리로 인도하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당신과 영적 교통을 할 수 있도록 그 관계를 타락 이전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회복되려면 죽어 마땅했던 자기 죗값을 반드시 공의롭게 치러야만 합니다. 만약 똑같이 죄로 타락한 한 인간이 인간을 대신해 제물로 바쳐져선 대속의 효력이 전혀 발생하지 않습니다. 죄가 전혀 없는 온전한 제물이 바쳐져야 하기에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거듭남이란 예수님이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주려고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도 그래서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서 그 확신에 따라 적절히 반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이스라엘의 최고 선생인 니고데모에게 또 다른 구약 예언에 비추어서 당신에 대해서 잘 헤아려 보라고 당신을 인자라고 칭했습니다. 그가 어림짐작으로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인사말을 건넸지만, 사실은 네 말이 절대적 진리라고 성경에 이미 증언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명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7:13,14)
세상 모든 백성과 나라들을 영원토록 다스릴 왕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인간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때가 되면 그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려고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땅에 내려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이 항상 아주 정교한데 니고데모에게 바로 그 선생이라는 의미로 정관사를 붙였듯이, 지금 인자에도 정관사를 붙여서 다니엘이 예언한 그 인자(the Son of Man)가 바로 당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니고데모에게 신학교로 치면 조직신학의 기독론을 한 문장으로 축약해 가르친 셈입니다. 당신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항상 동일한 하나님이었다고 말입니다. 주님이 공사역 내내 당신을 인자라고 칭한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서 니고데모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 찌든 인간에게 하늘의 일을 온전히 가르칠 수 있는 자는 예수님뿐입니다. 세상 어떤 종교인도, 심지어 바울도 세상과 인간을 그 타락한 참상 가운데서 건져서 완전한 회복으로 이끄시려는 삼위 하나님의 경륜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구원이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오시는 성육신으로 시작된다는 진리부터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에게 가르쳐 준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수준에선 절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구체적인 변증이나 설명 한마디 없이 십자가에 스스로 올라가셨고 대신에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서 하늘에만 있는 사랑을 온 천하에 보여서 알게 해 준 것입니다. 그 사랑도 성령의 간섭으로만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당신의 말씀만으로는 당신의 정체성을 입증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그 선포대로 증험해야만 진리로서 확증됩니다. 이미 예를 한 번 들었지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혼동이 와서 주님을 찾아와 직접 확인하려 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이사야 선지자가 구약에 예언해 놓은 대로, 주님은 인간이 절대 갖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실현할 수 있는 권능으로 불치병자들과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고 있다고 스승인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당신의 정체성을 말로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증험하고 있음을 너희가 목격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삼손 같은 죽음
그리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라고 했습니다. 현대 첨단 의학으로도 불가능한 불구자들을 고쳐주고, 죽은 자도 살리면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데도 당신을 믿지 못하고 실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을 이상하게 여길 것 하나 없습니다.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오직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에게 직접적인 축복이나 좋은 일이 생기지 않으면 아무리 세상을 뒤바꿀만한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도 시기 질투하다 못해 미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로, 심지어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경고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다, 아니다 유대 사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의 괴수다라고 팽팽하게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배척 대적하는 무리가 훨씬 더 많아짐으로써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최대의 불가사의이자 역설입니다. 주님이 죄를 범하기는커녕 인격적 하자나 사회생활에 실수도 하나 없었습니다. 오직 선한 일, 그것도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는 이적과 가르침을 주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죽여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로 자기들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자기들 요구대로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역설이라고 말씀드린 뜻은 만약 예수님이 평범한 인간 선지자였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비극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인간 랍비에게 바라는 사항은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고 평범합니다. 모세 율법에 계시 된 도덕적 종교적 계명들을 어떻게 실현할지 그 구체적인 방안만 배우려 합니다. 랍비끼리도 조금 더 잘 가르치고 더 따뜻하게 보살피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유대인들도 니고데모의 인사말처럼 예수님이 평범한 인간 랍비는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로마를 물리쳐서 조국을 식민지에서 해방시켜 주고 나아가 다윗 왕국 때의 영광을 재현해 달라고 주님께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잔뜩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요구에는 꿈적도 하지 않고 오히려 죄인, 이방인, 과부, 세리, 창녀 같은 하나님께 저주받았다고여기고 유대 사회에서 소외시킨 자들과만 주로 만나서 교제 상담 치유해 주었습니다.
거기다 어쨌든 주님이 외모로는 인간에 불과하니까 점차 무시 비하하다 못해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항거하거나 추궁하기는커녕 일언반구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대중은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머리카락이 다 잘려서 완전히 무력해진 삼손에게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 조롱 멸시 폭력을 가하다가 십자가에 매달아버렸습니다. 삼손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능력을 지닌 주님은 그들에게 복수는커녕 마지막까지 거꾸로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주님은 하늘의 천군 천사를 동원해 단번에 로마는 물론 부패한 유대 당국도 무너트릴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다고 인간 사회, 특별히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삼손처럼 물리적 육체적인 복수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추악함이 절대 해결되지 않으며, 복수는 끊임없는 복수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유대 대중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면 이스라엘이 로마의 자리를 차지해서 로마를 지배할 것이며, 얼마 안 가서 로마보다 더 부패해짐으로써 그에 저항 배반하는 또 다른 세력에 의해서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그런 인간적 윤리를 지키려고 무저항으로 일관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스스로 세상 이치를 깨달은 인간 랍비의 입장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영원토록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죗값을 필두로 모든 고난, 슬픔, 분노, 수치 등을 당신께서 다 짊어지기로 하는 대신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도 곧바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고(요3:16) 말한 것입니다.
실족하는 기촛돌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으로 인해서 실족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실족(失足)은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꽈당하고 완전히 대자로 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미처 알지 못해서 배척 미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인생길을 궁극적인 성공으로 인도받느냐, 그러지 않고 그분을 믿지 못해서 영원한 실패로 끝나느냐를 가름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에서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은 한 돌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돌을 믿는 자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 한다고, 즉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깨닫고 믿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심판의 둘로만 나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죄에서 건져 주려고 오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인식하고 믿으면 그분에 의해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반면에 그를 단순히 도덕과 종교적 가르침을 주는 인간 랍비로 취급하면 성령이 역사해 주지 않아서 하늘의 일은 끝내 알지 못하고 땅이 전부인 줄 믿고서 땅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같은 언어 역사 전통 문화 습관 종교를 공유하는 유대인들 사이에도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인간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이적을 일으켰다고 다들 인정했기에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찬양하며 열광했는데도 그랬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인간에게 주려는 축복과 인간이 하나님이신 주님에게 받고 싶었던 축복의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못해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해방되면 현재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문제가 해결되고서 풍요롭게 살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므로 마지막 날 하나님의 영이 음부에서 자고 있던 자기들을 새롭게 바꾸어 부활시켜 줄 것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현실적 문제만 해결되면 인생에 고통스러운 것은 다 해소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너희가 지금 힘들고 고달픈 것은 절대로 현실의 결핍이나 제한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핍할 때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느라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 볼 여유도 사실상 없습니다. 당신을 밤에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는 현실적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어서 모두 부러워하는 신분과 위치를 지녔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일을 물으러 왔다는 것은 현실의 풍요가 인간의 참 행복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베풀려는 축복은 그 살아가는 환경이 풍요로워지고 행하고 있는 일에서 형통케 하여 재물, 권력, 명예가 넘치도록 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인간에게 최대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께 병 고침을 받고자 새벽부터 찾아온 사람들을 물리치고 다른 동네에 복음을 전하러 간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보다 천국 복음을 깨달아서 하나님 나라에 친백성으로 참여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자기부터 알아야 한다.
이처럼 역사상 가장 역설적이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진리를 입증하는 증거도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를 정말로 진지하게 묵상 탐구하면 자신의 의가 정말로 누더기 같은 쓰레기임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서 내 죗값을 갚으시고 죽으신 은혜를 진심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는 내 인생에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사실도 절감하게 됩니다.
바꿔 말해서 니고데모처럼 평소에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의 영혼이 너무 허무하고 갈급하며 그것을 인간적 방안으로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인식하게 되면 주님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됩니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고 추한 생각과 말이며 그로 인해서 행동으로도 온갖 죄를 짓고 있는 철두철미 죄인이라고 실토할 때 하나님인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이 그 전에 혹은 그와 동시에 역사해 주시면 예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아시고 모든 추악한 죄들을 당신의 보혈로 양털처럼 깨끗게 해주셨다는 확신과 함께 감격의 눈물이 절로 흐르게 됩니다. 지금껏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했어도 온전한 기쁨과 만족이 없었던 까닭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서 참사랑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제대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게으른 인간은 자신에게 궁핍과 부족이 한계 상황에 도달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스스로 도무지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 문제가 닥쳐야 겨우 하나님을 찾고 기도합니다. 정작 문제는 신자 중에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믿음을 가진 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지는 이방인들도 기도한다고 예수님이 지적했음에도, 교회 출석한 지 수십 년이 되어도 기도하는 내용이 전부 그것뿐입니다. 사십일 작정 새벽기도를 뜨겁고도 끈질기게 하여서 어쩌다 해결 받으면 아주 믿음이 좋다고 착각합니다.
기껏 잘 봐주어야 예수 믿으면 지옥 심판을 면하고 천국 갈 수 있다니까,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행하고서 천국 입장권을 받아 쥔 양 착각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행할 남은 일은 현실 고난을 해결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이 덮어씌운 종교적 멍에대로 따라간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같은 믿음입니다. 바울처럼 예수 십자가에 드러난 하늘의 일을 통해서 자기 인생의 의미와 소명을 깨닫고서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사는 신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아서 실족하지 않는 것은 인간인 자신의 정체성도 정확히 알게 되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은 추하고 악한 생각뿐이라고 절감해야만 비로소 예수 십자가가 인생에서 최고 큰 축복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자신의 옛사람이 완전히 죽어야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보다는 예수님의 긍휼을 먼저 찾는 새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살리려고 이 땅에 와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그것 외에 또 다른 은혜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 안에 당신의 사랑이 완전히 다 표현되고 입증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전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에게 꼭 필요한 모든 은혜를 우리 영혼에 풍요롭게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수시로 현실 삶이 고달파도, 내 속에 죄성이 꿈틀거려도, 그분의 나를 향한 사랑은 절대 줄지 않습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이 하늘에 영원히 계시듯이, 그분이 십자가에 실현한 사랑도 이 땅의 신자에겐 영원한 현재형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과 실제로 교제 동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뜻조차 완전히 이해 체득하지 못하고서, 단지 교회 생활 오래했다는 근거로 자신이 도덕적 종교적 의인인양 착각하면서 계속 실족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2/23/2025)